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94
모용주희가 화해의 술을 청하기는 했지만 청이 아주 조금의 고민도 없이 단숨에 수락할 줄은 몰랐다·
당연히 거절당할 줄 알았다·
물론 거절당한다고 해서 ‘와 이걸 피하네· 그럼 어쩔 수 없지·’ 하고 단념해서야 그냥 바보 멍청이가 될 뿐이었다·
거절을 대비해 살살 꾀어 녹여낼 여러 수단을 준비해뒀으니 간밤에 여러가지 상황을 상정하여 계획을 짜둔 노력이 전부 허사였다·
뭐지? 내 연기가 너무 뛰어났나?
아니면 머리가 꽃밭에 있어서 정말로 화해를 청하는 줄 아는 건가?
그러나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나서는 모용주희가 그 원인을 깨달았다·
아 이년· 술에 환장하는 년이구나·
그래 술 좀 마신다 이거지?
술로 꺾을 자신이 있으니까 마다하지 않겠다?
하지만 모용주희 역시 인생의 첫 술자리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단 한번도 패배한 역사가 없는 술꾼이었다·
그런데도 모용주희는 결코 제 주량을 자만하지 않았으니 원한의 크기만큼 신중함을 기한 까닭이었다·
그 외에도 비장의 수단을 준비했으니 절대 질 수 없는 싸움이었다·
“서문 소저는 술을 즐기시나요?”
“그래요· 없어서 못 마신답니다·”
“아아· 그러면 모처럼 하남성에 오셨으니 하남 하면 떠오르는 술을 아시나요?”
“앗· 설마· 두강주?”
“아시는군요! 제가 화해의 의미로 특별한 술을 준비했으니 서협의 물로 빚은 서정두강주라고 한답니다·”
“서정두강주!”
청이 저도 모르게 외치고는 뒤이어 아주 큰 깨달음을 얻고 말았다·
아· 이래서 다들 별호 나오면 외치는 것이 그냥 신경 쓰지 않고 자동으로 발사되는 것이었구나·
모용주희가 척 손짓하자 여인 하나가 술병이며 잔 따위를 받쳐 들고 나타났다·
“자 술은 용봉지회가 아니라 제가 사는 것이랍니다· 첫 잔 받으시고· 자자자·”
독주의 술잔은 워낙에 작아 딱 숟가락 두 개 분량이고 그나마도 반절만 채우기에 한 숟갈이라고 해도 된다·
찰랑찰랑 달랑 한 숟갈의 백주였지만 그 청아한 향은 이미 온 사위를 가득 메워 화악 폭발하듯 피어올랐다·
“히야 향만 맡아도 좋네요· 모용 소저도 한 잔 받으시고·”
청이 모용주희에게 술을 따라주니 술잔으로 두강주를 받아 자리로 되돌아갔다·
워낙에 큰 식탁이라 마주 앉은 두 사람이 원형에서 가장 먼 거리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는 청이 공손요예에게 술을 따라주려다가 혹시나 해서 물었다·
“잠깐 예· 너 술 마셔본 적 있어?”
“없어요···· 하지만 마셔보고 싶어요·”
···친구랑 같이 하고 저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가 청의 민감한 귀에 선명했다·
또 안쓰러우려는 마음이 들어 청이 아이에게 숟가락으로 술 내미는 어른처럼 장난스럽게 웃으며 간단한 주도를 설명했다·
“그래? 원래 술자리의 첫 잔은 남기지 말고 단숨에 비워야 하거든? 그래서 건배야· 마른 술잔· 건 배· 그런데 이건 좀 독한데· 일단 이 정도만·”
청이 재주도 좋게 술병을 기울이더니 똑 똑 똑 똑 정확히 네 방울을 떨궈놓았다·
“이렇게 조금인가요?”
“그거라도 마셔보면 생각이 다를 걸? 자 우리 건배합시다· 우정을 위하여·”
청이 눈높이로 술잔을 들어 올린 후에 한 방에 쭈욱 들이켰다·
차가운 불이 넘어간다·
식도로 넘어간 술의 향기가 기도로 새어 코로 뿜어진다·
향기뿐이랴 숨에도 술기운이 섞인 것 같으니 명치 위 눈 아래로 모든 기관이 일시에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청이 저도 모르게 달뜬 한숨을 내뱉었다·
“하아아··· 이거지·”
“크헉 콜록! 콜록!”
아니나다를까 옆자리에서 격렬한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청이 공손요예의 등을 살살 쓸어주었다·
“예 괜찮아? 거봐 쉽지 않지?”
“속이··· 뜨거워요· 독 독인가요?”
“이렇게 향기로운 독이 있겠어? 향은 참 좋지?”
“음 향은 굉장히 좋아요· 속이 뜨거운 건 원래 이런 건가요? 하지만 너무 써요· 맛도 없는 것 같아요·”
“술이 맛없다고? 난 진짜 음료수보다 맛있는데·”
“에이 서문 소저도· 저 놀리시는 거죠?”
