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31
잔뜩 고무된 무인들이 밤중을 가른다·
원리를 알 수 없는 동양의 신비로 추종향을 쫓는 천유학이었다· 나중에 청이 배워야 할 기예이기도 했다·
그러다 천유학이 마침내 도시 외진 바깥 으슥한 폐장원의 담벼락 앞에서 손가락을 세웠다·
“여기 있는 거예요?”
“그래· 음· 다른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만·”
청이 그에 눈을 감고 주변 소리에 집중했다· 인간을 초월한 청력으로 가만히 듣고 있으니 가까운 낭인 무사들의 숨소리 외엔 딱히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장원의 담을 끝에서 끝으로 재보고 살짝 뛰어올라 본채 하나 별채가 하나 아담한 구조를 확인하고는 다시 속삭였다·
“저는 여기 계신 분들하고 한 번에 담을 넘을게요· 혹시 모르니 지켜보시겠어요? 뭐 본인이나 아니면 숨어있던 공범 같은 놈들이 도망을 칠 수도 있으니·”
“흠· 내가 같이 가는 편이 낫지 않냐· 저 안에 뭐가 있을지 모르는데 어찌 널 혼자 보내겠냐·”
“저야 어차피 이 한몸 잘 빼잖아요· 속전속결이 생명인데 쥐새끼라도 새 봐요· 그리고 정 문제가 생겼다 싶으면 사부님께 도움을 청할 사람도 필요하고·”
“크흠· 부인께 괜한 걱정을 끼쳐드리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네·”
전대라면 모를까 아직 중년의 천유학이라 서문수린의 화려한 과거와 본성에 대해서는 모르는 상태였다·
심지어 전대가 제 부끄러운 역사를 감추려고 아예 함구를 해 버렸으니 오히려 서문수린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놈은 어디예요? 본채? 별채?”
“본채 사랑방이다·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빠져· 어차피 한미한 놈들한테 은혜를 베푼다고 멍청한 짓 하지 말고·”
중원의 낭인 취급이 이러한 것이다·
하지만 낭인 아니라 귀한 신분이라 해도 천유학이 하는 말이 다르지는 않았을 터다· 한미하건 귀하건 어쨌거나 내 제자를 건사하고 나서 볼 일이 아니겠는가·
“자 낭인 여러분· 저기 우리가 물어뜯을 적이 있대요· 본채 중앙 사랑방· 일단 저는 정면에서 들이칠 텐데 마 소협이 뒤에서 왕 소협은 우측에서···”
전략이랄 것도 없는 간단한 사방의 이치였다· 하지만 본래 세상은 여섯 방향뿐이니 사방에서 들이치면 벗어나기 위해서 땅으로 꺼지거나 하늘로 솟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청과 낭인들이 담을 넘었다·
겨우 창고 만한 별채 하나짜리 장원이라 버려져 잡초 우거진 마당도 넓지 않았다·
순식간에 가로질러 사랑방의 문을 뻥 차고 들어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의자에 앉은 노인이 한 명·
아닌 밤중에 호된 손님이 우르르 몰려왔음에도 전혀 당황한 기색이 없으니 이미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투였다·
그리고는 번쩍 안광을 빛내며 말하기를·
“흠· 밤중에-”
꽝· 순간 후방의 벽을 뚫고 한 떼의 낭인들이 우르르 밀어닥쳤다·
뒤를 점거하기로 한 마 소협 무리였다·
그에 노인이 흠· 하고 저는 입을 연 적이 없다는 듯이 안색을 태연히 하고는 또다시 안광을 번뜩였다·
“이 밤중에-”
그러자 꽝· 노인의 말을 끊으며 우측 벽을 뚫고 낭인들이 우르르 몰려들어와 좌우로 쭉 늘어서 칼을 겨눴다·
노인이 제 품으로 떨어진 돌조각을 툭툭 털어내고는 태연스레 다시 입을 열었다·
“사람이 말을 하면-”
꽝· 그리고 남은 왼쪽 벽이 마저 뚫리며 낭인 출신 무인들이 한 자리에 모여 둥글게 노인을 포위하고 섰다·
청이 생각했다·
아니 근데 손발 더럽게 안 맞네· 왜 한 번에 못 들이치고 시간 차로 꽝꽝거려?
