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73
황후가 청의 손을 꼬옥 붙잡았다·
청의 손이 마공으로 항상 차가워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척이나 뜨거워 데일 것만 같은 체온이 전해져온다·
“이리 너를 예전의 한창 아름답던 때의 모습으로 보니 참으로 꿈만 같구나· 그래 어미를 보았는데 할 말이 없느냐?”
“어 그게요·”
청이 데굴데굴 눈알을 굴렸다·
그에 황후가 인자하게 미소지었다·
“그래· 기탄없이 말하거라· 모녀간에 저어할 일이 무엇이란 말이냐·”
“그럼 이제 옷을 좀 입어도···”
“예끼· 어미 앞에서 부끄러울 것이 무에 있단 말이냐· 그래· 소할은 기억을 잃고 나서도 그 몸이 부끄러운 모양이로구나· 전에 항상 그리하였듯이···”
“소할···이요?”
“그래· 소할· 네가 잊어버린 이름이란다· 한자로는 이리 쓰지· 처음 보는 글자일 수도 있겠구나·”
황후가 청의 손바닥에 글자를 써 준다·
대단히 복잡하면서도 획이 많다는 정도는 알겠다·
소할 옥으로 조각한 아름다운 백설조 꾀꼬리라는 뜻이었다·
황족의 은혜는 이름에서부터 나오는 것으로 감히 평민이 같은 이름을 쓸 수 없는 황족의 이름이 흔해서는 순식간에 저도 모르는 사이에 대역죄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 황족들은 저 민초들을 배려하는 의미로 시중에서 거의 쓰이지 않는 특이한 글자를 모아 짓는 것이다·
“그건 그런데 옷부터 좀···”
“쯧쯧· 어미가 준 육신이 그리 부끄럽고 수치스럽니? 대저 젖무덤이 거대한 것은 천하를 품을 모성이요 엉덩이가 그리 큰 것은 다산으로 이로운 은혜로다만 어찌 공주는 매양 숨겨 감추려고만 하니·”
“아니 그게 아닌데요·”
청은 제 몸이 수치스럽지 않다·
가끔 동경을 보면 볼 때마다 감탄이 터져 나오는 늘 새롭고 짜릿한 아름다움이 거기에 있으니까·
지금이라면 일 년 열두 달 개울가에 자기 비친 모습만 바라보느라 어미 속을 터뜨려 놓았다던 저 외국의 신 나 씨도 이해할 수 있을 지경이었다·
그러니 수치스러워 감추는 것이 아니라 그냥 모르는 사람 앞에서 발가벗고 있는 일이 어색하고 민망할 뿐이었다·
갑자기 나타나 제 어미라고 주장하는 여인이 세상 애틋한 눈빛으로 아주 솜털 하나까지 제 기억에 새기겠다는 듯이 샅샅이 훑어보고 있는 와중이라면 더욱 더·
“그리 어색하니· 어미가 눈앞에 있는데도 애틋한 마음이 들지 않니? 이 어미는 대체 피가 무엇이라고 너라고 하는 가짜가 궁에 든 날부터 곧장 이상하다고 알아보았는데·”
사이한 요녀들이 이제 나은 딸이라고 데려온 여인은 몸은 판박이요 얼굴은 다소 상했으나 예전의 미모가 엿보이기는 한다·
하지만 어떠한 육감 혹은 피붙이만이 가지는 초월적인 능력 때문인지 계속 어색하고 기이하여 도무지 딸처럼 보이지가 않았더란다·
그러다 어느 날 공주의 시중을 드는 나인 하나가 말하기를 참으로 기이한 일이온데 가슴 밑의 쌍점이 번져 둘이 이어져 있더라고·
그 때에 정신이 번쩍 들고 동시에 아득하니 아 저 요사한 비구들이 사악한 수작질로 내 딸의 거죽을 뒤집어쓴 요물을 들여다 놓았구나 하고·
자식이 하나뿐이라면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요녀와 사생결단을 냈을 것이나 남은 자식이 화를 입을까 무서워 속으로만 앓다앓다 유난히 떠난 딸이 꿈에 아려 불공을 드리러 온 참이었다고·
그러다 도무지 소식이 없어 답답함에 마차의 들창을 열었다가 청의 모습을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문을 열고 나온 것이다·
동시에 다리에 힘이 하나도 들지 않으니 국모의 체면도 모르고 서둘러 내리다 철퍽 떨어져 내리고서도 아픔을 모르고 서둘러 딸의 모습을 쫓았다·
어려서부터 질색하고 감추려 들던 웅장한 가슴과 엉덩이 그리고 그 사이에 유난히 얇아서 똑 부러져버릴 것만 몸의 선으로도 알겠으나 무엇보다 병을 앓기 전에 세상 가장 곱던 얼굴이 그대로 박혀 있어서· 더 고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었기에·
아씨· 이걸 내가 왜 듣고 있지·
듣는 청의 마음만 점점 무거워졌다·
의도치 않은 신체 강탈 주인이 이미 죽은 상태였으니 강탈이라기보다는 인수인계? 버리고 간 거 줍기? 대충 시체 절도범쯤 되는 청이었다·
구구절절 피 끓는 사연에 점점 편치 않을 수밖에는·
청이 그래서 일단 화제를 돌려보았다·
“어 그런데 제가 방년인 건 맞나요? 사실 정확한 나이를 알지 못해서 우겼는데·”
“그럼· 어릴 때부터 유난히 쑥쑥 자라나더니 이미 열 살에 어미보다 더 크지 않았니· 내 이리 빠르게 떠나가려고 가기 전에 장성한 모습이라도 보여주려고 서둘러 자란 줄만 알았단다· 그러니 네가 앓을 때에 천하의 효녀 짓을 하려거든 오래 살아야지 어찌 어미보다 먼저 가려 드냐고 원망하지 않았겠니·”
자연스럽게 원상복귀가 되는 화제에 청이 음 괜히 불편한 신음을 삼키며 딴 생각이나 했다·
뭐야 그럼 여기 처음 왔을 때가· 지금이 오 년 차니까 열여섯 살이었다고?