“예가 안 받는 체질이라 그래· 좋은 체질을 하고 나니깐 그냥 달달한 과실차 같다· 향이· 와 향이 진짜· 향이 보고 싶다·”
“···?”
청이 아무말이나 하며 공손요예의 잔을 채워주고는 후에 간단한 주도를 설명해 주었다·
“입술 딱 닫아서 가운데만 살짝 대었다가 젖은 입술만 살짝 훔치듯이 마시면 돼· 독한 술이니까 절대 입안에 흘려 넣지는 말고· 안 맞는다 싶으면 마시지 말고· 취해서 실수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청이 공손요예에게 그리 말하다가 찾아온 깨달음이 있었다·
아 모용주희 얘가 지금 나를 술로 보내려고 작정을 한 거구나?
하지만 술과 물이 구분되지 않는 경지에 있는 이 몸에게? 애송이 같으니라고·
아니나다를까 모용주희가 말했다·
“아 남아야· 매번 따라드리기에 거리가 있으니 서문 소저 잔이 비지 않도록 네가 특별히 신경 좀 써 드려· 알겠지?”
“응· 알겠어· 서문 소저 제가 따라드려도 서운하시진 않겠지요?”
특별히 신경 좀 써 드리란 말은 절대로 잔이 비는 꼴을 못 보겠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내 잔이 차 있는 꼴도 못 보겠지·
하지만 청에게 술이란 향과 화끈함을 즐기켜 아무리 퍼마시더라도 기분만 뭉근히 좋아지는 음료수에 불과했다·
청이 아예 한술 더 떴다·
“서운하기는요· 그런데 지금 잔이 비었답니다? 안 채워주시나요?”
그 모습에 모용주희가 킬킬 음침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병은 같아도 내용물은 달랐다·
청의 주변으로 깔아둔 병에는 하남에서 제일 독하기로 유명한 서정두강주가 모용주희의 곁에 놓인 술병은 사실 술병이 아니라 차가 든 차병이다·
청의 잔이 차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모용주희가 말했다·
“자자 서문 소저· 우리 술 즐기는 여인들끼리 빼지 말고 놀아 봐요· 자아아·”
“어머 괜찮으시겠어요? 제가 좀 말술이라 술이 남아나지 않으실 텐데?”
그렇게 한 잔·
“그럼 이번엔 정아가 한 마디 할래?”
두 잔 세 잔 네 잔····
“그럼 한 순배 돌아서어· 서문 소저 다시 한 마디 해 주세요오·”
그렇게 한 병 그리고 두 병···
순식간에 다섯 병이 홀라당 사라지고 말았다·
“흐음· 아 좋다·”
청이 좌우로 살랑살랑 흔들거리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일부러 하는 취한 척이었다·
수작질은 같잖지만 결과적으로 비싼 술을 무제한으로 사주는 꼴이었으니 적당히 장단을 맞춰 주어야 물주도 신이 나지 않겠는가·
취한 척은 청의 고향 한민족들이 어려서부터 학교의 정규 과정으로 배울 정도로 온 국민이 공유하는 기예인 것이다·
“후훗 서문 소저·”
“예? 왜 그래?”
“그냥요· 불러 봤어요· 서문 소저· 서문 소저· 으음· 청아· 흐아아아 못 하겠어어· 부끄러워요·”
공손요예가 잔을 들어 한 방에 꺾었다·
청이 자신을 닮은 동작에 혀를 내둘렀다·
이상하다? 분명 입술만 적시랬는데?
“누가 예한테 술 줬어요?”
“아 자꾸 달라고 하셔서···”
“얼마나 준 거에요?”
“한 병 반 정도요···”
공손요예 옆에 있던 여인이 어물거리며 그리 대답했다·
청이 정신없이 술을 푸는 사이에 조금씩 홀짝거리다 점점 마음에 들어 팍팍 마셔댄 공손요예였다·
“많이도 마셨네· 예 괜찮아?”
“네· 기분 좋아요· 좋아· 그런데 서문 소저는 어떻게 그리 막 드시나요? 드셔? 저는 이상한데 아! 이게 취한다는 것이네요· 취해· 후훗·”
공손요예가 그리 말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청을 보며 헤벌레 못 보던 헤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기분 좋아요· 좋아· 그런데 서문 소저는 어떻게 그리 막 드시나요? 드셔? 저는 이상한데· 아! 이게-”
“예는 무한 반복 계열이었구나·”
“무한반복? 그게 뭔가요? 뭐야· 하지만 나는 서문 소저가 좋아요· 내 친구· 첫 번째 친구· 한 명뿐인 소중한 친구· 그런데·”
그리고는 청의 팔을 꼭 끌어안는 것이다·
“그런데 불공평해요· 공평해· 나는 친구가 서문 소저 뿐인데 서문 소저는 너무 많아· 그럼 안 되잖아요· 나는 마음을 다 주는데 서문 소저는 나눠서 주는 거잖아요· 나눠서· 전 싫어요· 내가 더 특별할 수는 없나요? 나눠도 가장 큰 조각을 원해요· 왜햐나면 불공평하잖아요· 나는 친구가-”
“예도 친구를 듬뿍 만들면 되지 않을까?”
