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70
“아이고 우리 꽃거지님·”
“뭐 이런 걸 다 주시고····”
“처음 뵈었을 때부터 보통 관상이 아니시다 이십 년 점소이 경력에 딱 알아보았지 뭡니까· 헤헤·”
얼굴 깐 적도 없는데 관상 소리를 하는 것이 참으로 점소이다운 대사였다
엄격 근엄 진지하던 점소이가 바뀌었다·
그야 무림 고수임을 알고도 어른인 척을 하기에는 담이 모자라기도 했지만 소중한 가게를 지켜준 은인이 고마운 탓이 컸다·
의외로 점소이는 직원보다는 동업자에 가까운 것이라 점내의 서열에 따르면 전주 아래 점주 아래 점소이 아래 숙수다·
물론 연차와 가게에 따라 다를 순 있다·
하지만 이십 년 경력의 점소이면 그냥 공동 점주라고 보면 될 것이다·
“너무 막 주지 말고 딱 차액만큼만 천천히 퍼 주세요· 인심도 한두 번이지 원래 계속되면 은인이 원수되고 그러는 건데·”
안 달라고는 하지 않는 것이 앞으로도 계속 오겠다는 뜻이었다·
점소이의 표정은 그저 기꺼웠다·
청하사협이 낸 위로금으로도 벌써 박살이 난 집기들과 손님들이 떼먹은 돈을 하고 남았다·
거기에 시체들에게서 모은 돈에다 병기까지 가져다 팔라고 했으니 따지자면 몇 달치 수입이 오늘 한 방에 나온 것이다·
“아이고 무슨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까요· 꽃거지님은 평생 서량반점의 은인이십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 감탄하는 것이 청의 말에 십분 공감이 되기 때문이었다·
점소이의 눈에 아예 존경의 빛이 담기기 시작했다·
말에는 현기가 가득하고 어마어마한 무림의 초고수이면서도 가진 것 없는 무소유의 도리를 실천하시다니!
그런가 하면 천한 점소이와도 이리 허물없이 어울려 주시니 그야말로 이야기책에서나 나올 진정한 협객이시다 하고·
누가 들으면 개가 풀 뜯어먹는 소리 한다고 할 망상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개는 풀을 뜯어 먹는다·
보통은 촵찹 경쾌한 소리를 내며 소화제 대용으로 뜯어 먹으며 그냥 풀이 입에 맞는 특이한 놈도 있다·
풀 뜯어먹는 개의 주인에겐 개가 풀 뜯어먹는 소리가 실존하듯이 은혜를 입은 점소이에게도 청은 어쨌거나 번듯한 무림의 여협이었다·
저 호쾌하게 드시는 위엄을 보라!
항적이 단기필마로 달려들어 한의 일만 군사를 참살하던 영웅의 기상이 바로 저러했을까·
그런가 하면 독한 술을 물처럼 들이키니 과연 천하의 호걸으로서 부족함이 없다 하겠다·
게다가 드러난 턱과 입은 또 얼마나 아름다워 면사를 쓴 얼굴이 추함을 감추려는 것이 아님에 분명한 절세의 미인이 분명할 것이다!
거지 행세를 하시더니 드시는 것도 거지처럼 드시는데 그럼에도 품격이 살아있구나!
제대로 은인안眼에 씌인 점소이가 청의 식사 아니 식사라기보다는 돼지처럼 음식을 입속에 밀어 넣어 처먹는 기예를 보며 그리 평가했다·
이래서 사람의 인정이 무서운 것이라 하겠다·
—-
피해를 정리한 서신을 훑은 흑점회주 장은채가 마구 머리를 헝클었다·
그래봐야 화가 풀릴 것도 아니고 제 머리나 엉망이 되고 말 터이니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는 행위이기도 했다·
그냥 그만큼 기분이 엉망이라 그럴 뿐이지만·
“광동 강서 복건 절강? 거의 양주 전체가 날아갔다고? 망한 진주언가의 무사들이 갑자기 나타나서 손님은 내쫓고 상인은 죽였다고?”
양주라고 하면 중원 동남부 지방을 통합하여 부르는 옛말이다· 혹은 강동이라고도 했다·
중원 서북부 지방 역시 양주라 부르기에 헷갈릴 수 있어서 이름이 두 개였다·
참고로 서북부의 양주는 서량이라고도 한다·
“도시마다 흑점 지부도 박살이 났습니다·”
“나도 알아! 이미 들었잖아!”
“이제 어떡합니까? 이제라도 수배를 취소하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지금 장난해? 이제와서 꼬리를 말면 흑점을 다들 얼마나 우습게 알겠어? 그래 시발 이렇게 나오셨다 이거지? 현상금을 이만 관으로 올리고 생사불문 상관 없이···”
-회주님 저 연가입니다·
그때에 마침 말을 끊는 부하놈이 있었다·
“뭐야 들어와·”
“회주님 이걸·”
부하가 공손히 다가와 두루마리 서신을 책상 위에 두고 물러났다·
“이게 뭐야?”
