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93
청이 용봉지회 연회장에 들어서기도 전에 입구 어귀에서 서성거리던 여인이 있었다·
청을 보자마자 무기질하던 얼굴이 슬며시 살아 배시시 미소가 피어오른다·
공손요예가 뛰지만 않는 속보로 청에게 급히 접근했다·
“서문 소저 오늘도 안녕하신가요? 날씨가 참 좋지요? 오늘같이 서늘한 날에는 서늘한··· 그 오늘같은날에보통사람들은무엇을하는것일까요저는그저수련뿐이라아는게없어서죄송미안해요이런···”
“예 진정해· 뭐야 왜 도로 이렇게 됐지? 나도 반가워· 인사말에 너무 힘줄 필요 없으니까 부담가질 필요 없다니깐·”
“아· 그게· 저기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혹시 괜찮으신지 그 여부를 감히 여쭙고 싶사옵고자하니 부디 허하여 주심을 앙망히 바라는 바입니다···”
뭐지? 물어봐도 되는지 물어본다고?
왜 물어봐도 되는지 물어봐도 되는지 물어봐도 되는지 무한반복 가능한 거 아닌가?
청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공손요예가 눈에 띄게 안절부절 이쪽의 눈치를 살폈다·
“누군데?”
“천녀의 미욱한 동생 놈이옵니다···”
“뭐야 동생도 있었어? 어디 있는데?”
“그게 천일아·”
“예 누님·”
그러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자박자박 청년이 한 명 걸어나왔다·
어쩐지 눈코입이 유난히 닮았으니 남매가 아주 빼다 박은 수준이었다·
공손요예가 수수하니 화장 없는 맨얼굴도 어여쁘니 그 닮은 동생도 능히 여심을 불태울 수 있는 예쁘장한 귀공자였다·
“공손천일이라 합니다· 누님께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정말로 실존하는 분이셨군요· 이런 벽창호와 친구가 되어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공손천일이 인사를 건네는 모습은 마치 극의 배우처럼 동작이 크고 화려하며 절도가 있었다·
별거 아닌 동작이라도 큰 선으로 움직여 정중하니 보기에 멋있는 예법이었다·
“내 내가 진짜라고 했잖아·”
“흥· 거의 절벽에서 떨어져 동굴 안쪽에 신공비급이 쌓여있는 수준의 기연 아닌가· 결국 누나가 한 일도 없이 저분이 친구 해주신 거잖아· 거의 평생의 은인이신데?”
“윽· 나 나도 알아·”
청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뭔가뭔가·
“이런 실례했습니다· 세상 경험이 부족한 모자란 누님입니다만 부디 지도 편달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러면서 이쪽을 향해 살살 눈웃음을 치는데 잘생긴 놈이 웃으니 보기야 좋다만 뭐지 끼 부리는 느낌 아닌가?
청이 긴가민가 일단 판단을 보류했다·
“공손 공자님!”
“연 소저시군요· 친구분과는 화해를 하셨습니까?”
“덕분에요! 저기 그래서 말인데요 혹시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한 끼 식사라도·”
“이런 죄송합니다·”
“아···”
“제가 먼저 권유를 드렸어야 했는데· 제가 눈치가 모자라 소저께서 어려운 말씀을 올리게 만들고 말았군요· 부디 용서해주시겠습니까?”
“허업· 녜 녜엣 그럼 다 다음에···”
연 소저라 불린 여인이 새빨간 얼굴을 하고서는 약속도 못 잡고 비슬비슬 도망을 쳐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이후로도 비슷하게 천 소저와 윤 소저가 퇴장하고 산영 소저가 공손천일을 보고 달려왔다가 청을 보고 딸꾹질을 하며 급히 물러나기도 했다·
이 녀석· 어째 들었다 놨다 하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아 검우!”
“오오· 검우 왔는가· 공손 소저도 오셨군· 그래 오늘도 즐거운 대련을 펼쳐보세나·”
“좀 이따가· 아직 밥도 안 먹었어· 맞다· 여기는 공손천일 공손 소저 동생이래· 여기는 검우 혹은 검치· 남궁신재·”
“남궁의 소검왕이신 남궁신재 대협!”
얘는 좀 감탄이 길지 않나?
“하하 이제 소검왕 말고 열혈검객으로 별호를 바꾸기로 했다네· 소검왕 말고 열혈검객이라 불러주면 고맙겠네만·”
검왕이 들었으면 말도 안 들어처먹는 놈이 이젠 애비 별호도 물려받기 싫어 갖다버렸다고 화주 한 병 추가할 소리였다·
나날이 술이 느는 검왕 과연 간 건강은 괜찮을 것인가·
“열혈검객! 듣기만 해도 피가 뜨거워지는 별호로군요· 혹시 유래가 있으십니까?”
