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95
일개 상방을 지키기 위해 도시의 현승이 직접 나섰다·
현승이란 소도시급의 최고 책임자이자 낙녕 같은 성급 도시에서는 지현 아래 바로 위치한 이인자의 자리다·
그러니 이는 굉장히 체면을 구기는 일이기도 해서 다른 도시의 현승들이 들었다면 거 금은도 금은이지만 현승 체면도 생각을 해야지 그걸 직접 얼굴을 들이미냐고 혀를 쯧쯧 하고 침을 퉤 뱉을 만한 일이었다·
현승이 직접 행차한 값이야 이후에 장흥상방에게 아주 톡톡히 청구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청이 상단들에게 곡식을 사러 다녔던 고작 두어 시진만에 포졸들을 이끌고 나타났다는 점이 흥미롭다·
장흥상방의 위세를 짐작할 수 있는 일인 것이다·
물론 엉덩이 무거운 관에서 이렇게 부지런하게 움직이려면 한 가지 이유만으로는 도저히 동기 부여가 안 된다·
그러므로 관부의 이토록 기적과 같은 빠른 대응에도 여러 이유가 있었다·
일단 장흥상방의 방주가 진짜로 섬서성의 포정지휘사 즉 섬서성 최고 책임자와 호형호제하는 의형제 사이라는 점이 있겠다·
그러나 섬서성 포정지휘사는 섬서성의 포정지휘사고 여기는 하남 땅이었다·
상급자이기는 하나 굳이 말하자면 인맥의 계파가 다른 것이다·
장흥상방을 구원함으로서 섬서성 포정지휘사에게 빚을 지워두고 나중에 이득을 취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이인자를 직접 내려보내기에 조금 무게가 맞지 않는다고 하겠다·
그러니 관부 출동이라는 저울에 균형을 맞추기 위해 현승 출장비라는 막대한 금은 역시 반대쪽에 올라가 있는 것이고·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청이 구휼 사업을 제멋대로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본래 구휼이라 하면 먼저 관부에 알려서 공을 나누어야 하는 것이 관례가 아니던가·
그리고 구휼에 쓸 금자가 백 관이라 하면 개중 삼 할 삼십 관 정도는 지금까지 나랏일을 하느라 고생한 관리들에게 먼저 보답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국법에 정해지지 않은 암묵적인 예절이자 절차다·
그러니 구휼 소식을 들은 낙녕현의 최고 책임자 낙녕 지현이 노발대발 불을 토하며 당장 그 위아래 없이 버르장머리 없는 년을 잡아 오라고 날뛰었다·
본래 올바른 순서라면 청이 먼저 관아에 출두하여 공손히 인사를 드리고 마흔 관 중에 열 관은 마땅히 상급 관리들의 치세에 보은한 이후 관과 청의 이름을 동시에 앞세워(관이 앞이다) 구휼에 나섰어야 한다·
청이 들었다면 천살성 참기 일만 배 쯤 참기는 개뿔 내년 오늘이 낙녕 관리들 단체 제사를 지내는 날이라며 참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가만히 앉아서 오히려 금은을 처먹고 난 이후에 이름만 같이 올려서 선행을 베푼 척을 그것도 저네들이 앞장서서 한 것처럼 꾸며야 한다는 소리가 아닌가·
그러나 지현도 할 말이 있다·
관리가 지현까지 올라오기 위해 쓴 금은이 도대체 얼마이던가·
말단에서부터 시작해서 받은 뇌물이며 사사로이 챙긴 부정한 금전들에 집안 재산을 다 털어서 여기저기 다 바쳐대며 겨우겨우 장만한 관직이다·
그러니 적어도 본전은 찾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현승이야 직접 나서자니 면이 안 서기는 해도 이후에 장흥상방에게 한 몫 단단히 뜯어낼 수 있다는 생각에 방긋방긋 포졸을 몰아쳐 달려온 것이고·
이게 바로 중원 돌아가는 꼬라지였다·
다만 놀랍게도 이는 인류의 저마다 다른 문명의 발상지로부터 파생한 모든 문화권의 모든 역사상에서 동시에 벌어지는 일이다·
동서양와 과거 현재 미래를 가리지 않는 인류 보편적인 문화다 보니 어쩌면 인간 본성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청은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다·
내가 내 돈(아니다) 써서 수재민 좀 돕겠다는데 관부란 놈들이 돕지는 못할 망정 왜 방해나 처하고 있나 슬슬 짜증만 치밀 뿐이었다·
“안 비켜주실 건가요?”
