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30
무천각으로 돌아오자마자 청이 다급하게 옷부터 갈아입었다·
토시로 전신을 싸매고 나니 도저히 답답해서 버틸 수가 없다· 뜨거운 증기가 뿜어지는 좁은 방에 든 것처럼 혹은 한여름 두꺼운 인형 탈을 뒤집어쓴 것처럼 숨이 턱! 막히는 끔찍한 기분이라서·
“후아· 좀 살겠네·”
마의에 바람이 숭숭 들어오니 이제야 겨우 살 것 같은 기분이었다· 동시에 한 발짝 정도의 좁은 반경에 대기가 흐르는 모양이 눈으로 보지 않아도 피부로 생생했다·
꽁꽁 싸매 답답한 와중에 감각이 해방되고 나니 오히려 생생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아· 눈으로 안 봐도 사방이 보인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감각을 연 채로 지내다 보면 흐름 탐지의 범위도 점점 넓어진다고 했으니 지금이야 겨우 한 발짝 겨우 두 치 남짓한 공간에 그치지만 이후에는 그렇지 않으리라·
천유학이 말한 꼼수라는 표현이 무엇인지 새삼 깨닫는 청이었다·
일종의 체질 개선이라고 해야 하나·
서문수린의 교육이란 실전에 대한 감각을 이끌어 청의 전투 방식을 정립하고 또 다음 경지로 이끄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신투의 전승이란 무학보다 신묘한 능력을 쥐여주는 식이었다·
그야 일인전승으로 내려온 명맥이 느리고 정통적인 기술의 단련에 의지했다면 진작에 숨통이 끊어져 사라져버리고 말았을 테니까·
그러고 보니 유의 묘리에 대해서는 딱히 별 소득이 없지 않나?
애초에 그거 배우려고 한 것 같았는데·
정작 부드러워진 것은 관절뿐이었다·
청이 손목을 뒤로 꺾었다·
구십 도가 조금 넘게 꺾이는 손목과 완만하나 뒤로 더 휘는 손가락의 각 관절들·
반대 손으로 밀어 힘을 주면야 누구나 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고 한 손에 주는 힘만으로는 본래 할 수 없는 기예였다·
천유학은 아예 중지의 손톱이 팔뚝에 닿을 정도였으니 아직 분근착골을 겨우 두 번 받은 청은 아직 멀었다고 하겠다·
유류연련 그것도 빨리 채워야겠다·
어차피 이젠 뭐 지루하기나 하지·
대신 아파줄 기생체도 구했으니까·
그에 청이 가벼운 마음으로 제 스승에게 자길 고문해달라고 졸랐다·
“스승님 저 유류연련은 또 언제 해요? 내일 해주시면 안 돼요?”
천유학은 어이가 없었다·
저번에 말을 꺼낼 때만 해도 꺼리는 기색이 가득하니 덜덜 떨면서도 분명한 결심을 세운 모양으로 부탁을 했었더란다·
그런데 이게 웬걸·
이제는 무슨 용돈 조르는 투였다·
“계집애가 독하다 독해· 이제는 두려운 기색도 없고· 아니 버틸만하냐? 난 아직도 조져질 때 생각만 하면 오금이 저려·”
“에이 그 정도인가·”
“일단은 잠람단 건부터 해결하고 보자· 회복 기간에 놈이 나타나면 손가락만 빨고 있어야 할 거 아니냐?”
“그냥 빨리 해치웠으면 좋겠는데···”
“아니 왜 이리 조급하게 굴어?”
그야 당연히 조급하기 때문이다·
초절정의 경지는 아직 감도 안 잡히니까 다른 방식으로라도 벌충을 해야만 했다·
신투의 수련은 수련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신묘한 인체 개조 혹은 개발 시술이었으니 빨리빨리 끝내버리고 싶은 것이다·
“스승님 네? 빨리 끝내버리면 스승님도 편하고 저도 좋잖아요· 네?”