“거기 옆에 검우가 내 검에 대한 뜨거운 열정에 감복하여 지어준 것이지· 이제까지 듣지 못한 감동이 있어 평생의 별호로 삼기로 마음을 먹었다네·”
“보통 별호는 남이 정하지 않냐···”
“검우가 지어주지 않았나· 자네도 장문인급 어르신인데 자격이야 충분하다네·”
“근데 대련 이야길 들으니까·”
“왜 피가 끓어오르나? 그럼 당장·”
“아니· 배고파· 늦게 일어나서 주먹밥 몇 개 주워 먹은 게 다야·”
주먹밥이란 종자를 말하는 것으로 대나무 잎에 싸서 찐 찹쌀밥이다·
기묘하게도 삼각뿔 모양으로 만드는 것이 특징이었다·
안에 드는 고명도 여러가지라 고기를 넣어 짭짤하게 간을 하거나 팥을 넣고 달달하게 만들기도 했다·
“몇 개? 정확히 몇 개인가?”
“양고기랑 산양고기 닭고기 오리알 든 건 맛있더라· 그리고 팥은 좀 달다보니 요기라는 생각은 안 드네·”
“아침부터 다섯 개를 먹고선 배가 고프다는 건가?”
“아니 여섯 개· 오리알은 입에 딱 붙길래 두 개 먹었거든·”
그러자 남궁신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리고는 우려가 가득한 목소리로 묻는 것이다·
“자네 괜찮은가? 그렇게 처먹고도 배가 고프면 몸에 문제가 있는 것이 틀림없네· 지금 당장이라도 의원에게 진맥을 받아보는 것이 좋겠어·”
주먹밥 두 개에 고봉밥이 한 공기다·
그걸 여섯 개나 처먹고 와서 배가 고프다고 하면 돼지도 부끄러워 식탐을 줄일 만큼 기이한 일이었다·
“난아가 항상 봐주거든? 건강하댔어· 그런데 많이 먹는 건 자기도 모르겠다더라·”
“서문 소저 걱정하지 마시지요· 대저 대식이란 신체오복 중 셋에 해당하니 참으로 복된 일이 아닙니까·”
“아· 그렇게 말해주니 고마워요· 어쩐지 다들 점점 처먹는다고 구박이라니까····”
결국 식탁에 자리를 잡게 되었으니 청이 막 의자에 앉으려는 때였다·
“소저·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자·”
그리고는 공손천일이 청의 의자에 손수건을 척 깔아주는 것이었다·
“공손 공자님? 원래 여인에게 이리 친절하게 구시는지요? 자칫하면 오해를 살 수가 있으니 주의하시는 것이 좋겠어요·”
“오해 말씀이십니까? 소저 과연 오해이겠습니까?”
그리고는 또 생글생글 눈웃음을 치는데 그에 청이 확신했다·
아· 이거 긴가민가가 아니었네·
얘 나한테 지금 작업 걸고 있잖아·
내가 이래서 얼굴 가리고 다니는 건데·
어라 얼굴 가리고 있는데?
공손요예도 아직 청의 맨얼굴을 못 봤다·
얼굴 가린 여인은 다 이유가 있다는 것이 강호의 상식이 아니던가·
안 그래도 부탁 한 번 할 때에 숨 쉬는 법을 잊어먹거나 극존칭이 튀어나오는 공손요예였으니 앞으로도 얼굴 좀 보여달라고 하기는 영영 불가능할 터였다·
그래도 친구 사이에 얼굴을 몰라서 쓰나·
오늘은 심심하니 무천각에 불러다 얼굴도 좀 보여주고 할 생각이었지만·
“공손 공자· 그러면 못 써요· 얼굴도 못 본 여인을 그리 놀리면 안 돼·”
“미추가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누님이 어제 저녁 내내 밤이 늦도록 소저의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니 그 인품에 사모의 마음을 품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에 청의 고개가 공손요예를 향했다·
공손요예가 고개를 푹 숙였는데 드러난 귀가 아예 빨갛게 익었으니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사실 여부를 알 수 있었다·
“공자의 마음은 고맙지만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남녀의 일에 관심이 없으니 부디 다른 좋은 여인을 찾기를 바랄게요·”
“그렇습니까·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 그리 접는다고 떠나는 것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제가 흉중에 간직할 뿐이니 부담을 품지 말아 주십시오· 그저 언젠가 마음이 바뀌실 때 떠올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으엑·
청이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면사가 가진 장점이었다·
어차피 무슨 표정 하는지 모르거든·
그래서 식사를 마치고 칠 층에 가겠다고 떼어놓았더니 공손요예가 미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서문 소저 그 미안해요· 제가 주책을 부렸더니· 서문 소저가 언니 같아서 진짜 친언니처럼 가족으로 지내고 싶다고 했더니 동생놈이그게소원이라면뭐라하더니저렇게나올줄은저도정말로몰랐으니까부디기분상하거나불쾌해하지마옵시고넓은-”
“진정해· 그래도 뭐 동생이 착하긴 하네· 누나 친구를 가족으로 만들어주겠다면서 얼굴도 모르는 여인을 꾀고 그러는 어라· 이게 착한 건가? 못된 거라고 해야 하나?”
