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91
짜악! 목검 부딪치는 소리가 날카롭더니 이내 반절이 분리되어 빙글빙글 돌며 하늘을 날았다·
남궁신재가 반만 남은 목검을 황망하게 바라보다 한쪽으로 휙 던졌다·
목단검이 다섯 자루째였다·
청이 머쓱한 기분에 머리를 긁적거렸다·
“목검이 좀 약한가?”
“흑단목으로 깎은 목검이네만 흠· 이거 이래서야 곤란하겠군· 검우 힘에 의존해선 검력이 늘지 않는 법이라오·”
“힘이 센 걸 어떡해? 대련용 철검이라도 뽑아야 하나?”
“일부러 목검을 쓰는 것이라네· 사람의 힘이 약하기에 도구를 쓴 것이 아니겠소? 물론 생사결이라면 당장에 내가 패배했을 것이나 그저 승부를 가리기 위한 대련이 아니니·”
남궁신재는 이를테면 검 대련의 여포라고 할 수 있었다·
손재간 발재간 다 떼고 순수하게 검만을 쓰는 대련에서는 대적할 이가 없으니 검에 대한 이해가 월등하기 때문이었다·
검왕의 평가로 손발을 좀 쓰는 유연함만 갖춘다면 당장에 초절정에 이를 것이라고·
무공은 몸을 쓰는 기예지 검만을 다루는 검술은 개중에 작은 일부분에 불과했다·
아들이라고 올려 치는 것이 아니라 천하십대고수 중 검왕으로서 하는 아주 냉정한 평가였다·
하지만 미련하게도 검 하나만 붙들고는 낑낑거리니 검왕의 주름살이 점점 늘어만 가는 원흉이기도 했다·
“그나저나 공손 소저께서도 참으로 검력이 날카로우시군· 헌원제검이라 하셨습니까? 과연 황제의 검이라 할 만한 기예입니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저도 공자님의 검을 맞이해 많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역시 천하제일검가의 명성에 걸맞은 훌륭한 검력···· 그런데 검력이라는 말이 원래 있는 말이었습니까?”
“원래부터 있던 말이 무슨 의미겠습니까? 검객이라면 능히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니 바로 검어 검객의 언어인 것이지요·”
청이 낄낄거리며 농을 던졌다·
“왜 아예 밥 먹으면 검반· 쉬면 검휴에 자면 검면이라고 하지 왜·”
“음? 검을 먹지 않으니 검반은 아니고 검이 자지 않으니 검면은 좀 무리가 있겠소만· 흠· 검휴라· 대련 중에 쉬면 검휴라고 해도 되겠어· 검우 혹시 더 있나?”
“음· 초려는 반검이랑 혼인하셨다고 반검려· 그러니까 도려라고 하시던데?”
“검려! 크윽 이제와서 검려를 쓰면 표절 같지 않은가· 분하지만 팽 누님의 승리를 인정해 드려야겠군! 그리고 세가를 이어받을 몸으로서 의무를 저버릴 수도 없지·”
“뭐야 혼인할 생각은 있는 거였어?”
“사실은 없네· 평생 검에 바쳤으면 하는 마음이다만 남궁의 장자로서 가문의 적통을 이어야하니· 일단 화경 정도만 적당히 이루고 난 후에 구혼을 다닐 생각일세·”
“지금 여기 절정 후기가 한 명 그리고 절정 초월이 한 명 있거든?”
“하하 검생은 길고 깨달음은 금방이네· 지금 순간의 성취에 매몰되어서야 조급함만 치밀 뿐이라오·”
정작 검에 매몰된 녀석이 하는 소리라서 전혀 설득력이 없기는 했다·
그래도 성취에 전혀 부담이 없다는 사실 하나만은 잘 알겠으니 도대체 저 자신감과 여유는 어디서 기인하는 것인가 대단하기도 하고·
공손요예는 무려 절정 후기의 고수였다!