“그게 복건 땅에서 회주님 앞으로 상자가 하나 전달이 되었는데···”
흑점회주에게 서신이나 물품을 보내는 방법은 간단했다·
아무 흑점 지부 장물아비나 잡육점 고리대금업자 등등 관련자들에게 흑점주 귀하라고 바치면 알아서 척 전달이 되는 것이다·
물론 서신이든 상자든 부하들이 미리 열어서 확인 후에 전달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복건 땅에서 온 상자 역시 혹여 위험한 것이 들지는 않았나 부하들이 열어보았다·
아주아주 끔찍한 물건이 들어있었다·
개의 몸통에 사람의 머리를 꿰어놓고 입에는 서신을 물려놓았다·
머리의 주인은 복건성 흑점 지부장이었다·
“윽···”
듣기만 해도 소름이 듣는 끔찍한 소리였다·
실제로 상자를 열었던 부하는 곧장 실신하여 지금도 계속 악몽에 잠을 설친다고·
장은채가 둘둘 말린 서신을 펼쳤다·
「친애하는 흑점회주님께·
회주님이 아끼는 개를 상하게 하고 말았기에 사죄의 뜻으로 기르던 암캐의 몸통을 붙여다 돌려드립니다·
참고로 제가 기르던 암캐의 이름은 장은채라 하니 장은채의 못생긴 대가리가 하나 생기고 말았네요·
이걸 어쩌죠? 삶아 먹어야 할까요?
농담이랍니다· 주인 없는 떠돌이 개예요·
수배서의 용모파기를 보아하니 찾는 사람이 제가 아닌 것 같아서 이리 편지를 드립니다·
다음 장에 제 초상화를 첨부하였습니다·
초상화의 신뢰도에 관해서는 무림맹 소속의 감찰부 무사들에게 확인하면 될 것입니다·
아니면 이전 언가의 장원 근처에서 살던 주민들에게 확인해도 좋겠지요·
부디 제대로 된 일처리 후에 조처해 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추신: 무고한 여인에게 현상금을 일만 관이나 거셨으니 이 정도 피해는 달게 받으시겠지요?
-아직 망하지 않은 진주언가의 가주 언연영 배상」
그리고 뒷장에는 잘 그려진 한 폭의 미인도 위에 키는 다섯 척 네 치 일 문이라고 써 놓았다·
“이런 개 같은!”
장은채가 서신을 와락 구겨 집어던졌다·
동시에 소름이 쫙 돋았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지?
게다가 아직 망하지 않은 진주언가라니?
네 정체와 하는 소리마저도 다 알고 있다는 경고였다·
거기에 머리를 삶아 먹겠다는 문장까지도·
“수배 수배 취소해!”
“회주님?”
“빌어먹을! 언연영이 아니었어! 애초에 다른 년이 진주언가 팔아서 사칭한 거였다고! 시발 그것도 모르고 괜히 벌집을 건드려서·”
잘못 건드려도 단단히 잘못 건드렸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서신이 ‘너는 이제 죽었으니 목 씻고 기다려라’ 하지 않았다·
즉 수배를 철회하면 봐주겠다는 뜻이다·
“어떤 년이야? 걸리기만 하면 이만 관이야· 어떻게 찾지? 같이 있던 년놈도 사칭 아니야?”
“제갈이현과 당난아 말입니까? 그 둘은 이미 확실한 본인입니다· 애초에 널리 알려진 얼굴이라···”
“오대세가를 건드릴 수는 없고 거기에 한 년 더 있었잖아? 사람 붙였지? 걔는 지금 어디로 갔어?”
“그게 이후 일행과 함께 대별산에 들렀다가 찾던 노비를 빼앗아 주마점으로 돌아갔습니다· 이후 오대세가 자제들과 헤어져 노비와 또 반 노인이라 하는 철장과 함께 호북성 자귀현의 설가상회에 짐을 풀었습니다·”
“설가상회? 뭐 하는 데야?”
“설가놈이 차린 상회로-”
“지금 장난해? 설가상회니까 설가 놈이 차렸겠지! 어떤 놈을 붙였길래 주인새끼 이름 하나 알아내지 못해서 대충 설가 놈이래?”
“···조치하겠습니다· 어쨌든 이것저것 취급하는 상회입니다만 규모는 도시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억울한 피해자가 한 명 생길 예정이었다·
“구멍가게네· 거기 짐 풀었으면 알 만 하네·”
“다만 이후 신녀문에 들렀다 나왔으니 혹시 신녀문과 인연이 있는 여인일지도 모릅니다·”
“무슨 신녀문이야! 무슨 다 끼리끼리 몰려다니는 썅 당연히 끼리끼리 몰려다니겠지· 정파 놈들 하는 꼬라지가·”
장은채가 책상을 요란하게 두드렸다·
“어찌하시겠습니까?”
