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83
갑자기 별실 안이 숙연해졌다·
그렇게 잠시간 침묵 속에 청이 고개를 갸웃거리다 저마다 한 마디씩 내놓는 것이었다·
“공손요예 그 여자가 무례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공손공가는 정도를 지키는 이들이니 상하게 할 정도는 아니지 않았나·”
“맞습니다· 누님 죽이거나 불구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잠룡비무회가 있으니 아 잠룡비무회에서는 살초가 금지인 건 아시지요?”
“응· 응· 티 안 나는 독으로 몇 개 챙겨줄 테니까 몰래 해 몰래· 뭐야? 왜?”
청이 눈을 가늘게 떴다·
“뭐야 사람을 뭘로 보고· 해코지하려고 묻는 거 아니거든? 그냥 머리 장식 돌려주려고 하는 것 뿐인데·”
“굳이 그럴 이유가 있나? 본인이 제 것 아니라고 부정했으니 굳이 돌려준다고 딱히 감사를 받을 것도 아닐 텐데·”
그에 청이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 아까 제갈이가 여인 속옷 이야기했잖아·”
“누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이상한 사람이 되지 않습니까? 여인 속옷 이야기라니요·”
“뭐야 그래서 내가 거짓말이라도 했다는 거야? 분명히 여인 속옷을 몰래 벗겼는데 몰랐다고 그랬잖아·”
“이것이 바로 부분을 편집하여 사실로써 진실을 호도하는 수법···· 주어를 떼니 제가 한 일처럼 들리는군요· 과연 누님 무시무시하십니다·”
“그걸 아는데 요즘 한 번씩 까분단 말야· 어쨌든 그래서 제갈이가 이야기해준 게 훔친 속옷 돌려줬다가 뺨을 맞았다며?”
“기왕이면 주어를 ‘신투가’를 붙여 주시겠습니까?”
“그거나 그거나지 뭐· 생각해보니 보통 여인들이 그런 일을 당하면 눈치 못 채는 일이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럼 뺨을 때리기보단 모른 척을 하겠지? 그거 내 속옷이 아닌데요 하고·”
왜냐하면 거기서 화를 내면 그 속옷이 제 것이라고 확인을 해 주는 꼴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 순간 여인은 평범한 여인이 아니다·
속옷 안 입은 여인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청이 생각하기에는 편안함의 도를 깨달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 해방감과 남들 앞에 까발려지는 상황은 또 별개였다·
“그래서 뭐· 내가 경솔했다 싶어서·”
“하지만 머리 장식이잖아? 여인이 머리 장식 가진 게 뭐 문제라고 유난을 떨어서 청아가 이틀이나 갇혀 쫄쫄 굶은 거 아냐·”
“그건 내가 판단할 게 아니잖아· 만약에 산이 품에서 춘약이 나온다고 치자···”
산이 같은 꼴을 당했는데 도둑맞은 물건이 음약 춘약이었다?
그럼 따라다니는 여인들이 ‘와 나도 춘약 마실 줄 아는데· 내가 다 마셔버리고 싶다·’ 하면서 입맛을 다실 것이다·
당난아 품에서 나온다면 다들 그냥 당가니까 당연하지 할 테고·
하지만 제갈이 품속에서 춘약이 나오면?