청이 헷갈렸다·
갑자기 들이대는 친구 동생 피해서 칠 층에 올라오고 나니 어쩐지 떠들던 소리가 한풀 꺾였다·
어차피 신경쓰지 않는 청이 눈을 빛내며 좌중을 훑었다·
백합 백합을 보자!
파격적 의복의 선구자이신 진설 선생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진설도 무림오화중 일인으로 굉장한 미모라서 옷차림 아니라 얼굴만으로도 눈부신 지점이 있어 쉽게 찾을 수 있었는데 아쉽게도 백합은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눈이 두 번 부셨으니 한 번은 저쪽에 모용주희가 있고 그리고 반대쪽에는 처음 보는 미인이 또 한 명·
청이 곁에는 늘 설명해 주는 사람이 한 사람쯤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혼잣말 비슷한 질문이 튀어나왔다·
“음? 누구시지?”
“그러게요· 어떤 분이실까요?”
다만 공손요예는 청보다도 무림을 모르는 완전 초출 무림뿐만 아니라 아예 강호도 잘 모르는 여인이었다·
멍청이 둘이 붙었으니 눈 네개로 봐도 전혀 아는 바가 없다·
그때였다·
“어머 서문 소저!”
누가 반가운 척을 하기에 돌아봤더니 이게 웬걸· 모용주희가 환하게 웃으며 청에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뭐지? 쟤가 날 반길리가 없는데? 그렇게 대협이었나?
혹시 가슴은 없지만 가슴만큼은 넓은 소저였나?
“어제는 너무 실례를 했어요· 생각해보니 전부 제 잘못뿐이라 다시 만나게 되면 꼭 사죄를 드려야겠다고 다짐을 해서·”
“괜찮아요· 없던 일로 하기로 했잖아요·”
“그렇다고 일어난 일이 사라지나요? 우리 같은 여류 무인인데 무인답게 앙금을 한번 털어내는 자리를 가졌으면 해서요·”
뭐지 한 판 붙자는 건가?
검으로 붙으면 이길 수 있을 것 같아서?
청이 그리 생각하고 있자니 모용주희가 말을 이었다·
“혹시 술 좋아하시나요? 예로부터 호걸이란 속상한 일 서운한 일 죄다 술잔에 녹여 흘려버리니 무인의 방식이 아니겠어요? 부디 거절하지 마시고 우리 술 같이 마시면서 즐겁게 사귀어 봐요? 네?”
“술· 술 좋네요·”
청이 대답했다·
뇌가 아닌 척추에서부터 냉큼 튀어나온 대답이었다·
모용주희의 이름은 진주 주珠 계집 희姬를 쓴다·
다만 계집 희는 계집이 아니라 신분이 높은 여인에게 붙이는 존칭형 한자다·
당장 신녀문이 무산신녀를 모신 도관이고 이 무산신녀의 이름이 요희가 되시겠다·
과거에 쓰던 말로 천자의 딸을 왕희라고 부르고 공주의 옛말이 제희라고 하였으니 계집 녀보다 계집 희가 고상하고 아름다운 글자이기 때문이었다·
다만 진주 주가 아니라 술 주酒를 넣는 것이 정확하다는 것이 모용주희의 절친한 친구들이 하는 말이었다·
모용주희는 말술이기 때문이다·
흔히 말술이라 하면 술을 말째로 들이킨다는 뜻이다·
한 말이란 청의 고향 식으로 하면 대충 십 팔 리터(610 fl·oz)쯤 되는 초대용량으로 콩 볶아 우려낸 한민족의 전통 음료 아이스 아메리카노 그란데 사이즈로 서른 잔 하고 반 잔을 더해야 한다·
그러니 말술이란 술을 그렇게 처먹는다는 뜻이다·
중화인은 고대로부터 간의 해독 능력이 인품과 비례한 것으로 여겼다·
물론 사내에 한정해서다·
여인이 말술이면 술 처먹고 실수나 할 년이라면서 흉을 보니 여인의 간은 딱히 쓸 데가 없는 것이다·
민담 속 요괴들이 여인 놔두고 굳이 사내의 간만 탐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나 모용주희가 이에 대해 분연히 떨쳐 일어나 남존여비 더러운 사상을 외치며 썩어빠진 세상이나 뒤집어 보시겠다는 여류 투사는 아니었다·(투사는 따로 있다)
여인은 술을 처먹어봐야 실수나 한다고?
그렇다면 술을 퍼먹이면 제대로 실수를 저지른다는 소리가 아니겠는가 하고·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예약 걸어야지~ 하고 눌렀는데 현재 시간 이전으로 예약할 수 없습니다···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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