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22
천유학은 오늘은 볼일이 있다면서 쌩하니 가 버리는 통에 청이 이제 어쩔까 하다가 특유의 뒤가 없는 행동력으로 큰 포목점을 물어물어 찾아갔다·
버티기 힘들다고 싸매놓아야 무슨 의미가 있냐는 천유학에 말에 홀라당 넘어갔기 때문으로 마침 밖으로 나온 때에 적당한 의복이 없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어떤 의복을 찾으세요?”
“광목을 좀 사려는데· 혹시 고운 것이 몇 수까지 있을까요? 제일 높은 거요·”
“아아· 잘 오셨어요· 마침 일백팔십에 육 합 짜리 귀한 상품이 들어온 참인데· 어때요 한 번 보시겠어요?”
일백팔십이란 실의 굵기를 말하며 숫자가 높을수록 얇은 물건이다· 육 합이란 실을 몇 가닥이나 꼬아서 사용했는지를 말했다·
즉 점원의 말은 일백팔십수의 아주 얇은 실을 여섯 가닥 꼰 합사로 짠 광목천이라는 뜻이었다·
“오잉· 그런 게 있어요? 봐도 될까요?”
“그럼요·”
일백팔십수 번에 육 합사를 쓴 광목이면 그 부드러움은 말로만 들어도 보통이 아님을 알겠다·
점원이 내어준 천을 실제로 만져보니 또 그러한지라 하늘거리고 부드러워 비단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애매한 물건이기도 했다·
그럴 바에야 비단을 쓰는 게 나으니까·
“괜찮은데· 얼마에요? 얼마나 있어요?”
그에 점원의 표정이 활짝 피었다·
큰 손님이구나! 하고·
딱히 금전 아낄 줄을 모르는 청이 비싼 광목을 다 털어버리고는 포목점에 걸린 의상들 사이를 서성거렸다·
“손님 찾으시는 복식이 있으신가요?”
“그냥 좀· 둘러보려구요·”
그냥 좀 둘러본다는 말을 번역하면 내가 알아서 볼 테니 말 걸지 말아 달라는 뜻이된다·
점원이 아쉬운 표정으로 물러나고 나서 청이 의복들을 죽 둘러보았다·
하지만 의복에 신경을 써 본 적이 없으니 알 리가 있나· 얇은 옷을 보자니 너무 남사스러운 것들 투성이고 그런데 또 스승의 말이 마음에는 계속 걸리고·
그렇게 갈팡질팡하다 문득 눈에 들어오는 의복이 있었다·
오· 저건?
한 눈에도 뻑뻑한 마의였다·
“저기 저 마의는···”
아쉬움으로 큰 손님을 바라보던 점원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흐흣 특이한 옷이지요?”
점원이 설명하기를 어느 고관집 부인이 주문한 옷인데 본래는 상복으로 짜서 만든 옷이었으나 의복이 완성되기도 전에 재가를 나가버리고 말았다고·
마의 중에서도 최고급으로 짠 옷이라서 버릴 수도 없고· 그래서 염색해 걸어두었다는 것이다·
“어때요? 흑색이 참으로 은은하니 곱지 않나요? 풀 먹은 마의에도 어디 한 군데 성김이나 버김이 없어 고르니 저의 색공의 실력이 이렇답니다· 혹여 염색을 할 의복이 있으시다면···”
청이 설명을 듣고 나니 팔기 위한 옷이 아니라 염색 자랑을 위한 간판이었다·
중원에서 흑색이라 하면 청의 고향 땅처럼 아예 새까만 옷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짙은 회색 현대의 어머님들이 어두운 쥐색이라 표현하는 바로 그 색을 말했다·
아예 까맣지 않고 밝은 느낌을 주되 본이 검정이기에 너무 밝아서도 안 된다·
그러니 제대로 물이 든 흑색은 참으로 곱고 단아한 인상을 주는 것이다·
색이 참 곱기는 하지만 그뿐이고 청의 뇌리에 문득 스치는 생각이 있어서였다·
청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저거 저건 얼마에요?”