그냥 근육 변태 운동남인 것이다·
맹수의 몸 현자의 뇌 그리고 짐승의 마음을 가진 놈이라고 손가락질이나 하겠지·
“누님? 왜 이 우제만····”
“됐고· 사람마다 처지가 다르니까 산이는 목소리 잔뜩 깔고 눈썹 위아래로 흔들면서 내 거 아니라고 부정할 거 아냐· 수치스러운 건 당사자니까 내가 함부로 막 판단하면 안 되지·”
머리 장식 말고 길쭉한 남근 모형 같은 거였으면 청도 굳이 사람들 앞에 내보이며 당신이 도둑맞은 것이 금좆 은좆 나무좆 중 어떤 것입니까 이 새끼가 훔쳤는데 여기 시장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딱 골라서 가져가세요 하고 묻지는 않았을 터다·
하지만 공손요예에게는 머리 장식이 좆과 비슷한 수준의 수치였을 수도 있었다·
의도가 선량했다는 말은 변명이 안 된다·
마찬가지로 몰랐다는 말도 그랬다·
어쨌거나 공손요예 그 소저가 화를 버럭 내가면서까지 부정하고 떠나버렸으니까·
그러면서도 장식 보는 눈빛이 제법 불안했으니 사연이 있는 물건일 수도 있고·
“그러니까 돌려주는 게 맞지 암·”
“와 청아야 진짜 마음씨 와 어떻게· 너 진짜 옷 한번 보자 바느질 자국 있나 보게·”
천의무봉이라 하늘의 옷에는 바느질이 없다는 뜻으로 선녀의 의복 혹은 그에 준하는 솜씨라는 뜻이다·
당난아가 그리 말하며 청을 와락 끌어안으니 참으로 감동한 목소리를 감추지 않는 것이다·
“진짜 청아는 너무 착해· 마음씨도 곱고 얼굴도 곱고·”
대놓고 퍼붓는 칭찬에 청이 곤란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난아야· 손 위치가 좀 이상하지 않니? 보통 껴안으면 손아귀에는 힘을 안 주지 않나?”
“아닌데? 옆에서 껴안았으니까 되게 자연스러운 팔 모양인데? 사천에서는 이렇게 하는데? 하나도 안 이상한데?”
“이게 틈만 나면·”
청이 당난아를 떼어냈다·
나름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를 쓰나 힘으로 어찌 청과 대적하겠는가·
“그래서 공손 소저는 어디 있어?”
“맹의 객청에 머무르고 있지·”
그때 제갈이현이 툭 끼어들었다·
“누님 혹시 몰라 말씀드리는데 공손이 아니라 공 소저입니다·”
“오잉? 그럼 이름이 손요예야?”
“그렇습니다· 다만 공손 소저라고 부르는 편이 더 좋기는 합니다· 공손 소저도 그걸 원할 겁니다·”
“그건 또 뭔데?”
그렇게 제갈이현이 크게 숨을 들이켰다·
창대한 설명이 시작되고 마는 것이다·
—-
청의 성격 중 가장 큰 단점은 부주의하고 충동적인 결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큰 장점은 한번 마음을 먹으면 망설이지 않고 움직이는 뛰어난 실행력이다·
그리고 그 장단점을 한데로 묶으면?
좋은 점은 다 사라져버리고 오로지 단점만 두 배로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보통 한 번에 끝내고 말 일을 두 번 세 번 네 번 멍청하게 반복하는 사람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음· 어떻게 산도 같이 갈래? 모처럼 얼굴 가렸는데· 가면 들키는 거 아냐?”
“흠· 음· 흐음·”
팽대산이 답지 않게 퍽 고심했다·
아닌 게 아니라 얼굴 가리고 다닌 며칠이 아주 신세계였으니 중원 사람들이 이렇게 편히 사는데 저 혼자만 불편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정도였다·
그러니 며칠 더 즐겨야겠군·
팽대산이 결론을 내렸다·
“같이 가지· 용봉지회 모임에 아는 사람도 없지 않나?”