“여기서 물러나면 진짜 천하의 웃음거리야· 이 바닥에서 우습게 보이면 끝장인 거 몰라? 수배는 일시 철회한다고 하고 그년 정체부터 알아낸 후에 현상금 두 배로 다시 건다· 설가상회? 황금 얼마든지 써도 좋으니까 매수를 하건 사람을 보내건 가서 그 동료라고 하는 년 내 앞으로 끌고 와·”
설가상회? 자귀현?
들어본 적도 없는 촌동네에 초가집이나 차린 상회인 모양인데 흑점이 나서면 그딴 하찮은 구멍가게가 감히 거스르기라도 하겠는가·
장은채의 눈빛이 분노로 활활 타올랐다·
—-
청이 수배서를 보고 나서는 마음을 놓았다·
그래서 술도 양껏 퍼먹고 공짜 밥은 그보다 더 많이 처먹고 오랜만에 배가 가득 차니 누가 보면 아기가 몇 개월이냐 물을 상태였다·
마치 청의 고향 대체 왜 존재하는지 모르는 음식 싸움의 대식가와 같은 꼴이었다·
청이 좋아하는 일 중 하나는 배가 터지도록 처먹고 곧장 눕는 것이다·
환골탈태한 고수는 그래도 된다·
식도가 튼튼하니 처맞거나 독이 아니면 역류하는 일이 없어 겨우 먹고 잔다고 해서 속이 쓰릴 일이 없는 것이다·
청이 환골탈태 이후 가장 좋은 점을 꼽으라면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장점 중 하나였다·
그 외엔 달거리가 두렵지 않다 가슴에 땀이 차지 않는다 해서 삼대천왕이었다·
먹어도 군살이 안 붙는 건 환골탈태 이전에도 그랬으니 그냥 체질인 모양·
어쨌거나 모처럼 음식이 턱까지 차올랐다·
대협의 풍모에 감탄한 점소이가 ‘질 수 없음’을 시전하며 무한으로 즐기시게 계속해서 식탁을 채웠으니 청이 이젠 한계라며 패배를 선언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덕분에 그만 좀 밀어넣으라고 한계까지 늘어난 위장이 아우성성을 치니 그 감각을 즐기며 누우면 딱이었다·
그래서 청이 그렇게 했다·
청의 이런 추태를 막을 사람은 세상에 단 한 사람 서문수린 사랑하는 사부님뿐이다·
달리 말하자면· 신녀문을 나서서는 굳이 거지 행세하는 지금이 아니더라도 딱히 먹기만 하면 드러눕는 이 딱한 축생을 말릴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환골탈태 이전에도 속 쓰리니까 왼쪽으로 누웠던 청이었다·
그렇게 거적 깔고 부하니 두툼하게 따뜻한 솜옷 입고 누우니 그야말로 극락이 따로 없다·
이내 비단 같은 꿈결이 찾아왔다·
얼마나 지났을까·
“누나 거지 누나·”
“뭐야····”
“저 왔어요· 모용준이요·”
“왔냐··· 왔으면 가라···”
청이 잠에 취해 손을 내저었다·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래 거기 꼼짝 말고 기다리고 있어···”
청이 날아가려는 꿈결을 다시 잡아챘다·
잠을 자는 것도 좋지만 잠에 취해 전신에는 나른하게 힘이 빠지고 몸은 뜨뜻하니 체온이 오른 이 상태도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차피 낮잠이라서 시간이 지나니 자연스레 정신이 맑아지는 것이었다·
낮에 자고 밤에 수련하는 생활이었으니 한밤 중이라도 지금이 낮잠이 맞았다·
서문수린이 알면 그래도 규칙적으로 수련을 한다고 대견해야 할지 제자년 버르장머리가 나날이 한심한 꼴이 되나 한탄해야 할지 헷갈릴 것이다·
몸을 일으킨 청이 면사 안쪽에 손을 집어넣어 눈을 비비며 물었다·
“음· 모용가 꼬맹이 얼마나 지났니?”
“어· 잠깐만요· 달이···”
청도 반쯤 깬 상태로 움직이지 않는 인기척이 곁에 있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잔꿈이 달고 금방 정신이 드는 상태를 알아서 그냥 좀 기다리라고 하고 놔뒀다·
모용준이 달을 보며 손가락을 들어 꿈지럭거리며 위치를 재는 듯 하더니 이내 씩씩하게 대답했다·
“한 시진쯤 전에 왔어요!”
“어?”
한 시진이면 두 시간이다·
미안해진 청이 괜히 죄 없는 꼬맹이 탓을 했다·
“아니 미련하게 왜 한 시진이나 기다리고 있니·”
“꼼짝 말고 기다리라고 하셔서····”
그래서 요령도 없이 오도카니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모양·
“아니 잠깐 누워있으려고 했는데 좀 편하게라도 있지·”
청이 뒷통수를 긁적거렸다·
밍기적밍기적 좀 누워있었을 뿐인데· 무슨 시간이 벌써·
즐거운 시간은 빨리 간다고 해서 상대성 이론이라 하더니만 이렇게 빨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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