그게 열여섯 살 음· 어쩐지 가슴이 더 커진 것 같더라니 한참 자랄 나이라서·
“그래 세상에 나와 어찌 살았니? 분명 그 요사한 비구들이 말하기로는 그래 그 마귀들이 전부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구나· 대법이 끝나면 무병장생은 물론이거니와 무재가 깨어 무술을 익히면 천하제일의 무인이 탄생할 것이라고 하는 즉· 네 성취가 태감마저 감탄한 지경이라니 그래도 바깥 세상에서 네 한 몸 지킬 수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 아니었느냐·”
“음· 그냥 대충 잘 살았어요·”
“예끼· 어미에게 낱낱이 고하지 못하니?”
아무리 그래도 거지들한테 몰매 맞기는 하루에 한 번 일어나는 당연한 일상이며 음식물 쓰레기 주워먹다가 안 되면 산천의 벌레 독버섯 나뭇잎 아무거나 막 뜯어먹고 그도 모자라면 물로 배를 채우면서 상거지 생활을 했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 처음에는 고생을 좀 했는데요 그래도 금방 적응을 했어요· 그러다가 사부님이 아 신녀문의 서문수린 도고라고 아세요 여인 중에 제일인인 분이신데 사부님이 거둬 주셔서 그 이후로는 잘 먹고 아주 잘 살았어요·”
“부처께서만 보우하신 것이 아니라 신선들께서도 도우셨구나· 참으로 감사한 일이야· 내 불공만을 드릴 것이 아니라 제사를 제사를 지내야 하겠구나·”
“어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으셔도···”
“아니야· 죽은 자식을 돌려보내주셨는데 어미가 못할 일이 무엇이랴· 그래 그리고 또 무슨 일이 있었느냐?”
“어 친구도 많이 사귀었구요 여기저기 여행도 많이 다녔어요· 아 혹시 화산이라고 아세요? 거기가 실은 화산이 그 화산이 아니었는데요···”
청이 적당히 장단에 맞춰 중원에서 보고 들은 명물들을 풀어놓았다·
고생한 이야기는 쏙 빼놓았기에 황후가 듣기에는 천하를 유람하며 참으로 편안히 지냈구나 하지 않을까 하고·
물론 그럴 리가 있나·
세상 물정 아예 모르는 규수 중의 규수가 어떤 고생을 했을지는 눈에 훤하니 애써 감추는 마음이 기특할 뿐이다·
“그래· 피리를 불 줄 안다 했니? 이 어미에게도 한 곡조 들려주지 않으련?”
“아· 네·”
청이 복신적을 붙들고 잠시 고민했다·
아직도 착의를 허락하지 않은 상태라서 민망천망하던 마음도 어째서인지 복신적을 들고 나니 조금 가라앉았다·
그런데 옷은 왜 못 입게 하는 건데?
중원 풍습에 자식 알몸 보면서 애틋한 뭐 그러한 이상한 사항이 있었나? 황족들만 하는 뭐 그런 풍습인가?
물론 그렇지는 않았다·
다만 황후에게는 괴질로 온몸이 썩어가던 딸의 육신만 뇌리에 남았으니 어디 한 군데 흉이라도 남지 않았나 살피는 어미의 마음이었다·
청이 뭘 불어드려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가 역시 어버이 사랑인가? 음 제목이 그게 맞던가? 생각해보니 제목을 굳이 기억하지 않았던 것도 같고·
그리하여 청이 속으로 가사를 되뇌이며 복신적의 아름다운 음색 듣는 이가 가히 천상의 소리라 하는 그 음률을 꺼내들었다·
낳으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제 밤낮으로 애쓰신 마음
참되거나 바르거라 가르쳐 주신
진자리 마른자리 어버이시다
아아아 고마워라 스···승의 은혜?