팽대산이 내심 당황했다·
따로 있으려고 했는데 저도 모르게 대답이 튀어나온 까닭이었다·
“겨우 하루 이틀이 아니라 그간 꽤 홀가분해 보였는데· 제갈이랑 난아도 있으니까 무리하지 않아도 괜찮아·”
“됐다· 누구 말대로 친구도 없는 놈이니 이참에 사귀어 보도록 하지· 그나마 있는 하나가 미덥지 못해 물가에 놀러간 아이를 돌보는 기분이니·”
팽대산이 말하며 납득했다·
그렇다· 저걸 무방비로 용봉지회에 내어놓으면 도대체 무슨 사고를 칠지 모르니까·
정파 무림의 평화를 위해서 어쩔 수 없는 결정인 것이다·
그렇게 청이 어쨌거나 뛰어난 실행력으로 곧바로 몰아쳐 무림맹으로 향했다·
공손요예가 거기에 있기 때문에·
산악인이 산을 타는 이유와 같이 단순한 이치였다·
다만 시간이 미시말 신시초 오후 세 시쯤 되니 올바른 중원인이라면 보통 이 시간에 숙소에 머물고 있지 않았다·
그리하여 전해듣기를 용봉지회 모임으로 창량루에 가 계시다고·
창량루는 하필 청이 잡은 객잔을 기준으로 무림맹과 정반대 방향이었다·
두 번 일하는 셈이었다·
그리하여 개봉 창량루에 도착하고 나니 온통 사내들로 가득 찬 고추밭이었다·
청이 생각했던 예닐곱 명 모여서 수다나 떠는 그런 그림이 아니었다·
마치 총동문회 선배 후배 현역들 다 모여라로 한 층을 통째로 쓰며 와글와글 시끄러운 술판이었던 것이다·
정파의 후기지수들이 큰 행사를 앞두고 거진 전부 몰려들었는데 그 인파가 당연히 많을 수밖에는·
“이런· 청룡회 모임이로군요· 봉황회는 또 다른 장소에서 여는 모양입니다·”
용봉지회는 청룡과 봉황의 회합이라는 뜻이었으니 청룡은 사내들이요 봉황은 여인들을 뜻했다·
“괜히 왔군· 아직 얼굴 안 깠으니 여기서 물러나도록 하지·”
팽대산이 그 모습에 마음이 바뀌었다며 슬그머니 빠져나갔다·
제갈이현이 봉황회 모임 위치를 물어보겠다며 슥 들어가버리고 나니 청과 당난아만 자리에 서서 미인을 발견한 사내들의 뜨거운 시선을 몽땅 받아냈다·
정확히는 당난아가 받아냈다·
청은 면사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아는 얼굴을 발견한 청이 소리쳤다·
“앗 검우!”
“아니 이 목소리 검우! 검우인가!”
남궁신재가 벌떡 일어나 청을 반겼다·
목소리 듣고 알아들었다는 듯이 말하긴 했지만 그냥 세상에 남궁신재를 검우라고 부르는 이가 단 한 명이었을 뿐이다·
“아니 검우· 그런데 면사는 또 무언가? 혹시 얼굴에 흉터라도 졌는가? 그렇다고 너무 상심하지는 말게 얼굴의 흉터라면 끝까지 적을 노려보았다는 뜻이니 검객이라면 영광스러운 훈장이라고 할 수 있지 않나·”
“음! 검우! 진짜 얼굴에 흉터 있는 여인에게 그딴 소리 하면 그 좋아하는 검으로 찔리는 수가 있겠는걸! 하지만 검객이라면 역시 최후에는 검집이 되어 검날을 품어야 하는 법이지· 도집 창집 말고·”
“과연! 검이 아닌 다른 병장기가 이 목숨을 앗아가서는 안 되는 일이 아닌가· 믿겠다 그대는 검우가 확실하군· 이 명징하게 직조해낸 귀한 발언은 검우만이 할 수 있는 금과옥조 천하의 명문일지니·”
“그래· 잘 지냈어?”
“나라고 별일이 있었겠나? 검우는?”
“최근에 가슴이 반토막이 나긴 했지 여기서 여기까지 그리고 여기서 여기까지 해서 열 십十자로 검상이 났었는데·”
“오오! 멋지군! 보여달라고 할 수 없는 것이 천추의 한이구나·”
상식적인지 상식적이지 않은지 알 수 없는 반반 섞인 대답이었다·
멋지긴 해도 부위가 부위라서 보여달라고는 하지 않겠다고·
“역시 알아줄 줄 알았다니까· 아쉽게도 여기 난아가 잘 치료해 줘서 흉은 안 남았어·”
“아아· 당 소저로군요·”
“해어독화!” “해어독화!” “해어독화!”