“지금 네가 엄중한 국법을 어기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겠느냐!?”
“네? 제가요?”
“네가 곤궁한 처지의 양민들을 요사한 말로 꼬드겨 이리 모이게 만들지 않았느냔 말이다! 오라 네년의 의도가 아주 불순하니 사람을 모아 도적 무리처럼 상방을 습격해 재화를 뜯어낼 요량이 아니냐!”
“모여요? 누가 모여요?”
“모른 체를 할 셈이냐? 네년 뒤에-”
“와 씨· 깜짝이야· 다들 안녕하세요?”
청이 뒤를 돌아보고는 놀란 척을 했다·
그에 군중들이 어찌 대응해야 할지 몰라서 눈만 끔벅 끔벅·
“이봐요 현승 대인· 그렇게 길을 딱 막고 있으니까 다들 지나가지 못해 이렇게 곤란하게 서 계시잖아요· 여러분 그렇죠?”
그제야 군중들 중에 청의 의도를 알아챈 이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옳소!”
“현승 나리 지나가려는데 길이 막혀서 기다리고 있던 참일 뿐입니다요·”
“아이고 사람이 너무 많아서 빠지지도 못하겠네· 앞으로도 뒤로도 못 가니 어째·”
우리는 의도를 가지고 모인 게 아니다·
그냥 길 가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관부에서 길을 막았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서 있다고·
청이 그에 기세등등 어떠냐는 듯이 현승을 바라보았다·
“이 무슨 억지를····”
뻔뻔함도 이 정도면 얼굴에 철판을 둘렀는지 현철을 둘렀는지 아니면 얼굴 가죽이 전설상의 금강불괴에 이르렀는지 기가 막혀 도저히 말을 잇지 못하는 수준이다·
입만 뻐끔거리는 현승에게 청이 또다시 싱긋 피어오르는 미소로 곱게 물었다·
“현승 대인· 안 비켜주실 거예요?”
“그래· 그러니 너희놈들 모두 돌아가라·”
“에이 하는 수 없죠· 여러분 현승 대인께서 돌아가라 하시니 어쩔 수 없이 돌아갈 수밖에는 없겠네요·”
그와 함께 청의 손이 부드럽게 뻗는다·
동시에 데엥-! 하는 불가의 범종 소리가 너와 나 우리 모두에게 선명하게 널리널리 울려퍼진다·
동시에 청의 왼편 담벼락이 짓눌린 듯 꽈릉! 하고 무너져내리는 것이다·
천하의 신공 중 하나인 여래신장을 버티기엔 담벼락이 너무 연약했다고 하겠다·
청이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땅 하고 바닥을 찍으니 이젠 별 눈치도 안 보고 쓰는 천마군림보의 수법이다·
파천마기가 청의 발바닥으로부터 대지를 차고 암경으로 쭉 뻗어나가니 이미 무너진 담벼락 아래서 폭발하여 우르릉 나지막한 우레 소리와 함께 지축을 흔든다·
이미 무너진 담벼락에 땅가죽까지 출렁여 동심원을 그리니 좌우로 다시 우르르 벽이 쏟아져버리고 만다·
그리하여 커다란 짐마차라도 능히 드나들 만한 넓은 통로가 탁 트였다·
“자· 현승 대인· 현승 씩이나 되셔서는 겨우 일개 상방을 수호하느라 수고가 아주 많으세요· 현승 대인이 돌아가라고 하시니 돌아서 들어갈 수밖에는요· 소녀는 돌아서 들어가겠습니다·”
“아니! 돌아가라는게 그런 뜻이 아니라-”
“음· 뭐지? 날벌레 같은 게 시끄럽나?”