“···”
“···”
“···”
노인이 무언가를 기다리듯 조용히 무게를 잡고 있다가 마침내 다 왔다는 사실을 확신한 듯이 겨우 본론을 꺼내들었다·
“크흠· 그래· 발칙한 것들이 감히 추종향을 묻히기에 찾아오겠다 싶었지·”
“엥·”
그에 청이 두 사람의 얼굴을 보았다·
“나름 은밀한 행사였다고 생각했소만·”
“크흠·”
그에 노인이 끌끌 웃음을 터뜨렸다·
“너희 낭인 놈들이 뭐 그렇지 않느냐· 뭐 제대로 하는 것들이 없지· 활혈단을 처먹고도 고작 어린애들 칼싸움을 이기질 못해서 겨우 두 놈이라니·”
“활혈단!” “활혈단!” “활혈단!”
그에 세 명 정도 동시에 소리쳤다·
그리고 아주 경악한 표정을 한 무인들도 여럿이었으므로 청이 생각하기에 음 아주 유명한 약이었나? 안 좋은 쪽으로?
“아니 노인네가 너무 여유가 넘치는 거 아닌가? 경지가 어떻게 되시길래 그렇게 막 여유로우세요? 막 현경 쯤 되고 그러시나·”
“크크 아주 재미있는 아해로구나· 노부는 경담간이라 한다· 그래 너희 정파 놈들이 지탄광마라 부른다지?”
“지탄광마!” “혈교의 악적!”
다만 청은 함께 외치지 못했는데 간만에 시야 한 구석에서 반짝이며 들여봐 달라고 발광을 떠는 임무창의 알림 때문이었다·
그래· 어쩐지 조용하다 했지·
가만히 놔두기도 정신이 사나워서 청이 마지못해 임무창을 띄웠다·
몇 번째 위기 어쩌고· 혈교 뭐뭐 끝에는 꼭꼭 천살성이 다 죽여라· 끝·
임무창이 요란하기만 하지 영양가가 전혀 없다는 사실은 이미 통달하고 있었다·
몰라· 내 맘대로 할 거야·
청이 임무창을 치워버렸다·
“음· 유명하신 분인가요? 우 소협 아시는 분이세요?”
“혈교의 마두라고····”
“그게 다예요?”
“미친 짓을 일삼는다고도 했고·”
“그야 별호가 광마니까 그렇겠죠·”
낭인들의 견문이야 그냥 이리저리 주워들어서 범위는 넓지만 그 깊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수준이었다·
지탄광마· 혈교의 나쁜 놈· 마공을 씀·
성질이 매우 고약하고 더러움· 끝·
사실상 혈교 하나만으로도 나쁜 놈에다 마공을 쓰고 성질이 고약하고 더러우니 그냥 혈교에 그런 이름이 있더라 한 번 들어본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제갈이현이 그리워지는 청이었다·
그러면 별호의 유래로부터 쓰는 무공에 경지가 어떻게 되는지 그리고 물어보지도 않은 관련된 일화까지 줄줄 꺼내 들 텐데·
경담간이 너무 태평한 데에다 혈교라고 하니 벌써부터 낭인들이 잔뜩 긴장해 침을 꿀떡꿀떡 삼키며 식은땀을 흘려댔다·
하지만 이만한 고수들이 모이면 마두 하나 상대하지 못할 것도 없지 않은가·
이러면 좋지 않은데·
청이 말로 분위기를 다잡았다·
“이봐요 노인네· 지금 상황 판단이 안 돼요? 지금 우리가 포위하고 있는 거 안 보여요? 낭인이라고 사람 무시해요? 낭인 주제에 얼마나 몰려와도 여유로우시다? 뭐 고수는 칼 맞아도 사나?”
