EP·17
먼 옛날 장씨 성을 가진 도사가 태화산 자소봉에 닿아 도관을 세웠다·
장씨가 어느 날 꿈을 꾸다 검을 신선을 만나 그 가르침을 청했다·
꿈에서 깨어 열 달을 참선하여 눈을 뜬 때에는 이미 검이 스스로 움직이는 경지였다·
장씨가 이에 선당을 지어 그 현판을 붙이기를 무당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태화산을 달리 불렀다·
무당파의 본산이기에 무당산이라고·
그리고 여기 무당파로 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부 계속 업혀 계셔야겠습니까?”
“그래· 이만하면 되었다·”
“그럼···”
“아이고 늙어서 이게 무슨 설움인지· 하나뿐인 제자라고는 조석을 일원으로 내팽개칠 생각밖에 안 하는구나· 아이고 원시천존이시여·”
“사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부님은 아주 불로장생하실 분이십니다· 적어도 제자가 그리 되도록 항상 기원하고 있음을 아십시오·”
“그래· 그래도 나 혼자 장생하여 무슨 영화를 보겠느냐· 나 역시 제자의 선도를 항상 빌어주고 있단다·”
곁을 따르던 도사들이 웃었다·
욕을 먹으면 오래 산다고 했으니까·
“그런데 사부· 어째서 매달려 계십니까?”
“업혀 있기가 힘들어서 매달려 있기로 했다·”
“상제께서 참으로 무심하십니다· 살아있는 활선 그 자체이신 분을 지상에 이리 내버려두신단 말입니까· 어서 부르셔서 데려가지 않으시고·”
“등선에 들어 선계의 말미나 할 것 같으면 굳이 채비를 할 연유가 있겠느냐?”
“저는 연유가 생겼습니다· 신선의 도가 지상의 인연을 받지 아니하니 그 위계가 선착순이 아니겠습니까?”
“허허 제발 내 소원이니 그리 좀 해보거라·”
노인을 업은 청년 환육이 이를 갈고 탄식했다·
“내 팔자가 아주 사납구나! 화산에 창빈도사가 스승을 그리 잘 모셔 아주 영약을 밥처럼 처먹고 초절정을 바라본다던데· 누구는 자소단 찌꺼기도 못 보았으니· 인연이란 삼생의 복이라던데 어찌 내가 이리 박복하단 말인가!”
“오냐 말 한번 잘했다· 나도 제자가 창빈이면 영약을 밥처럼 처먹일 수 있는데· 참으로 아쉽도다·”
“사부! 진짜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환육이 긁혔다·
무당의 태극이 이토록 부드럽게 공격을 넘기는 것이니 스승에 비하면 환육은 아직 애송이였다·
무당으로 복귀 중인 무당파 도사들이었다·
형산파 태상장로의 희수연이 한 달 전이었고 모처럼 나온 김에 동정호의 풍광을 벗 삼아 도를 닦았다·
뾰로통해진 제자를 스승인 승수 도장이 달랬다·
“이놈아 서운하냐? 내가 정후만큼 제자를 챙겨주진 못해도 보다 귀중한 것을 네게 주었잖느냐·”
“스승님께서 말이십니까? 불초 제자 무얼 받은 기억이 없으니 이 무슨 기사란 말입니까?”
“이놈아 배분 좋다는 게 무엇이냐· 초절정이고 뭐고 네 아랫놈인데 잘났다 한들 질투하여 무엇 하겠느냐·”
“생각해보니 또 스승님의 말씀이 옥과도 같습니다· 매달리시느라 힘드시지요? 불초 제자가 감히 하늘 같은 사부의 엉덩이에 손을 좀 대도 되겠습니 음?”
환육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들으셨습니까?”
사람의 비명소리·
희미하지만 처절하며 듣는 것만으로도 끔찍한 기분이 드는 비명이었다·
—-
처참한 몰골이 된 쥐상 사내가 바닥을 기었다·
갑자기 그늘이 져 올려다보니 아청이 쪼그려 앉아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사 살려····”
“내가요? 어떻게요? 내가 의원으로 보이나?”