상복은 유래부터가 불편하기 위해 입는 옷이다· 부모나 스승 혹은 해 준 거 없는 군주를 잃어버리고 그 슬프고 불편한 속을 밖으로 내보여 증명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마음은 몰라도 몸 하나는 확실히 불편하다는 점을 만천하에 드러내 뽐내기 위해 만들어진 의복이 바로 상복인 것이다·
다만 염색을 워낙에 고급스럽게 해 놓은 탓에 전혀 상복이라는 느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불편함은 진짜였다·
“끄아아····”
청의 발상은 간단했다·
기분이 좋아서 문제라면 아예 안 좋은 쪽으로 익숙해지면 되는 게 아닐까·
몸을 살살 스치는 비단결의 부드러움이 너무 과한 것이라서 아예 피부를 박박 긁는 마의를 입으면 되지 않을까 하고·
그래서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당장에 입어 보았더니 이야 이건 뜨아아·
본래 마 섬유가 거칠고 뻣뻣한데 풀을 먹여서 문질러 풀기를 반복하면 뻣뻣함은 사라지되 실에 갈고리 같은 날이 서서 더욱 거칠어지기 마련이었다·
거기에 더해 염색까지 한 옷이다·
색을 입힌 실에 염색을 한 것이 아니라 이미 짜여진 옷에 염색을 덧씌워 약품으로 색을 보존했으니 당연히 거욱 거칠어진다·
그러니 그 결과물은 직물보다는 수세미 아니 수세미보다 더 거칠어 청의 고향에서 사포라고 하는 나무 깎는 대패에 가까웠다·
안 그래도 손끝처럼 감각이 선 피부를 하고 사포로 옷을 지어 입은 꼴이었다·
그 따가움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피부가 갈려나가는 기분이었다·
“좀 너무 시작부터 끝장인 것 같은데·”
그래도 차라리 아픈 것이 더 낫다·
몸을 움직일때마다 피부가 쓸려 비명을 지르니 오히려 정신이 번쩍 들어 의식이 또렷하기도 하고·
게다가 수련에도 적합한 옷이었다·
마의가 본래 바람이 숭숭 들어 통풍이 잘 되는 옷이다·
게다가 뻣뻣한 저고리가 튀어나온 장애물에 걸려 일자로 떨어지는 통에 배 위가 주먹 두 개만큼 붕 떠서 바람이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안 그래도 슬슬 더워지는 차에 시원함 하나만큼은 알아줘도 되겠다 싶고·
“뜨하윽·”
불편하다 못해 아리고 쓰라린 착용감만 익숙해지면 되겠다 하고·
천유학의 말에 따르면 피부의 감각으로 공간을 읽는 기예에는 딱히 별다른 수련법이 없다고 했다·
이는 무의식적으로 쌓이는 경험들의 집합으로 나오는 결과라는 것이다
피부에 바람이 통하는 상태에서 일 년 이 년 생활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 흐름이면 뒤에 뭐가 어떻게 있겠구나 하고 사방으로 시야가 트인다는 것이다·
굳이 그 기간을 줄이려고 하면 홀딱 벗고 다니는 수밖에는 없으니 그냥 최대한으로 바람이 통하게 입고 최대한 많은 장소를 돌아다니는 것이 중요했다·
그렇게 바람이 센 곳과 약한 곳 복잡한 장소나 사람이 많은 장소 사방이 막힌 곳 등등 최대한 많은 경험으로 감각의 확장을 익혀나가면 시간을 많이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물론 청에게는 아직 요원한 일이었다·
당장 가진 감각에 익숙해지지도 못하는 때에 바람이고 뭐고 신경을 쓸 겨를이나 있겠는가·
그렇게 청이 개봉의 밤거리를 돌아다니며 생각한 바는 이러했다·
이거 피부 다 갈려 나간 것 같은데· 혹시 피 나는 거 아닌가? 그냥 포기하고 잠이나 잤으면 좋겠다·
하지만 오만상을 쓰면서도 밤이 늦도록 돌아다녔으니 어찌어찌 버틸 만은 한 것이다·
그러니 청이 뿌듯할 수밖에는·
와 오늘도 보람찼다·
거의 삶의 모든 순간이 수련이네 하고·