해석은 이러했다·
이 새끼가 낭인 무시하지 않냐· 고수도 칼 맞으면 별거 없으니까 쫄지 좀 말고·
그에 낭인들의 기세가 다시 흉흉해졌다·
그러나 경담간은 태연히 끌끌 기분나쁜 웃음소리를 낼 뿐이었다·
“그래도 노부가 가는 길에 반절 이상은 함께 데려갈 수 있을 게다· 어떠냐 너희들 낭인이란 제 목숨 끔찍한 것들이 아닌· 음· 뭐냐· 아해야· 왜 자연스럽게 끼어 있지?”
“나도 낭인 출신이라서요?”
“신녀문 제자가 낭인 출신이었나· 그래· 그러면 아해도 알겠구나· 다 같이 덤비면 너희가 이길지도 모르겠다만 그렇게 될 것 같으냐?”
그에 청이 지지 않고 대답했다·
“낭인에게는 낭인의 의리가 있다!”
그에 의기충천 모처럼 가슴이 끓어오른 낭인들이 그에 화답했다·
“맞소!”
“낭인에게는 낭인의 의리가 있는 법!”
낭인들의 눈에 짙은 살기가 어렸다·
말로만 외치는 것이 아니라 이 순간 그 가슴 속이 정말로 불타오르는 것이었다·
“의리라· 그럼 이러면 어떠냐·”
경담간이 손가락을 탁 튕겼다·
“어억!” “끄으윽···!” “아악···!”
낭인들이 일시에 바닥을 굴렀다·
죄다 가슴팍을 쥐고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창백하니 억억 목 막힌 소리를 내는 것이다·
멀쩡한 사람은 청과 낭인 한 명이 전부였으니 경담간이 쯧쯧 혀를 찼다·
“그러게 모르는 사람이 주는 약을 의심도 없이 막 삼키면 쓰나· 안에 고독이라도 들었으면 어찌하려고·”
“고독?”
“고독이 뭔지도 모르느냐? 아해가 모르니 이 노부가 알려줘야겠지· 고독은 음· 그래· 기생충이란다· 주인의 명령에 따라서 독을 풀기도 하고·”
청이 그에 속으로 욕설을 삼켰다·
에이씨 무림에 아주 별게 다 있네·
원격 조종 기생충은 또 뭐야?
그런 게 도대체 어떻게 존재하는데?
무슨 초능력으로 막 정신파 쏴서 조종하고 막 그러나?
인제 보니 멀쩡한 한 명이 잠람단을 먹어본 적이 있다며 반쪽짜리를 남겨둔 그 무인이었다·
아 거기에 기생충을 심었구나·
“그래 아해야· 낭인의 의리라고 했느냐? 이대로 죽어가게 놔둘 셈이냐?”
“에이씨 치사한 늙은이· 그래 붙으면 될 거 아냐· 일 대 일· 됐지?”
청이 검을 겨누자 경담간이 고개를 저었다·
“흐흐 참고로 노부가 죽으면 고독들도 전부 죽어버린단다· 고독이 품고 있던 독은 일시에 터져나오겠지· 그러면 어찌 될 것 같으냐?”
“아니 씹 무슨 그렇게 편리한 능력이 다 있어?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는데요?”
“노부가 마음이 바뀌어서 빼 주거나 아니면 의원 불러다 배 째서 뽑아야지· 다만 배 째는 순간 바로 독을 뿜겠지만·”
“그러니까 사람 명줄 잡고 막 흔들겠다는 거?”
“클클 노부가 제일 좋아하는 일이란다· 그러니 네게도 한 마리 주마· 순순히 삼킨다면 이 쓸모없는 낭인 놈들도 살려주고· 그래 네 말대로 의리를 지켜볼 테냐? 아니면 죽도록 지켜볼 테냐·”
되도 않는 말장난을 치며 손을 펴 내미는데 그 위로 희뿌연 콩알 같은 것이 놓였다·
청이 집중해서 보니 반투명한 막 안으로 무언가 꿈틀거리는 것도 같고·
그러나 청도 벌레는 많이 먹어 봤다·
오히려 먹기 좋게 포장되어 있었으니 저 정도면 친절한 수준 아닌가 할 정도였다·
게다가 청은 온갖 벌레 먹으면서도 한 번도 뒤탈을 걱정해본 적이 없었다·
속에서 독을 뿜는다고?