“살려주십시오 제발···”
“그쪽은 내 전문이 아니라서·”
문득 떠오르는 광경이 있었다·
화단 앞에 친구들이 잔뜩 몰려있다·
빨리 와 보라고 소리치는 누군가·
지렁이 한 마리가 시멘트 바닥을 기고 있었다·
그리고 친구의 손에 들린 돋보기·
서로 빨리 내 차례라고 나도 해보자며 햇빛을 모아 지지던 날이었다·
그때 친구 중 누구 하나 얼굴도 이름도 딱히 기억은 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 그 필사적인 꿈틀거림 고작 아이 손바닥만 한 유리의 집광에 금세 익어 부풀어 오르던 지렁이의 몸통만은 선명했다·
어느 유년기의 추억이었다·
“맞네·”
“살려·”
“지렁이 쪽이 좀 더 꿈틀거렸나?”
“제발 살려 줘 제발···”
“근데 아프지 않냐? 그냥 죽으면 편한데? 그냥 죽여달라고 하지 왜?”
아청이 이해가 안 되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쥐상 사내가 아청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색과 마주쳤다·
해를 등져 그늘진 아청의 눈동자 속 요요하게 아롱거리는 광채·
얼핏 보아 보라빛 그러나 피처럼 붉고 실핏줄과 같이 푸르며 태양의 노오란 타오름이었다·
온통 검고 때로 희며 그럼에도 투명하다·
그야말로 세상 어디에도 없는 색상이었다·
천살의 살성이 골수에 스미면 불온한 별빛으로 세상을 비춘다·
“마물! 마물이로구나!”
퍼뜩 고개를 들자 검을 앞세운 청년이 곧게 쇄도했다·
아청이 이에 검을 들어 휘두르나 청년이 발을 딛어 공중을 밟고 솟구치며 피했다·
무림 강호의 암묵적인 규칙 중 하나가 있었다·
무당파 직전 제자의 경이로운 보법을 보고 난 후에는 반드시 감탄으로 경의를 표해야 한다·
교양 있는 무림인이라면 이럴 때 반드시 ‘과연 제운종!’ 하고 외쳐주어야 했다·
하지만 아청은 교양이 없었다·
다만 상상치도 못한 방식의 공중 기동에 어쩔 줄을 모르고 공세를 받아내기에 급급했다·
공중에서 일곱 번을 뛰어 방향을 바꾼다·
오른쪽 왼쪽 위와 팔방으로 마침내 허공 어느 지점에서 몸을 뒤집으니 적이 보이지 않는 천장을 박차 순식간에 쇄도했다·
검의 첨단이 태산처럼 크게 밀려왔다·
아청이 이를 악물고 검을 모로 뿌렸다·
아슬아슬하게 적의 검병 코등이에 걸친 월광검이 필사적으로 궤도를 비틀었다·
눈앞까지 쇄도했던 검극이 시선의 오른 방향으로 빠져나갔다·
안도도 잠시 청년의 빈 왼손이 보였다·
회전하며 새끼로부터 차례로 말리는 주먹·
아차·
아청이 발뒤꿈치로 진기를 쏟아부었다·
퍽· 아청이 날아 땅바닥을 나뒹굴었다·
울렁거리는 속으로 땅을 딛고 서니 왈칵 치미는 구역질에 검은 피를 한 사발 게워낸다·
안타깝게도 아청의 앞섶이 남들보다 돌출되어 있었다· 토한 피가 온전히 옷 위로 쏟아져 축축하다·
“음···?”
아청이 눈을 끔벅거렸다·
한 대 얻어맞았는데 왜 상쾌한 기분이?
사실 무당의 칠성기와 복마권법은 둘 다 본래 탁월한 파마 정화의 성질을 가졌다·
강력한 정화기 두 개가 합쳐져 상승 작용을 일으키니 세 배 이상의 정화력이 아청을 때렸다·
다행히 아청은 월녀심결의 소유자였다·
월녀심결 역시 도가의 무공이다·
도가끼리는 내가기공으로 효과를 보기 힘들다·
도가 기공들끼리는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며 큰 피해 없이 빠져나가는 경향이 있었다·
다만 홀로 천살의 살성을 상대하던 월녀심결이 무당의 청수한 기를 받아 힘을 좀 썼다·
천살의 살성이 골수에서 빠져나와 피로 스미고 스민 피는 부패하며 몸 밖으로 나왔다·
얻어걸린 기연이었다·
그래봐야 천살의 겁에 닿는 운명을 잠시 보류했을 뿐이었지만·
이상하게 상쾌한 기분이었다·
아청이 평소의 아청이 되어 소리를 질렀다·
“비겁하게 앞에서 기습하다니!”