이런 종류의 헛된 뿌듯함이란 결코 좋다고 할 수 없는 자기 위안에 가깝기는 하다·
하지만 그래도 아예 놀고 먹고 즐기면서 회피하는 태도보다는 훨씬 나았으니 그래도 전보다 좋아졌다고 할 수 있으리라·
—-
대의제란 무림맹의 높으신 분들끼리 모여 차후 무림맹의 주요한 사업 방향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무림대회에서는 누구라도 대의제에 참가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정작 진짜로 굵직한 안건들은 이렇게 지네들끼리만 모여서 결정을 짓는 것이다·
이 흑막들의 모임 같은 자리에서 서문수린이 강하게 주장했다·
“흑점 놈들을 언제까지 두고 보려는가? 날이 갈수록 패악질이 심해지는 때에 정도를 걷는 정파 무림맹이 이대로 방치해 두어도 좋냔 말이다·”
전전대 고수인 서문수린이라 말투부터가 거침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듣는 이들의 표정도 밝지 못했다·
“하지만 선배· 흑점이 맹탕 나쁜 놈들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거기에 생계가 달린 양민들이 몇인데 함부로 손을 대어 파란을 일으키겠습니까·”
흑점은 온갖 더러운 거래의 온상이기도 했지만 자기 가게 없이 떠도는 보부상들의 구명줄이기도 한 것이다·
그에 용기를 얻은 인원들이 한 마디씩 의견을 보탰다·
흑점의 고객 중에는 정파 무인들도 여럿 있어서 없애버리고 나면 관의 눈을 피하거나 급히 희귀한 물건을 구할 때에 곤란해진다·
흑점도 악질이 도를 넘거나 혹은 무림 공적의 경우에는 순순히 협조를 하는 놈들이 아니겠느냐· 오히려 뒷골목 사는 놈들을 꽉 잡고 있으니 한 번에 파악이 된다·
그 방점은 무학 대사였다·
“서문 도고 그러면 흑점을 어찌하면 좋을까요· 애초에 하지 말라 하여 그만둘 이들이 아니니 참회동에 가두어 계도를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모두 참살하여 치워버릴 수도 없는데·”
“흥· 말종 놈들을 참살하지 못할 것은 또 무어냐· 불살계 따위 고리타분한 소리를 지껄일 것 같으면-”
“그럼 어디까지 참살하려 하시나요? 아상과 식육상들? 그러면 그 범위는요? 직접 공급하는 이들에 중간에 유통만을 담당하는 이는 죽을 죄일까요? 장물아비는 어떻지요? 사람을 상하게 한 강도는 쳐죽이되 몰래 물건만 훔치는 소매치기는 살려야 할까요?”
서문수린이 인상을 팍 찌푸렸다·
망할 놈의 땡중이 느물거리기는·
누구에게나 쓰는 저 존대부터가 거슬리기 짝이 없는 아주 능구렁이였다·
애초에 악인을 때려잡는 데에 누굴 살리고 누굴 죽이는 기준을 세워둘 이유가 무어란 말인가·
눈에 띄면 죽는 거고 재수가 좋은 놈은 살 수도 있다· 제 버릇 못 버리고 계속하다 칼을 맞을 수도 있고 아니면 만에 하나라도 마음을 바꿔 양지로 나아갈 수도 있겠다·
애초에 무림맹이 삼황오제 천상에 닿은 신인들의 모임이 아닌데 마음을 먹고 기준을 세운다고 전부 집행이 될 것도 아니다·
그러니 여기서 기준을 말해 보라고 하면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있겠는가·
참으로 비겁한 화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니 그냥 한숨이나 푹 내쉬고 으름장이나 놓을 수밖에는·
“불편한 일이라고 피하다간 끝내 큰 사달이 벌어지고 말 것이야· 갈수록 방만해지니 언제고 큰 사고를 칠 놈들인데 나중에 일이 터지고 나면 다 늦어버리는 것을· 쯧· 그때 그 망신 망신은 둘째치더라도 천하의 민심을 어찌 수습하려고·”
“도를 넘으면 징벌하면 되는 일이겠지요· 정파 무림이 시킨 패악질도 아닌데 어째서 민심이 우리를 욕하겠어요?”