청이 일단 하던 연주는 계속했다·
연주는 계속되어야 하므로·
아아아 보답하리 스승의 은혜·
그러고 나니 도저히 모르겠는 것이·
뭐지? 어디서부터 미궁에 빠졌지?
후렴이 왜 스승이 되지? 이게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리고 고마워라? 그리워라? 아이 씨· 몰라· 확인할 방법도 없는데·
어차피 이 세상에 알아듣을 이는 없지만 민망해진 청이 다음 곡으로 곧장 이었다·
왜국의 조씨 아니 장차 미래에 왜국에서 태어날 조씨의 회전목마 그리고 가물가물 잘 기억도 안 나는 고향의 명곡들 몇 개를 쭉 이었다·
“어쩜 언제 이리도 장성하였는지· 물론 몸이야 진즉에 장성하였지마는···”
그에 황후가 또 눈물을 죽죽 흘렸다·
아씨· 마음 약해지게·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지·
청이 흔들리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아예 모르는 이라면 생판 남이라면 거짓으로라도 딸 행세에 어울려줄 수도 있다·
당장 우리 치매 걸린 할아범만 봐도 뭐·
하지만 황후에게는 그녀의 죽어버린 딸이 남긴 거죽을 뒤집어쓴 상태로는 그럴 수가 없다· 적어도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마음은 계속 흔들리는데·
할아범이랑 다를 바도 없지 않나?
하지만 시체 도둑이 그럴 자격이 있어?
결국 모질지 못한 채로 이리저리 장단을 맞춰주다 속절없이 시간만 매양 흘렀다·
그러한 청을 구원한 것은 청 자신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저녁 때 지났는데 밥을 안 넣어준다고 격렬하게 화를 내며 강맹한 으르렁거림으로 포효하는 빈 속이었다·
꼬르륵!!!(밥 내놔!!!)
“이런 내 딸 배가 고파서· 어미가 되서 제 딸이 굶는 것도 모르고· 이런·”
그리고는 또 눈물을 주르륵 흘리는데·
“아니에요· 원래 소리가 많이 우렁차서 그렇지 조금 출출한 정도인데요· 뭘·”
“아니 그게 아니다· 이렇게 하늘의 보우하심으로 다시 만났는데 딸하고 오붓하게 밥 한끼 먹질 못하는 내 신세가 서러워서 그럴 뿐이란다·”
“어 같이 식사하시면 되지 않을까요?”
그에 황후가 눈물 죽죽 흘리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니다· 황궁의 일이 보통이겠니· 이리 오래 붙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목이 쏠리는 일이니 어미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주책을 부렸구나· 어미야 어미라서 알아볼 수 있었다고 하면 좋겠다만 그게 아니라서 누군가 알아보면 네게 다시 화가 미칠지도 모르니 이쯤에서 헤어져야겠구나·”
“아· 네···”
이제 해방인가?
“그래· 내 딸· 걱정하지 말고 잘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입고 좋은 것만 먹으며 세상에서 가장 안온하게 기다리고 있으렴· 이 어미가 본래 네가 가졌어야 할 것들을 되찾아 줄 터이니·”
그리 말하는 황후의 눈빛이 그야말로 악독하기 그지없는 천하의 요녀가 따로 없는 수준이었다·
청이 깜짝 놀라 다급히 황후를 말렸다·
“아니 안 그러셔도 되는데요· 저는 이미 신녀문 제자 서문청으로 살기로 마음을 먹은 몸이라서-”
“그건 아니 될 말이란다· 천자의 피를 타고났다 함은 곧 천명 하늘의 뜻을 받드는 것이니 우리 딸이 피하려고 하면 오히려 큰 죄악이 되는 것이야· 어미된 이가 어찌 그 꼴을 보겠니·”
“아니 정말로 괜찮은데요· 지금도 엄청 잘 지내고 있구요· 그러니 마음 쓰지 마시고-”
“내 딸· 헤어지기 전에 안아보자· 안아보자꾸나·”
틀렸다· 도대체 말을 들어 먹질 않네·
괜한 짓이나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는데·
그러나 어떤 말을 해도 듣지 않으리라는 그러한 직감과 동시에 또 멀지 않은 미래에 이로 인해 귀찮은 일이 발생하고 말리라는 어떤 예감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뭐· 에라이· 몰라·
청이 설득을 포기하고 순순히 품으로 폭 파고들었다·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