“네년! 방금 무어라고!”
그에 청이 히죽 웃는다·
미인의 표정이라고 상상할 수 없을 만치 사악하고 흉험한 미소다·
“현승 대인· 하루살이란 참으로 용감한 생물이 아닌가요? 사람이 손 한번 휘둘러서 쉽게 죽어버리는 하찮은 미물 주제에 해 질 녘 대기가 따뜻하게 달아오르면 길을 막고 저들끼리 뭉쳐 날아다니잖아요·”
이쯤 말하면 현승도 무슨 소리인지 안다·
그리고 손짓 한 번에 일 장 높이의 벽을 무너뜨리고 발구름 한 번에 또다시 와르르 무너지는 꼴을 눈으로 똑똑히 보지 않았나·
고수!
그것도 그냥 고수가 아니다·
-음· 그냥 죽여 버려야겠다·
나지막한 중얼거림이 현승의 귓가에 아주 크게 울려퍼졌다·
이는 전음이라고 하는 수법 정확히 말하자면 전음과 비슷한 수법이었다·
청이 아직 전음을 제대로 배우지 못해서 어설프게 전음을 흉내냈을 뿐이니까·
듣는 현승의 심장이 뚝 떨어졌다·
이 거리에서 어떻게 중얼거림이 들려온단 말인가· 혹시 위기감에 입 모양을 읽은 것인가·
이 와중에 청이 현승에게 손을 뻗는다·
현승이 대경실색 당장에 몸을 날려 바닥을 굴렀다·
아침까지 큰 비에 지금도 가랑비 내리는 대지는 온통 웅덩이와 진흙탕이다·
진창 위를 구르는 현승의 귓가에 도옹 매우 앙증맞은 종소리가 놀리듯이 스치고 지나갔다·
“어머 현승 대인 왜 갑자기 혼자 넘어지고 그러세요? 굉장히 격렬하게 넘어지시던데?”
“그 네년이-”
“아· 현승 대인· 오늘 소녀가 실례를 범한 것 같아 마음이 쓰리는데 혹여 사시는 집을 알려주시겠어요? 소녀가 이후 몰래 혼자 조용히 찾아뵙고 사죄를 드리려고 하는데·”
현승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몰래· 혼자· 조용히·
자다가 칼 들고 찾아오면 현승이고 뭐고 관직이 목숨을 지켜주지 않는다·
그제야 현승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오르는 다섯 글자가 있었으니 관무불가침!
애초에 관무불가침이란 관리들이 칼 들고 날아다니는 살인마들에게서 저를 보호하기 위해 쓰는 말이다·
왜냐하면 무림인들이 두려워하는 대상은 관부가 아니라 황궁이며 황궁이 가진 수만 문의 화포였다·
황궁은 관부이나 관부는 곧 황궁이 될 수 없으니 무림인이 작정하고 죽이려 들면 그 범인조차 알아낼 수가 없는 것이다·
실제로 무림인은 수틀리면 관리를 팬다·
하지만 정작 관리에게 당하는 무림인은 무공 흉내나 내는 뜨내기 낭인들 시골의 작은 무관 정도 그치는 것이다·
그 천자마저 과거 절대 고수의 방문으로 멱살 잡힌 채 황궁 꼭대기에 매달렸다고 하는 판이니·
아이고 제대로 고수에게 걸렸구나·
고수에게 개겨서 무슨 영광을 보겠다고·
현승이 맹렬한 후회를 되새겼다·
물론 후회만 하지는 않았다·
“아니! 아니오! 아닙니다! 길이 좀 미끄러워서 아니 도로 상태가 이게 대체 뭔가! 배수가 안 되고 있지 않나! 크흠·”
참고로 중원의 배수란 긴 비 앞에 달리 방도가 없는 것이다·
그만큼 궁색한 변명이었다·
“그럼 소녀는 이만 들어가도 될까요?”