“역대 신투 중에 제발 조져달라고 아양을 떠는 놈 아니 년은 너밖엔 없을 거다·”
결국 천유학이 시약궁창 제조가 얼마나 힘든 일인줄 아느냐고 툴툴거리며 휙 몸을 날려 담을 넘었다·
그러고 나니 청도 죄송한 마음이 드는 것이 사실이었다· 이래서야 스승 부려먹는 꼴이 되기도 하고·
그래서 오늘밤에는 약탕 조제나 도와야지 하고 천유학의 돗자리를 딱 차지하고 누워 기다렸다·
일 각이나 지났을까? 이제 조금 잠이 오나 싶었는데 휙 흐르는 대기의 흐름으로 한 발짝 안에 날아드는 사람이 느껴졌다·
“얼씨구· 이젠 스승 자리를 훔쳐? 이거 아주 천성이 도둑년이네· 내가 제자 하나는 아주 야무지게 받았어·”
“헤헤· 스승님 도와드리려고 잠시 기다리고 있었는데요· 재료를 벌써 구하셨어요?”
“아니·”
천유학이 고개를 젓고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추종향 냄새가 아주 진동을 하네· 그 놈이 나타난 모양이다·”
—-
팔 강에 오른 여덟 명의 무인 중 무소속 출신이 두 명이나 되었다·
팔 강 진출자는 의자 쓰는 왕노필 소협과 지당권의 마영전 소협이었다·
사실 십육강쯤 되면 정파의 무인들도 다 명문에서 작정하고 키운 고수들이라서 감히 낭인 출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럼에도 낭인 출신의 무인이 둘이나 팔 강에 이름을 올린 원인은 그냥 대진표상의 행운 덕분이었다·
무소속 무인들끼리 붙은 경기가 둘이라서 두 명은 무조건 올라올 수밖에는·
어쨌거나 현 세대의 후기지수 중 여덟 명 안에 들었다는 뜻이었으니 낭인 출신 무인들에게는 내 일처럼 기쁜 경사였다·
그러니 십육 강 비무 이후 낭인 출신의 무인들끼리 모여 뒤풀이 자리를 가졌다·
팔 강 진출을 축하하고 그리고 겸사겸사 떨어진 사람들을 위로하는 자리였다·
그렇게 달아오른 좋은 분위기가 일시에 팍 식어버리고 말았으니 왕노필과 마영전이 찾아온 손님 있다고 잠시 나섰다가 그 약 뿌린 놈을 마주하고 돌아온 까닭이었다·
청이 천유학을 따라 중정반점에 들었을 때가 바로 그렇게 한참 어수선하게 분위기가 가라앉았을 때였다·
청이 그 꼴에 속으로 혀를 찼다·
기왕 뒷풀이면 좀 좋은데서 하지 구석진 자리에 장사 안 되는 심지어 반점이다·
요리점도 주점도 아닌 반점이었으니 사실 낭인의 주머니 사정이란 이 정도인 것이다·
그래도 나름 전세를 낸 모양이기는 해도·
청이 축 처진 분위기에 너스레를 떨었다·
“회식이면 나도 불러주지 어떻게 이렇게 쏙 빼놓고 여러분들끼리만 가기 있어요? 섭섭하네· 우리 낭인 출신들 사이가 그런 사이밖에는 안 되나?”
“아· 서문 소저· 그· 아무래도 자리가 좀 누추하다 보니···”
“누추하기는 뭘· 지붕 있고 요리해주는 사람 따로 있고 눈치 볼 것 같이 전세까지 냈으면 아주 잔칫집이지· 아· 왕 소협 마 소협 팔 강 진출 축하드려요·”
청이 그리 말하며 일단 술부터 한 잔 따라주었다·
심각한 안색이던 둘도 그에는 일단 잔을 받아 꿀꺽 삼켰다·
“다른 게 아니라 추종향이 열려서 와 봤어요· 그래서 그놈 만나신 거죠? 뭐라고 해요?”
“이걸 주고 가더이다·”
왕노필 소협이 또다른 목함을 내밀었다·
벌써 외관에서부터 화려하게 붉은 문양을 새긴 것이 누가 봐도 귀물이 든 보물상자였다·
청이 열어보니 또 새빨간 단약이 하나·
“뭐에요 또 잠란단을 주고 갔어요?”
“이번엔 영약이라고 했소· 부작용은 좀 있지만 십 년 치 내공을 더해줄 거라고·”
“영약을 주고 갔다구요? 돈도 안 받고? 영약을 떡하니 선물로요?”