그럼 그냥 훌륭한 단백질 아닌가?
청도 이제는 시혈독인이라는 체질에 대한 확신을 가진 상태다·
그냥 몸에 해로우면 몽땅 차단이었다·
편리하기로는 청의 신체도 아주 제멋대로 사기를 치는 능력이었다·
“하아 삼킬 테니 그만 괴롭혀요· 빨리· 이러다 숨 넘어가겠어·”
그에 순식간에 앓는 소리가 멎고 일시에 숨이 터지며 헉헉 가쁘게 고르는 소리만 요란했다·
“호오· 삼키겠다고? 이게 정녕 무슨 뜻인지 모르겠느냐? 네 남은 명줄이 온전히 이 노부에게 달린 것인데·”
“대신 여기 무인들의 고독은 빼 줘요· 내가 내가 대신할 테니까·”
청이 비장하게 말했다·
목소리는 아주 천하의 사기꾼이었다·
“소저 안 됩니다!”
“서문 소저···!”
비통한 목소리들이 청을 만류했다·
그런데 목소리의 숫자가 좀 적다?
쌍놈들 같으니·
낭인에게는 낭인의 의리가 있기는 개뿔·
그래도 저는 살아야겠다 뭐 이거지· 낭인 새끼들 의리가 뭐 그렇지·
사실 청도 그다지 기대는 안 했다·
“저는 괜찮아요· 저 하나로 여러분들이 무사할 수 있다면·”
“어째서 어째서 그렇게까지·”
“같은 낭인이잖아요? 의리· 말했죠?”
그에 낭인들이 부끄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의리라 말하는데 차라리 죽겠다고 말하지 못하는 자신이 부끄러워서·
“자· 이분들은 풀어줘요·”
“크크 노부가 어째서? 네가 그 정도의 가치가 있는 년이더냐? 그래봐야 면상을 가린 추녀 하나 가지자고 이 많은 놈들을 죄다 포기하라고? 그래서야 수지가-”
경담간의 말이 뚝 멎었다·
그야 갑자기 방 안이 환해지는 자체 발광 미모를 마주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말문이 막히는 것이다·
“도대체 얼굴 좀 가렸다고 왜 다들 난리인지 모르겠네· 자요· 됐죠· 시커먼 사내놈 스물보다는 미인 한 명이 낫지·”
그러자 경담간이 광소를 터뜨렸다·
광소는 미친 놈처럼 웃는다는 뜻이다·
“크흐흐흑! 아주 걸작이로구나! 그런데 어쩌나· 네가 삼키면 저 놈들을 살려준다고 했지 빼 준다고는 안 했는데·”
“쪼잔하게-”
“입은 살았구나· 노부의 제안은 그대로다· 네가 고독을 삼키면 이 낭인 놈들의 목숨만은 살려주고 아니면 죽는 거지·”
“에이 씨· 줘요·”
그에 고독 알 같은 것이 허공을 날았다·
곧장 낚아챈 청이 망설이지도 않고 곧장 꿀꺽 삼켰다·
그에 낭인들의 안타까운 탄식이 퍼졌다·
하지만 어차피 독 무서운 줄 모르는 청이었다· 다만 신경쓰이는 점이 하나·
독은 무효인데 얘는 어떻게 되지?
죽나 안 죽나?
죽지 말고 살아있어야 조종당하는 척을 하면서 뒷통수를 후드려 깔 텐데 하고·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11월 28일 추가·
신투가 서문수린의 정체를 모른다는 서술은 전대와 전전대가 함구하는 여류투사의 전설을 모른다는 뜻이었으나
문의하시는 독자님들이 많아 가독성 좋게 수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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