그야 다섯 살에 검을 잡아 밥 먹고 검만 휘둘렀다고 하니·
열심히 수련했다는 관용구가 아니었다·
진짜로 다섯 살에 검을 잡은 이후로 담장 바깥으로 단 한 발짝도 나간 적이 없다고·
하루 일과가 아침 수련 조식 이후 수련 중식 이후 수련 석식 이후 수련 그리고 두 시진 자고 일어나 무한 반복이었다·
듣는 청이 다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본래는 초절정을 이루고 협객행에 나서 가문의 이름을 드높일 계획이었어요· 다만 마침 십대세가의 한 자리가 비었다고 해서 덕분에 이렇게 청과 만나기도 했잖아요?”
“뭔가 좀 뭔가뭔가네·”
청이 면사 너머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성씨의 복원이니 가문의 숙원이니 하기로서니 한 사람의 가장 즐거워야 할 시간을 전부 앗아가서야 될 말이던가·
공손요예의 말에 힘들었다는 투정이 단 한 조각이라도 섞였다면 청도 공감 오백 배로 정말 너무하다며 맞장구를 쳤을 것이다·
하지만 본인조차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이 어릴 적부터 단단히 뇌리에 새긴 것이다·
음 이거 완전 아동 학대 아니 예는 다 커서 이젠 어엿한 처자지만 그래도·
심지어 남궁신재조차 질린 기색이었다·
남궁신재는 검에 홀려 수련 자체가 직업 겸 특기 겸 취미로 그저 즐거울 뿐 어떤 의무를 지고 매진하는 것이 아니었다·
천성이 여유롭고 자유로워 수련 외에도 열심히 뽈뽈거리며 놀러다니는 한량이었던 것이다·
진짜 검치는 따로 있었으니 양보해 드려야겠군 하면서·
—-
모용주희는 마음이 깨어졌다· 아니 용봉지회 칠 층에서 진즉에 깨어진 상태였다·
“으아아아! 으아아아아아! 으아아아아아 으아아아아아 으아아아아아아! 끄읍 으아아아아 아아아아····”
이는 울음소리가 아니라 분한 마음으로 내지르는 절규였다·
술 먹고 세상에 화가 난 술꾼들이 주사로 지르는 바로 그 괴성이었다·
세상에 단순히 슬픔만으로 저렇게 고래고래 한 글자로만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나마 베개에 얼굴을 묻었으니 밖으로 새는 소리는 적었다·
그러나 밤 말은 쥐가 듣고 낮 말은 새가 들으며 모용가의 소리는 모용준이 듣는다·
제 누나의 울음소리를 들은 모용준이 발칵 객실의 문을 열어 달려들었다·
“누나! 왜 그래? 괜찮아! 왜 울어!?”
울고 싶은 때 걱정 가득한 낯빛으로 달려온 동생을 보니 눈물이 핑 아니 빵!
모용주희의 울음이 왈칵 쏟아졌다·
“주 준아야! 끄흑 끄어어어···”
한때 모진 말로 가슴에 대못을 박은 동생이었지만 악의가 없음을 알고 또 모용준도 가슴이 없기 때문에 용서한 모용주희였다·
그야 사내아이니까 당연히 가슴이 없을 테지만 간혹 가슴 가진 사내조차 용서하지 않으니 천하의 검화 모용주희의 악랄함이 후기지수 사이에 널리 퍼진 이유였다·
“왜 그래! 누가 괴롭혔어!? 누가 우리 누날 괴롭혀!”
“으흑 준아야아··· 그 나쁜 년이 끄흑 나한테 흐윽···!”