“물론이오· 어서 빨리 들어 아니 돌아가시오·”
들어가라는데 어째· 들어가야지·
그리하여 청이 따각따각 무너진 담벼락 안쪽 장흥상방의 장원으로 향했다·
그 뒤를 따라서 군중들이 또 우르르·
“이거 이래도 괜찮나?”
“아이고 이 사람아· 현승 나리께서도 괜찮다고 하시지 않았나?”
몇몇 우려를 표하는 이도 있었지만 이미 현승과 진을 친 포졸 무리를 물리친 이후라서 군중들의 사기가 하늘을 찔렀다·
그리하여 장흥상방·
대문이 아니라 벽을 뚫고 들어올지는 몰랐는지 상방의 하인들이 저마다 몰려나와 이러시면 안 된다고 애원하며 앞을 막았다·
물론 청의 뒤로 몰려든 군중의 숫자가 월등히 많았으므로 애원하며 뒤로 연신 물러나기만 할 뿐이었지만·
그렇게 쭉쭉 밀고들어가는데 아니 뭐야· 도대체 장원이 얼마나 넓은 건데?
하인들로는 저지가 안 되니 다음으로는 일련의 무인들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사실 이쪽으로도 이미 상방을 돌며 여러 번 격파해낸 청이 아니었던가·
심지어 이번에는 굳이 청이 따로 혓바닥을 놀릴 필요도 없었으니·
“서문 소저 오랜만입니다· 기억하십니까? 낙녕무관의 일 대 제자 소주항입니다· 용봉지회에서 인사를 드렸었지요·”
얘는 뭔데 아는 척이지·
하지만 청도 이제는 어엿한 정파 무인이었으니 이 아는 척에 님은 누구세요 하고 되물을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다·
“아! 소 소협! 오랜만이에요! 떠나실 때 인사를 드리지 못해 아쉬웠는데 이리 다시 만나니 참으로 기꺼운 일이로군요!”
뉘신지는 모르겠지만·
청이 잔뜩 반가운 척을 해주었다·
이것이 바로 체면을 세워주는 정파 무림의 정이기 때문이다·
소주항 역시 그를 이해하고 있기에 조금 멋쩍은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이로써 천화검과 아는 사이라고 잔뜩 허풍을 쳐 댔던 그간의 주장이 사실로 둔갑하는 순간이었다·
청의 배려에 한없이 감사를 느끼는 순간이기도 했고·
장흥상방 낙녕지부는 다른 낙녕의 상방들과는 규모부터 다른 거대 상방이다·
그러니 초청하여 대접하는 무인들 또한 낙녕의 최고 무관인 낙녕무관의 제자들로 채워놓은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역효과가 났다·
그래도 도시를 대표하는 무관이라면 무림대회에 참가하여 안면도 트고 인맥도 쌓고 하니 소주항은 내내 개방된 용봉지회에 죽돌이로 눌러앉았던 것이다·
“안 그래도 낙녕무관에 먼처 찾아가 관주님께 인사를 드리려고 했는데 도시에 큰 재액이 닥친 꼴에 소녀가 마음이 급해 경황도 없이 잊어버리고 말았답니다· 관주님께서도 안녕하시지요?”
“아· 물론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못다 한 환담을 나누고 싶지만 소녀가 지금 장흥상방의 지부장께 구휼 사업에 도움을 청하고자 가는 길이라서요· 실례지만 지나가도 괜찮을까요?”
“그야 물론 물론입니다!”
그리하여 낙녕무관 물리쳤다!
그렇게 낙녕무관의 무인들을 지나쳐 또 따각따각 제일 큰 건물을 향해서 쭉쭉 뻗어나가고 있자니 또다시 앞을 가로막는 사람이 등장했다·
중후한 인상의 노인이다·
벌써부터 내기를 끌어올려 기세를 양껏 피워올리는데 그로 인한 존재감이 보통이 아닌 것이다·
청이 그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뭐야 초절정? 아니 화경?
아니 무슨 가는 데마다 왜 자꾸 고수가 튀어나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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