유일한 홍일점에 집중하던 사내들이 무슨 약속이라도 한 듯이 동시에 별호를 외쳤다·
미리 입을 맞춰 연습이라도 한 듯한 칼 같은 합창이었다·
청이 면사 너머 눈살만 찌푸렸다·
도대체 뭔데?
저 감탄은 심지어 해야 하는 때까지 하나 둘 셋 지금이다 하고 엄격하게 정해져 있기라도 하나?
남궁신재가 인사를 이어나갔다·
“우리 지난 고희연 때 인사를 음 사실 소저가 옥기린 옆에만 붙어있는 통에 인사는 안 했소만· 뭐라고 했더라 지아비가 자리했으니까 지어미가 외갓남자랑 말을 섞을 수 없다고 했잖소?”
“으아아! 사람 잘못 보셨거든요? 그런 말 한 적 없어욧! 아직 시집도 안 간 처녀에게 할 말이 있고 못할 말이 있지!”
당난아가 시뻘건 얼굴로 시치미를 뗐다·
음· 제갈이한테 부탁 좀 해봐야겠다·
태상가주님 즉 독 할아버지의 고희연 때 당난아 어록 모음집좀 만들어 달라고·
까도까도 재미있는 게 나오는걸·
그리고 나선 청과 남궁신재가 칼을 풀어 검집끼리 툭 부딪쳤다·
본래 검객끼리 검이 부딪치면 별 느낌도 없는 주제에 어깨보다 일백 배는 더한 모욕으로 여기니 검으로 엮인 진정한 우정을 드러내는 인사법이었다·
“그래서 검우 여기는 무슨 일인가?”
“아· 봉황회 모임은 어디인 줄 알아?”
“아· 그렇군· 자리가 협소해 분리하고 말았지· 봉황회는 량운다루에서 한참 열리고 있을 걸세·”
“량운다루· 음· 한 마디면 듣는 걸 제갈이 이놈은 왜·”
그러다 청의 시야에 신이 나서 떠벌떠벌 입을 쉬지 않는 제갈이현의 모습이 보였다·
그야 그렇겠지·
청이 곧장 납득했다·
어차피 여인들 모임에 제갈이 데리고 갈 것도 아니니 그냥 이참에 제대로 떠들게 놔두면 될 것이다·
청과 당난아가 또 허탕을 치고 이번에는 량운다루로 향했다·
미리 하인을 보내 알아보거나 했으면 한 방에 갈 길을 벌써 세 번째 이동하는 중이었다·
“청아야 봉황회는 전쟁이야· 저네들끼리 술 마시며 다 같이 친구로 속 좋은 청룡회랑은 다르다구· 불여시들이 얼마나 견제를 걸고 비꼬고 은밀하게 괴롭히는지· 청아는 여인들의 사회를 모르겠지만 너무 끔찍하고 비정한 곳이란 말야·”
사실상 무림 초출의 당난아가 여인 문파 신녀문의 큰어르신 청에게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환희궁 돌아가는 꼴을 본 청이라 또 혹시 설마 하는 기분은 있었다·
당난아가 하는 말이라 전혀 믿음은 안 가지만·
“그러니까 청아는 나만 믿어· 내가 바로 무림오화 서열 일 위 해어독화 당난아 님이시란 말이야· 내 옆에만 찰싹 붙어있구·”
“음· 너가 그렇다면야·”
물론 청의 키가 크기에 누가 봐도 당난아가 달라붙은 모양새기는 했다·
실제로도 당난아가 달라붙기도 했고·
그리하여 청이 다루 안으로 들어갔다·
당난아의 표현으로는 창칼 없이 체면을 노려 뭉개는 잔혹한 전쟁터 봉황회의 여우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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