청도 영약이 얼마나 귀한지는 안다·
“낭인 출신이 우승하면 얼마나 재미있겠느냐 나중에 신투가 준 영약을 먹었다고 밝혀달라 그런 소리를 하긴 했소만·”
“쯧·”
옆에 있던 천유학이 크게 혀를 찼다·
“어쨌든 추종향은 묻히신 거네요· 두 분 모두·”
천유학의 말로는 무인들에게 나눠준 추종향에 조금씩 차이를 두었다는 것이다·
추종향을 뿌리면 뿌린 이에게도 묻어날 수밖에는 없으니 여러 종류의 향이 동시에 나오는 놈을 쫓기 위해서라나·
결국 놈에게 두 종류의 향이 묻었으니 소기의 목적은 아주 훌륭하게 이뤘다·
“서문 소저의 말이 아니었다면 의심하지 않고 먹었겠지· 하지만 이제는 보통 음모가 아님을 알겠소· 세상에 얼마나 할 일 없는 인사가 낭인에게 영약까지 베푼단 말이오· 잠람단까지는 이해하겠지만·”
그에 무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청이 그에 짝짝 손뼉을 쳤다·
“자· 놈이 이제 막 떠났으니 제일 방심한 순간이 바로 지금 아닐까요? 다른 수작을 준비하기 전에 그래요 당장 오늘 밤에 조지면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에 무인들의 눈빛에 살기가 서렸다·
정파의 도련님 아가씨들과는 달리 낭인 출신이란 피를 보기를 일상으로 살아왔던 야인들인 것이다·
벌써 이러면 안 되는데· 싸우러 간다고 동네방네 자랑이라도 할 거야 뭐야·
그에 청이 분위기를 띄웠다·
“일단은 지금은 뒷풀이나 즐겨요· 주정 빼낼 줄 모르는 분은 안 계시죠? 그러면 오늘 아주 내가 제대로 쏜다·”
청은 벌기만 하고 쓰지를 않아서 전낭에 돈이 그득한 상태였다·
친구들은 청이 전낭을 쥐기만 해도 기겁을 하니 팽대산과 남궁신재는 여인이 돈을 쓰게 만드는 것이 사내의 수치라는 중원의 인식 때문이고 당난아는 청을 무슨 가난뱅이 혹은 거지쯤으로 여기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간만에 전낭을 풀어 요리점에서 요리를 공수하고 좋은 술 가져다가 부어라 마셔라 당연히 분위기가 붕붕 뜰 수밖에는·
작은 볼일으로 변소에 들어갔다 나오니 천유학이 혀를 쯧쯧 찼다·
“이 무슨 멍청한 계획이냐? 살다가 이리 멍청하게 쳐들어가자는 소린 처음 듣네·”
“뭐에요·”
“어차피 추종향도 묻혔겠다 며칠만 쫒아다니면 어떤 놈인지 어떤 수작인지 다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냐·”
“에이· 그야 그렇지만· 그런데 뭐· 사람이 욕심이 나면 실수도 하고 흔들리고 하는 거 아니겠어요? 다 같이 해결해서 묻으려면 허튼 생각 할 시간도 주지 말아야죠·”
청은 다른 것은 몰라도 제 안위 하나는 아주 끔찍하게 챙겼다·
본래 청의 계획이란 안 되면 도망친다는 전제부터 깔고 시작하는 것이다·
적의 위치가 특정되었고 언제라도 시간을 들여 염탐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적의 정체와 실력 등등을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은 채로 우르르 쳐들어간다?
알고 보면 꽤 멍청한 계획이었다·
왜냐하면 지피지기 너 자신을 알라 이후 적도 제발 좀 알라고 일갈한 손자는 그 일침 하나만으로 영원불멸의 절대 승리자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있다가 늦은 밤에 당장 쳐들어가자 무인들을 몰아친 이유가 따로 있었다
당장 한 명이라도 시야 밖으로 벗어나면 혹시나 뒤에 따르는 유혹에 넘어가는 즉 배신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잠람단이야 둘째치고 영약을 보고 욕심이 나지 않는 무인은 없는 법이므로 영약에 눈이 멀면 무슨 짓을 해도 이상하지 않다·
한 명만 입을 놀리면 다 같이 사람 영약 먹은 후레잡놈이 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아예 한데 모아서 뒤풀이랍시고 감시하다가 혹여나 유혹에 휘둘릴 시간을 주지 않고 끝장을 내겠다는 의도였다·
천유학이 쯧쯧 혀를 또 찼다·
“그래봐야 지금까지 일면식도 없고 네게 딱히 도움될 것도 없는 낭인들 아니냐? 그 놈들 도우려고 네가 왜 위험을 감수해?”
