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06
월녀검결이 부드럽게 펼쳐진다·
둥근 호선을 그리던 검의 궤적이 불현듯 필법(한자쓰기)의 갈고리처럼 아래를 치고 튀어오르니 왼쪽으로 바짝 당겨진 오른손을 펴며 좌에서 우로 비스듬히 올려 찌른다·
그에 팽초려가 빠지며 빙글 몸을 돌리니 목검이 등허리의 굴곡을 스칠 것처럼 아슬하게 허공을 찔렀다·
팽초려의 머리카락이 사르륵 펼쳐지니 그 순간 청이 눈을 빛냈다·
빈틈!
청이 검을 당겨 손을 번쩍 들었다·
뒤이어 매섭게 떨어지는 목검이 팽초려의 정수리를 노렸다·
목검이 넓게 펼쳐진 팽초려의 머리채 사이로 파고든다· 그런데 아무런 감각이 없이 맥없이 허공을 가르는 듯한-
빠악! 청의 세상이 빙글 돌았다·
팽초려가 몸을 돌리며 손에 든 쇠몽둥이로 바닥을 죽 훑어 휘둘렀으니 크게 원형으로 돌아 힘을 얻은 쇠뭉치가 청의 발목 위를 종아리를 후려친 까닭이었다·
청의 두 발이 허공으로 뜨고 모로 기울어져 어깨로부터 떨어져 나동그라졌다·
“아으 스읍···”
호되게 나뒹군 것 치고는 시원찮은 신음이었다· 종아리를 얻어맞아 몸이 공중에서 완전히 모로 누울 정도였음에도 불구하고·
벌떡 일어나 종아리 몇 번 문지르고 어깨를 돌리더니 금세 다시 검을 쥐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이십여 합·
이번에는 골반 아래 허벅지를 정통으로 맞은 청이 쓰읍 잇새로 바람 드는 소리를 내며 슬슬 쓰다듬었다·
제갈이현이 그 모습을 질린 기색으로 바라보다 슬그머니 말을 붙였다·
“팽 누님? 좀 살살 하시는 것이···”
“이것보다 어떻게 더? 억지로 가는 속도를 늦출 수도 없는데·”
팽초려는 대도 대신 뭉툭한 쇠몽둥이를 든 채였다· 손잡이까지 하면 육 척 반에 이르는 통짜 쇠붙이였다·
무게만 스무 근이 조금 안 될 정도·
이러한 중병은 힘으로 휘두를 수 없다·
그저 흐름을 이어가 병기 자체의 무게로 짓눌러야 하니 부딪치지 않으면 회전이요 부딪치면 그 반동으로 큰 원을 끊이지 않고 그려내는 기예였다·
팽초려는 그저 대도를 붙들고 있었을 뿐이니 여기서 더 살살이란 애초에 가능한 영역이 아닌 것이다·
“초려 말이 맞아· 그래서 수련이 되겠어? 원래 수련은 몸 아프면서 해야 새겨지는 법이지·”
청이 초려를 거들었다·
그 스승에 그 제자라더니 서문수린의 몸새김 교육법에 큰 감명을 받은 청이었다·
그에 초려가 흐뭇한 미소로 기특함을 감추지 않았다·
“우리 청아가 그야말로 일취월장이로구나·”
“애초에 기초가 많이 모자랐는걸요·”
처음에는 팽초려의 일 합을 버티지 못하고 목검을 해먹었더란다·
아예 실린 무게 자체가 다른 극한의 중병을 내공의 운용 없이 연약한 목검으로 받아내는 일이 어찌 쉬운 일이랴·
받아 흘리는 각도가 조금이라도 둔탁하면 목검이 부러져버리고 마는 것이다·
팽초려도 그를 감안해 처음에는 그저 정직하게 대도를 뻗다가 점점 기교를 섞고 속임수를 섞었다·
지금에 이르러선 팽초려가 노련한 무인의 온갖 수법을 동원함에도 이십여 합을 넘게 버티게 되었다·
오랜만에 양껏 날뛴 팽초려가 개운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땀을 훔치며 물러났다·
청이 온통 흙범벅인 싸구려 무복을 툭툭 털며 재촉했다·
“후우· 다음은 누가 할래? 검우?”
“그래! 기다리고 있었다네!”
“대충 하다 비켜라·”
청이 수련에 불이 붙고 나니 다들 천상 무인들이라 같이 신이 났다·
남궁신재야 항상 불타는 상태라고 해도 팽가네 남매도 점점 청의 무식한 수련법에 더는 놀라지 않게 되었으니·
덕분에 열흘 전 무한대련을 시작했을 때와는 청이 얻어맞는 소리가 달랐다·
툭 탁 퍽 정도였던 소리가 이제는 쿵 빡 철푸덕 듣는 사람이 질릴 정도가 되었으니 드문드문 찾아온 제갈이현이 정색하며 걱정을 내비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당 누님 대련이 괜찮은 겁니까? 본래 사람 몸이 저리 혹사를 버틸 수가 없는 것이 아닙니까?”