“무슨···?”
“문답무용! 오늘 이 자리! 역겨운 변태새끼들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죽어랏 소아성애자!”
아청이 필승의 자신감을 얻었을 때 하는 아무 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맞아보니 별것도 아니다·
처음 보는 입체 기동에 조금 놀랐을 뿐 그럼 뛰어오르지 못하게 찍어누르면 그만이었다·
제운종은 무림의 경이지만 월녀산보는 무림의 잊혀진 전설이요 신화였다·
입체 기동보다 더한 반중력 보법이다·
둥실 떠오르나 싶던 신형이 어느새 눈앞에 닥쳐 쇄도하자 환육이 기겁을 하며 검을 부딪쳤다·
“변태 새끼! 아동성범죄자! 발정난 개새끼!”
허와 실이 모호한 검결도 위협적이지만 그보다 연신 귀에 틀어박히는 욕설이 더욱 끔찍했다·
“자라지도 못한 애를! 그러고도 고추가 서냐! 씨발 불쌍하지도 않냐! 짐승끼리도 새끼랑은 안 붙어먹는다! 짐승만도 못한 새끼! 비교해서 짐승한테 미안할 새끼! 고추 떼라! 고추 떼!”
“자 잠깐 잠깐만···!”
그때였다·
“멈추시오!”
다급한 목소리 우르르 몰려오는 발자국 소리에 아청이 다급히 거리를 벌렸다·
씁 대체 그 어린 애를 어떻게 해 보려는 새끼가 이렇게 많아? 무림 꼴 아주 잘 돌아간다·
여래신장으로 마무리하고 도망이나 쳐야겠다·
아청이 그런 생각으로 청년을 살폈다·
문득 들어오는 업의 숫자 57·
뭐야 왜 높아요?
이윽고 쪽빛 도복을 입은 무당파 무인들이 우르르 밀려닥쳤다· 높낮이는 있어도 하나같이 선업을 이룬 사람들이었다·
개중에 최고 기록 경신도 있었다· 183·
183의 노인이 말했다·
“선자는 일단 노기를 좀 가라앉히시게나· 뭔가 오해가 있는듯 허이·”
“오해요? 오해가 있으면 사람 쳐도 돼요? 이거 안 보여요?”
아청이 피에 젖어 달라붙은 경장 가슴께를 잡고 펄럭거렸다·
여기저기 헛기침과 함께 먼 산 여기저기에 흥미로운 일이 벌어진 것처럼 시선이 돌아다녔다·
“제자야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저 선자는 왜 네게 그런 남사시러운 욕을 하고 있고·”
“그게 분명 마인이 살성을 보았는데····”
승수 도장이 아청의 눈을 보았다·
천살의 살성을 완전히 찍어누른 월녀진기가 모처럼 일을 하고 있었다·
아청의 눈에서 느껴지는 현기·
도가 치고는 날카롭고 서늘하지만 한 갈래임은 틀림없었다·
원래 도가와 불문의 내공은 눈에서 티가 난다·
“허허 네놈이 눈이 삐어도 아주 단단히 삐었구나· 아무리 봐도 선자는 도우로 보인다마는·”
“아니 분명 저 여자가 불길한 별빛을 뿌리며 저 사내를 죽이려 들었단 말입니다·”
그에 모두의 고개가 쥐상 사내를 향했다·
살아있는 것이 끔찍한 몰골이었다·
시선이 이번엔 아청에게 향했다·
아청이 항변했다·
“저 새끼 나쁜 새끼예요! 어린애를 따먹으려 아니 덮치려고 한 변태 새끼라고요!”
다시 쥐상 사내에게 시선·
“아니 아니라···· 그저 납치만····”
“이거 이 새끼 봐라? 납치? 그저 납치이? 그 애가 무슨 꼴이 되는지 알고 있었지? 어?”
“그건···”
쥐상 사내가 말을 잇지 못했다·
아청이 기세등등 의기양양 말했다·
“봤죠? 소아성애자나 바치려던 놈이나·”
승수 도장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허허 세상에 이런 금수 같은 새끼를 보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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