결론은 기각이었다·
“쯧·”
서문수린이 혀를 찼다·
이래서 무림대회에 오기 싫었던 것인데·
그러거나 말거나 대의제는 계속되었다·
“그러면 다음 의제는 천비자 도장께서 말씀하신 사안입니다· 의정무학관의 개장에 대해서···”
—-
무림대회 둘째 날 잠룡비무회 일정으로는 이 조와 사 조의 비무가 있었다·
청은 객석에 자리를 잡았는데 소림 제자 월봉의 비무를 지켜보고 오라는 서문수린의 의견 때문이었다·
천하제일이라 하는 소림의 무공을 미리 보고 준결승 비무를 준비하라는 뜻이었다·
그에 우측으로는 해설 담당 제갈이현을 끼고 좌측으로는 우정 담당 당난아가 자리했다·
그리고 무릎 위에는 귀여움을 담당하는 제갈향이 딱 자리를 잡았다·
청에게 있어서 남부럽지 않은 구성으로 좌호법 우호법 그리고 애완동물을 갖췄다고 하겠다·
다만·
“끄흑·”
제갈향은 한민족 기준으로도 아동에 속하는 여아였으니 비무회가 마땅히 재미있어 보이지는 않았던 모양·
무릎에 앉아 발을 휘두르고 꿈지럭거리며 가만히 있지를 못하니 그에 안 그래도 사포 같은 옷감이 피부를 발라내듯 거칠게 문지르는 것이다·
청의 고통스러운 신음이 새니 제갈향이 제 허리를 뒤로 꺾고 고개를 위로 치들며 물었다·
“가가 언니 저 무거워요? 앗 푹신하당·”
제갈향이 앞뒤로 흔들흔들 제 정수리를 뒤로 콩콩 들이받았다·
청이 그 모습에 가슴이 철렁 뭐야 대체 이 귀여운 생물은· 어쩜 이럴 수가 있지·
“아냐· 향이는 가벼워· 그런데 향이는 별로 재미없니?”
“웅··· 조금요· 흐아암·”
그리고는 하암 하품을 토해내는 것이다·
청이 그에 반색하며 제갈향의 몸을 껴안아 제게 기대도록 했다·
그래· 차라리 좀 자는 게 좋겠다·
꼼지락거리면 쓸린단 말야·
“그럼 차라리 한숨 자· 편히 기대고·”
“저 안 졸린데···”
말은 그렇게 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제갈향이 까무룩 잠들어버리고 말았다·
원래 애는 금방금방 자는 법이었다·
청이 한결 편해진 태도로 비무를 구경하다가 문득 고개를 갸웃거리기를·
“왕 소협이라고 했던가? 원래 저랬나?”
“의자가 바뀌었지요? 예선 마지막에 의자가 부서지는 바람에 다시 구했다고 하더군요· 본래 의자라고 하면 칼날에 강한 기문병기이니 비무용으로 날을 뭉갠 도검에 약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청이 의자 쓰는 무인 왕 소협을 보았다·
특이한 무기 써서 기억에 남기를 선업이 삼인가 사인가 어쨌든 한 자리수는 되었던 것 같은데 무슨 짓을 했길래 갑자기 확 나쁜 놈이 되었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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