웬일로 암기 수련에 매진하던 당난아가 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당난아도 청을 오래 겪었다·
“어? 청아? 괜찮던데?”
“괜찮다는 말씀이십니까?”
“청아는 튼튼한데 호신경을 상시로 두르고 있어서 그냥 얻어맞아서는 뼈는커녕 근육도 안 상해· 검기 아니면 날붙이도 안 들어갈걸? 침도 못 놓으니까· 아오 이거 안 빠져· 멀뚱히 보고만 있지 말고 도와줄래?”
“아 넵·”
제갈이현이 목인형에 빼곡하게 박힌 암기를 쏙쏙 빼냈다·
당난아가 족족 받아 드는 대로 소매와 품속 그리고 치렁하게 긴 상의의 자락으로 연신 밀어 넣었다·
당난아가 즐겨 입는 품이 넉넉하고 길어 나풀나풀 흩날리는 의복이란 사실 그 모양보다 암기 창고에 가까운 기능미에 우선한 것이다·
제갈이현이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당가 무인에게 원한을 사면 안 되겠다고·
“그리고 뭐 열심히 하는 게 좋지 않아? 나도 막 암기 연습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잖아· 저러니까 절정 후기를 이뤘구나 싶기도 하고· 대단하지· 우리 청아는·”
제갈이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제갈이현도 무인이라서 무인들이란 애초에 혹사와 열심 사이의 구분이 희미한 족속들이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해가 지고 저녁때쯤 되면 청의 꼴이 참으로 볼만해진다·
땀으로 흠뻑 젖은 무복이 연무장 바닥을 구르면 흙먼지가 아니라 진흙으로 엉겨붙기 때문이었다·
“후우···”
오늘의 승률은 대략 일 할 정도·
승률이야 계속 제자리걸음이다·
하지만 다들 점점 대련에 진심이 되어서 공세의 수위를 높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늘기야 많이 늘었다고 할 수 있겠지?
청이 뿌듯함에 무겁고 노곤한 몸을 이끌고 욕탕으로 향할 때였다·
“쯧쯧· 아주 잘하는 짓이다·”
돌연 들리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인가 나무 아래 등을 기대고 있던 작달막한 중년인이 있었던 것이다·
“아씨 깜짝이야· 그 누구세요? 어디서 음 뵌 적이 있었던 것도 같은데·”
“이러면 어때용? 기억이 안 나세용?”
“아! 가짜 책 팔던 아저씨!”
청이 흑시에서 본 말투 특이한 책 상인을 떠올렸다·
제갈이현에게 무영신수에 대한 설명을 들었으니 그 정체도 대강 알 법 했다·
혹시 이 아저씨가 내 복신적 가져갔나?
하지만 그렇게 물어보자니 내가 아저씨의 정체를 안다고 자백하는 꼴이라서 청이 일단 내색하지는 않았다·
“천유학이다· 그런데 며칠 지켜보았더니 아주 계집애가 독하기 짝이 없구나 아주 지독해·”
“저야 뭐 괜찮은데요 함부로 그런 소리를 하시면 안 돼요· 스승님 귀에라도 들어가봐· 개박살이 나실 텐데·”
책 팔던 상인이 아주 수상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었으므로 청이 일부러 서문수린을 입에 담았다·
“왜? 방금 내 말에 개박살이 날 구석이 있었냐?”
“만약 제가 이런 몸이 아니라 사내였다고 해도 지독하단 소리를 하셨을 거예요?”
사내가 온종일 땀 빼고 구르고 얻어맞으며 수련에 매진하면 아주 마음을 굳게 먹었구나! 참으로 대견하고 장래 큰 인물이 나올 것이로구나! 하며 감탄한다·
하지만 여인이 이러하면 아주 지독하구나 제대로 독심을 품었으니 저래서야 도대체 누가 데려갈꼬 하며 혀를 쯧쯧 차댔다·
강호의 인심이 이러하니 서문수린이 한참 젊었을 적에 난리를 친 것이다·
“으음· 그래도 미련하다는 소리를 하긴 했겠지···”
정곡을 찔린 천유학이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도대체 무슨 수련을 그따위로 하냐? 내가 보기엔 그냥 지치려고 작정한 것으로밖에 생각이 안 된다만· 왜 땀 빼고 근육 쑤시고 여기저기 얻어맞아서 아프면 열심히 했다고 뿌듯하기라도 하냐?”
실은 정곡을 꿰뚫는 말이었다·
무인이 겸업이라 한 발짝 떨어져 볼 수 있는 사람이기에 열심이라는 말 아래 가려진 이상을 들춰볼 수 있는 것이다·
청의 표정이 떫었다·
이 아저씨는 뭔데 갑자기 시비지?
“이래 보여도 엄청나게 는 거거든요? 원래는 몇 합 부딪치지도 못했는데 이제는 다들 진심으로 상대해주잖아요·”
“헹· 늘기는 개뿔이· 쩌기 동네 개새끼도 그만큼 얻어맞으면 피할 줄 알겠다· 그게 실력이 늘어서 그러냐· 그냥 처맞다 보니까 눈에 익어서 요령이 생긴 거지·”
“그것도 실력은 실력이잖아요·”
“상대 바뀌면 또 처맞겠지· 온 세상 무인들 찾아다니면서 처맞으려고?”