그래봐야 조져지는 인물은 수상한 잠람단 처먹은 낭인 출신들이지 청이 아니었다·
그러니 사실 제 일도 아니면서 위험을 무릅쓰고 고작 낭인들 체면이나 지켜주겠다는 제자의 꼴이 당연히 마음에 들지 않을 수밖에는·
천유학의 말에 못마땅함이 가득한 통에 청이 살살 애교를 떨었다·
“에이 그리고 아시잖아요· 저는 언제든 빼낼 수 있는 거· 능파미보 못 보셨어요? 사부님도 제가 작정하고 도망치면 아무도 못 잡는다고 하셨거든요? 심지어 스승님도 못 잡으실걸요?”
“끄응·”
천유학이 뭐라 잔소리를 하려다 말았다·
그리고 그게 또 사실이기도 해서·
계집애가 무슨 그리 신법에 능한지 단기 결전으로 단거리에서 붙잡으려면야 모를까 멀리멀리 누가 더 오래 도망치나 하는 초장거리 대결에서는 이미 천하제일인이나 마찬가지더라·
그렇게 밤이 늦도록 부어라 마셔라 아주 연회를 벌이다가 축시 정(새벽 두 시)이 되어서야 낭인들이 일제히 주정을 몰아냈다·
내공으로 술기운을 몰아내는 행위는 일류 무인쯤 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기예였다·
다만 함부로 쓰면 그럴 바에야 아예 술을 처먹지 말라고 욕도 처먹는다· 그렇기에 주의하며 눈치를 잘 봐야 하는 기술이기도 하다·
모인 무인이 스물이 넘다 보니 일시에 뿜어지는 주정으로 술안개가 낄 정도였다·
마침내 멀쩡한 정신으로 되돌아온 낭인 출신 무인들이 다시 눈빛에 살기를 띄웠다·
칼 팔아 먹고사는 낭인들 특유의 결전 전 마음잡이라고도 하겠다·
“그럼 갈까요?”
그에 왕노필이 스윽 끼어들었다·
“서문 소저· 어찌 이대로 그냥 가겠소? 본래 싸움 전에 한 마디 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 우리 낭인들인데 소저께서 한 마디 멋지게 해 주시면 좋겠소만·”
“에이 쑥쓰럽게····”
하지만 사실 출정 전의 연설은 꽤 중요한 의식이었다· 우리를 정의하여 결속을 다지고 적을 특정해 전의를 끌어올리는 일이라·
청이 뒷목을 긁적거리며 말을 골랐다·
“음· 낭인이란 말은 늑대처럼 홀로 떠돈다고 해서 낭인이라고 하죠? 그런데 본래 늑대는 짐승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의리로 무리생활을 한다고 해요· 그런데 우리가 바로 그렇지 않나요? 우리가 바로 가벼운 금전에도 피로 의리를 갚는 사람들이잖아요?”
푼돈에 칼 판다는 소리를 잘도 포장했다·
사실 이쪽이 청의 진짜 특기인 것이다·
요사스러운 아가리! 지옥의 주둥아리!
“오오!” “옳소!” “그렇지!”
그에 낭인들이 흥분하며 호응했다·
“고작 낭인이라고 겨우 낭인 출신이라고 아주 깔보면서 은혜라도 베푸는 척 이용해 먹으려는 새끼가 저기에 있잖아요? 우리가 그걸 두고 봐야겠어요? 아니죠? 어떻게 해야 해? 낭인의 방식으로 조져놔야지· 왜? 우리가 낭인이니까·”
“낭인이니까!”
“의리 그리고 칼· 그것이 낭인이니까·”
“의리!” “칼!” “낭인!”
아주 홀라당 넘어간 낭인들이 저마다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까지 살면서 이보다 더 마음 벅차오르는 웅변을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낭인으로 산 과거에 자부심까지 느껴지게 만드는 황홀한 언변이었다·
전의가 충만한 꼴을 확인한 청이 그에 마무리로 쐐기를 박았다·
“가요· 낭인에게는 낭인의 의리가 있다는 교훈을 칼로 새겨주자구요·”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