모용주희가 꼽는 모용준의 장점 중 하나는 딱 끌어안기 좋은 크기라는 것이었으니· 못난 누나가 동생 끌어안고 꺼이꺼이 통곡했다·
그에 모용준이 그 고사리 같은 손으로 제 누이의 등을 살살 쓰다듬었다·
“누가 누나 괴롭혔지? 누구야! 내가 혼내줄게· 응? 누나 울지 마아·”
“흡 그래· 우리 준아 역시 준아밖에 흡 없구나· 착한 내 동생···”
“괜찮아졌어? 왜 그러는데? 진짜로 누가 누나 괴롭힌 거 아냐? 나한테 다 말해· 내가 막막 혼내줄 거야·”
모용주희의 얼굴에 다시 분기가 서렸다·
“그래 그년 아니 그 여자· 있잖니 준아야· 이 누나가 오늘 무슨 수모를 당했는지 아니? 아 수모가 무슨 뜻인지 알아?”
“음· 모르겠어·”
“엄청나게 슬프고 화나고 창피한데 억울하기까지 한 걸 전부 합치면 수모라고 해· 그리고 오늘 내가 그 여자한테 당한 게 바로 그 수모란다· 그 나쁜 년·”
“나쁜 말 안 되는데···”
“나쁜 년한테는 나쁜 말 해도 돼· 그리고 원래 여인을 위로해 줄 때는 무조건 편을 들어줘야 하는 거야· 그러니까 누나를 위로해 주려거든 준아도 빨리 따라 해· 나쁜 년 죽일 년·”
“나 나쁜 년· 죽일 년·”
의외로 누나로서 마땅히 동생에게 해 줘야 하는 충실한 조언이었다·
여인을 위로할 때는 무조건 설령 여인이 천하의 악종 무림공적이라 해도 편을 들어주는 것이 마땅히 친한 사내의 도리이다·
여기서 눈치 없이 너도 잘못이 있어 따위의 말을 꺼내는 사내는 보통 평생 독신으로 살게 될 것이다·
다만 공감하며 편을 들고 옹호해주는 선에서 그쳐야지 여인이 하는 말을 믿어서는 절대 안 된다·
이럴 때 여인이 하는 말이란 열 중 아홉이 제 유리한 대로만 지껄이는 날조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었다·
가끔 열 중 하나 나도 잘못이 있기는 한데 따위의 접두사가 붙으면 아 이 여자가 진짜 처맞을 짓을 하고 처맞고 와서 나한테 하소연을 하는구나 하고 이해한 후에 편을 들어주면 될 것이다·
“그래 맞아 나쁜 년·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가 있어· 준아야 있지 오늘 누나가 용봉지회에 놀러갔는데 말야 어떤 미친 여자가 갑자기 나보고 막 나쁜 말을 퍼붓는 거야·”
“갑자기? 아무것도 안 했는데?”
“그래· 누나는 그냥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인사를 했을 뿐인데 갑자기 나보고 막 욕을 퍼붓는 거야· 그리고 나보고 가슴이 없는 년이 왜 여인인 척을 하느냐고 사내도 여인도 아닌 괴물 같은 게 꺼지라면서 막 때리고 물 붓고··· 끄윽 우으으·”
청이 있었다면 모용주희의 선업이 일 점 떨어지는 순간을 목격했을 것이다·
하지만 모용준은 못 본다·
“울지마 응? 내가 내가 복수해 줄게·”
“아냐· 준아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왜 상관이 없어? 누나 일이 내 일인데· 나한테 맡겨· 아주 못되게 수모? 맞아? 응! 수모를 줄 거야·”
“누나는 준이가 그렇게 말해주기만 해도 기쁘네· 하지만 괜찮아· 누나 일은 누나가 해결해야 하니까· 와 우리 준아가 언제 이렇게 듬직해져서 누나를 다 위로해 주고· 응· 그래 오랜만에 같이 목욕이나 할까?”
가족 좋다는 게 다 이런 것이다·
어느새 울분이 좀 가신 모용주희가 예쁜 동생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나 나도 이젠 다 컸어·”
“어쭈 이게 아주 사내라고· 그럼 누나랑 같이 잘까?”