근데 이 아저씨 말하는 모양새 좀 봐라·
싸가지의 상태가?
청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일단 한 번은 참았다·
“훈수는 아무나 막 두거든요? 그래서 뭐 엄청나게 효율적인 수련법이라도 아세요?”
“네 말대로 훈수는 아무나 두지· 딱 보면 미련하게 고생만 하고 얻어가는 것이 없는 판에 오냐 잘한다 잘한다 박수만 치고 있어야겠냐?”
“그럼 딱히 다른 방법도 모르겠는데 그냥 하던 대로나 하지 뭐· 뭘 하고 계셨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던 일 계속 하세요· 그럼·”
청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몸을 돌렸다·
도와주지도 않을 거면 훈수를 해봐야 기분만 상하는 법이었다·
“아니아니 잠깐· 그리 가 버리냐?”
“그럼요? 뭐 할 말 있으세요?”
천유학이 아뿔싸 싶었다·
저도 모르게 성질대로 하다 보니 답답한 마음에 말이 좀 뾰족했던 모양·
천유학이 다시 몸을 돌리는 청을 급히 붙잡았다·
“부드러움을 익히고 싶은 것이 아니냐? 딱 보니 검에 유를 실으려는 모양새던데·”
“네· 맞아요·”
“흠 애초에 검이 그리 부드러운 물건이 아니니 수만번을 휘둘러봐야 그게 되겠냐· 자고로 부드러움이란 그런 식으로 깃드는 것이 아니지·”
“그러면요?”
“날카로운 단검을 하나 구해서 아니지· 자· 옜다·”
천유학이 품에서 단검을 집채로 한 자루 꺼내 휙 던져 포물선을 그려냈다·
청이 받아서 뽑아보니 날이 시퍼런 것이 예사 물건이 아니다 싶었다·
“오잉? 저 주시는 거예요?”
“잠깐 빌려주는거다· 이제부터 그게 네 손이라고 생각하고 손 대신 써 봐라·”
“그게 무슨 뜻인데요? 손 대신이요?”
“말 그대로다· 손으로 하던 일을 그걸로 대신해 보라고· 그걸로 밥 먹고 옷 입고 손이 하던 일을 그대로 말이다· 잘 때 말고는 손에서 떼어놓지 않고 생활해 봐· 그렇다고 왼손을 쓰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겠지?”
청이 떫은 표정으로 단검을 보았다·
그래도 고수가 하는 말인데 굳이 값비싼 단검까지 빌려주며 놀리려 들지는 않을 것 같기도 하고·
“저 놀리시는 거 아니시죠?”
“놀리기는· 나도 그렇게 배웠으니 하는 소리지·”
“음· 감사합니다·”
청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천유학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복신적은 필요 없나? 내가 서신을 써 두었는데 피리 안쪽에 손수건이 하나 있지 않디?”
“아· 그거· 뭐에요 남의 물건을 왜 가져가고 그래요?”
“아 그거라니· 서신을 읽었으면 와야 할 것이 아니냐?”
천유학은 어이가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청은 태연했다·
“나중에 자기 전에 보니까 바껴 있더라고요· 신시는 진작 지났고 악의는 없다고 쓰셨으니 다음에 또 연락을 주실 줄 알았지·”
“아니 귀한 보물을 도둑맞았으면 당장에라도 달려와야지 무슨 심부름이라도 깜빡 잊은 듯이·”
“누가 그런 칙칙한 피리를 탐내요? 어차피 소리도 안 날 텐데·”
“요 녀석아· 이만큼의 만년한철이면 그 값만 해도 얼만지 아냐? 이걸로 검을 만들면 그게 신검이야 천하의 보물이지·”
“굳이 멀쩡한 피리를 녹여서 검을 만들 필요가 있어요? 어차피 사람이나 베는 검보단 피리가 낫지 않나?”
“꼴에 도사라고 말코 같은 소리를···”
딱히 청이 도사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그냥 물욕이 없어서 그렇다·
이는 청의 본성이 아니라 처한 상황이 그러할 뿐이었다·
당장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사람은 저축 따위 하지 않는 법이므로 돌연 세상이 뒤바뀌는 경험을 하고 나면 미래에 대한 생각 자체가 뒤집혀버리고 마는 것이다·
한 번 일어난 일은 두 번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기 때문에·
천유학이 슬그머니 본론을 꺼내보았다·
“음· 그런데 말이다· 혹시 무공을 배워볼 생각이 있느냐? 내게 천하에 이름이 높은 신공절학이 몇 개 있는데 말이다·”
“감사합니다·”
청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천유학의 표정이 활짝 피었다·
“그러면 일단 구배지례를-”
“아· 그 말씀이셨구나· 죄송해요· 스승님을 두 분이나 모실 수는 없잖아요·”
청이 곧장 태도를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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