청이 일단 반복을 끊어보았다·
그러자 무거운 소리가 튀어나왔다·
“다들 날 싫어해요· 서문 소저가 친구를 해주시기 전에 보름을 혼자 있었어요· 혼자 있었는데· 아무도 말걸어주지 않고· 사내는 사내들은 친구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아니야· 딱딱한 년 조금만 구슬리면 대줄 것 같대· 너무 아팠어요· 아파· 너무·”
“어떤 개자식이야? 걔는 오늘 대가리 깨지는 날인 줄 알아라· 누구야? 딱 말해·”
“후훗 화 내주시는 거에요? 화 나? 역시 나한테는 서문 소저 뿐이에요· 그런데 불공평해요· 공평? 나는 친구가 서문 소저 뿐인데 서문 소저는 너무 많으니까 불공평 이러면 안 돼요· 나빠요· 나는 마음을 다 주는데에 하암· 졸려요· 졸려· 잘래요· 잘래·”
그리고는 어깨에 기대는 머리가 묵직하다 싶더니 그대로 힘을 잃고 청의 무릎 위로 쏟아져버리고 말았다·
“아이고야·”
청이 난감한 표정으로 여인들을 보았다·
“육 층이 휴게실 겸으로 쓴다고 들었는데 혹시 몸을 누일 자리가 있을까요?”
모용주희가 잠시 고민 후에 대답했다·
어차피 목표는 서문청이지 저 막말하는 공손가 계집이 아니었으니까·
“한지로 써 붙인 방이 있을 거예요· 여인 휴게실이라고·”
“잠시 친구 좀 뉘어놓고 올게요·”
청이 공손요예를 번쩍 들어 계단으로 사라지는데 그 모습에 모용주희가 흐으 의심 섞인 숨을 내뱉었다·
저거 취한 거 맞나?
갑자기 멀쩡해 보이는데?
그러나 그것도 얼마간이었다·
공손요예 눕혀두고 휴게실 시비에게 은자 쥐어주며 특별히 잘 좀 봐주라고 당부까지 마친 청이 마지막 계단 한 칸에 발이 걸려 꽈당 엎어지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아· 취한 것 맞네!
겉으로 내색하지 않는 주사인가 보다!
모용주희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달려가 걱정하는 척을 했다·
“어머!!! 서문 소저!!! 괜찮아요!? 이렇게! 넘어지시다니!!”
청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년 아주 망신을 주려고 작정했네·
기껏 취한 척을 한 것이 공손요예 데려다 주느라 허사인 것 같아 한 번 넘어져 줬더니 아주 와 저거 취한 사람이라고 표정도 관리 안 하는 것 봐라· 아주 신이 났네·
“아아· 저는 괜찮답니다·”
“안 괜찮으신 것 같은데? 겨우 다섯 병 꼴랑 다섯 병이었는데요? 그렇게 술을 좋아하시는 척을 다 하시더니 다섯 병 에게 다섯 병 어디 가서 술 마신다는 말씀은 하지 말으셔야겠네· 다섯 병에 무슨 기별이나 간다고 이리 넘어지시고·”
인제 보니 일부러 표정 관리를 안 하는 모양이었다·
술꾼이라면 결코 지나칠 수 없는 도발이었으니까·
이게 같잖은 수작을 부리네?
더 멕여야겠다? 오냐· 한 번 속아 준다·
그런데 얘는 뭐야? 다섯 병을 퍼먹고 멀쩡하네? 얘도 시혈독인 골라서 태어났나?
“방금 하신 말씀 가벼이 넘길 수가 없겠는데요· 이 서문청 어디서 술로는 진 적이 없는 여인이랍니다·”
“이러언· 저도 그런데· 그럼 이참에 한 번 모두의 앞에서 용봉지회 최고 주객이 누구인지 가려 보시겠어요?”
“제가 드려야 할 말씀이시네요· 좋아요· 모용 소저는 오늘 기어서 돌아가시겠어요·”
“글쎄 개처럼 기게 되는 사람이 과연 누가 되겠어요? 얘들아 들었지? 서문 소저가 술 대결을 신청하셨으니 받아드려야지· 안 그래? 아래 가서 알리고 준비해달라 해·”
은근슬쩍 대결을 신청한 사람을 청으로 몰아가는 교모한 화술이었다·
청이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이야 대장질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하고·
“자자 일어나시고· 준비에 시간이 좀 걸릴 텐데 그동안 더 마시셔야지요? 설마 대결 때문에 빼시지는 않으시겠지요?”
그러나 받아주는 것은 받아주는 것이고 괘씸한 것은 괘씸한 것이다·
청이 엎어진 자세로 손을 내밀었다·
모용주희가 그 손을 척 잡아 잡아당기자 청이 빡 힘을 주어 내동댕이쳤다·
꽈당! 방심하고 있던 모용주희가 가공할 괴력에 손쓸 틈도 없이 바닥에 꽥 엎어져 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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