“어 그건 괜찮은 거야? 그런 건 혼인한 여인하고만 하는 거라고···”
“가족끼리는 괜찮아· 혼인한 여인도 가족이니까 괜찮은 거잖아?”
“응! 그럼 같이 자!”
“내 동생이지만 어쩜 이리 귀엽지·”
모용주희가 제 동생을 꼭 끌어안았다·
그래 아직 패배하지 않았으니까·
이판사판이다 내가 제대로 갚아줄 테야·
평판 좀 망치면 어때?
사랑하는 가족이 남아있다 이거야·
—-
팽대산은 벽 트인 자리에 앉아서 해 지는 거리를 구경하는 중이었다·
팽대산의 시야에는 늘상 여인들이 성벽을 치고 있었으니 제게 신경쓰지 않고 바삐 움직이는 거리란 영 생경하니 구경할 만한 재미가 있는 것이었다·
다들 이런 것을 보고 살았나 하고·
그러다 저쪽에 면사 쓴 여인이 한 명·
사내 같은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대로의 정중앙을 척척 걸어오는 여인이었다·
그러다 문득 고개가 이쪽을 향하는 것 같더니만 손을 번쩍 들고 크게 흔들며 반가움을 표시하는 것이다·
팽대산의 입매가 저도 모르게 늘어졌다·
여인이 보았다면 졸도할 정도로 근사한 미소였다·
“흠 재미있게 놀다 왔나·”
“그럼· 맛난 거 먹고 맛난 거 먹고 또· 음· 맛있었지· 산은 안 가? 맛있는데·”
“나는 모르겠군· 의미 없이 떠들어봐야· 용봉지회라고 해 봐야 결국 얼굴 아는 놈들끼리 뭉치는데·”
“흥· 딱 친구 없는 사람이 할 소리네·”
청이 킬킬대며 자리에 앉았다·
“사실 나도 잘 모르겠네· 다들 서로 금칠해주기 바빠가지고는 딱히 재미있는 이야길 하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사부님이 하신 말씀도 있어서 내숭도 떨어야 하다 보니까 영 불편해 죽겠어·”
“내숭인가·”
“내숭이지? 맞나? 변장? 변신?”
“변신에 가깝긴 하군· 한데 재미가 없었다고 하는 것 치고는 늦게까지 있지 않았나?”
“검우랑 예랑 온통 대련이나 하다 왔지 뭐야· 오랜만에 대련을 했더니 이야 보람차네· 난아는 당가가 도착했다고 해서 도중에 가족들 보러 갔고·”
“흐음·”
“아· 맞다· 금양검화를 봤거든? 그런데 팽가가 모용가랑 같이 온다고 안 했었나? 그럼 팽가도 도착한 거 아냐?”
“어젯밤에 도착했다더군· 나도 슬슬 객채로 갈 생각이라· 여기 객실은 넉넉하게 잡아 두었으니 편한 대로 써라·”
“뭐야 나도 초려 보러 가면 안 돼?”
그러자 팽대산이 고개를 저었다·
“생각해보니 당난아 그 여자 말이 그리 틀리지는 않더군· 게다가 신녀문을 대표해 왔다면 따로 객청을 받아야 할 테지· 내일 아침에 들를 테니 같이 맹주께 인사드리러 가지·”
“그런가?”
그리고는 팽대산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었다·
“벌써 가게?”
“있어봐야 뭐 하겠나· 아· 출출하면 주방에 네 이름으로 소롱포랑 교자를 맡겨 두었으니 찾아 먹도록·”
“오올· 산! 히야 고마워 잘 먹을게·”
“별거 아니다· 그럼 내일 보지·”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 버리는 것이 아닌가·
혼자 남은 청이 의자에 등을 기대 잠시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무엇인가 생각난 듯 벌떡 일어나 외쳤다·
“점소이! 서문청 이름으로 맡긴 요리 좀 내주세요!”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부모님의 기습 방문으로 조금 늦었습니다·
갈비찜은 최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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