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96
장흥상방 낙녕 지부장 최양수는 안절부절 아주 가시방석에 앉은 듯 중원식의 표현으로는 통나무 침상에 누운 듯이 불편할 뿐이었다·
중원의 소식이 느리다고 한들 상방 거리 장원들이 밀집한 동네에서조차 느리겠는가·
게다가 상인이란 족속은 기본적으로 귀를 활짝 열어 돈 될 만한 일이 없나 촉각을 세우는 치들이다·
안 그래도 십여 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기회다·
곡식이 그대로 황금으로 돌변하는 때가 찾아오지 않았는가·
이런 절호의 기회에 연쇄구휼마가 상방들을 차례차례 쓰러뜨리며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당연히 좌불안석 앉아서 편치 않아 이래저래 불안할 수밖에는·
그래도 나름 많은 준비를 하기는 했다·
낙녕 땅의 고만고만한 상방들과는 달리 대 장흥상방 섬서성 제일 상방으로 천하에 이름을 알린 거상인 것이다·
그러니 여타 구멍가게들과 달리 관부와의 인연부터가 끈끈하기 그지없으니 무려 낙녕 현승께서 직접 포졸을 이끌고 대문을 막아주시기로 한 것이다·
“지부장님!”
“그래 돌아갔냐? 그년 돌아갔냐고!”
“그것이 장원 안으로 들이쳤다고-”
“아니! 어떻게!? 현승 나리께서 입구를 지켜주시기로 약조하셨는데!?”
“현승 대인께서는 지금도 입구를 지키고 계니다만 그년이 담을 무너뜨리고 들어오는 바람에···”
지부장의 복장이 터져나갔다·
담벼락을 무너뜨리고 들어오다니 진짜로 도적떼나 할 일이 아니던가·
아니 도적떼도 담벼락을 무너뜨리지는 않는 법이니 입구를 뚫거나 담을 넘지 아예 벽을 깨부수고 쳐들어오지는 않는 법이다·
“그게 말이 잠깐 현승 대인께서 입구를 지키고 계신다고? 아직도?”
“예· 약조한 대로 계속 입구를 지켜주겠다 하시는 바람에···”
지부장의 복장이 두 배로 터져나갔다·
입구를 지켜달라 부탁을 드렸더니 정작 도적떼가 안으로 침입한 지금에서도 입구만 지키고 있다는 소리가 아닌가·
어쨌거나 부탁은 들어줬으니 계산은 엄격하게 치르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정작 막아달라는 도적은 구경이나 하고서 입구 지킨 값을 당당하게 청구하는 수작질이니 관부 놈들과는 상종하지 말라는 상인들의 오랜 잠언이 괜히 내려왔겠는가·
지부장이 타는 가슴만 땅땅 두드리고 있으니 부하가 지부장을 위로한다·
“그래도 낙녕무관의 일대제자들을 죄다 불러모으지 않았습니까· 낙녕 땅에서 낙녕무관을 무시하지는 못할 겁니다·”
“지부장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른 직원이 급히 들이친다·
지부장이 직원의 표정을 보자마자 듣지 않아도 그 내용을 들은 것과 같았다·
“하아· 왜 도적떼들이 그냥 통과했어?”
“그· 원래 아는 사이였던 것 같습니다·”
“뭐· 이런 촌동네 무관이야· 애초에 별반 기대도 안 했다· 조금만 명성 있는 인사가 들르면 꼬리나 흔들 줄 알지·”
그래도 낙녕 땅에서 장사하려면 낙녕무관에 금은을 안겨주는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었으니 애초에 낙녕제일무관의 위세나 좀 빌렸을 뿐이었다·
오히려 믿는 바는 따로 있었으니·
“어르신께선?”
“지금쯤 그년과 마주하고 계실 겁니다·”
“그래· 어르신께서 나서 주시면야·”
어르신께서는 무려 화경의 고수 전 중원 천하에 이름을 널리 알린 절세 고수이시니·
그런 건방지고 사악하며 무도하고 무식한 어린 계집년 하나야 상대도 안 된다·
지부장의 표정이 편안해졌다·
중원에 만인지적이라는 말이 있다·
한 사람이 만 명을 상대한다는 뜻으로 본래는 그 유명한 중원 최고이자 전무후무한 전쟁 기계 항우장사를 말하는 것이다·
항우는 그저 일신의 무력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전략과 전술로도 궁극에 이른 진짜배기 전쟁의 신이었던 것이다·
눈치가 좀 심각하게 없고 뭐든지 전쟁을 통해 해결하려 들다가 망해버렸을 뿐·
어쨌거나 지금이 딱 만인지적이라는 말이 떠오르는 그러한 상황이라고 하겠다·
한 명의 절대 고수가 내뿜는 기세에 잔뜩 고무되었던 군중들의 열기도 바람 앞의 촛불처럼 훅 꺼져버리고 만 것이다·
청이 일단은 노고수의 얼굴을 유심히 보아 떠오르는 숫자를 살폈으니 딱히 선인도 아니지만 악인이라고 할 정도도 아니다·
청은 본래 사람에게 친절한 편이다·
악업이 높은 생물은 애초에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청은 사람에게만은 항상 친절한 편이었다·
첫인상이 매우 싸가지없거나 하지 않는 이상에야 기본적인 예의부터 차릴 줄 아는 중세의 얼마 되지 않는 교양인이다·
청이 손을 모으고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소녀는 서문청이라 합니다· 어르신의 함자를 여쭈어도 될까요?”
공손하기 짝이 없는 태도에 노인의 기세가 조금 누그러들었다·
“본노는 유라달이라 한다·”
그에 흐읍 하고 공기 들이마시는 소리·
유명한 사람인가? 나는 모르는데····
하지만 모르면 모르는 대로 방도가 있다·
청이 함께 숨을 들이마시다 때에 맞추어 공기를 뿜어냈다·
“유라달!” “천하오랑!” “구절낭인!”
대충 모르겠으면 이름만 외쳐도 아는 척은 할 수 있다고 하겠다·
유명한 이는 알아봐 주어야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니 청이 당최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아는 척을 해 보았다·
초절정 끝물인가 화경 이상인가 조금 긴가민가하긴 했는데 반응을 보니 화경이 맞나 보다 하고·
청은 몰라도 구절낭인 유라달이라 하면 본래 대단히 유명한 인사이기는 하다·
실력보다는 그 출신 때문으로 별호에서부터 나오기를 떠돌이 낭인인 것이다·
천하오랑이라고 하면 낭인 중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다섯 명을 말하니 개중 말석이라고 해도 중원 떠돌이 중 다섯 번째로 꼽힌다는 뜻이다·
그러나 청은 모른다·
아는 것이라고는 노인네가 다들 이름을 알 정도로 유명한 고수라는 정도다·
그나마도 방금 알아낸 사실이었다·
그리고 악업이 삼십육 점·
칼잡이 치고 삼십육이면 대단히 양호하다 하겠으니 나쁜 노인네는 아니라는 정도·
그렇기에 청이 먼저 대화를 아가리질을 시도해 보았다·
“어르신 지금 도시에 크나큰 재난이-”
“그만· 본노는 그러한 일은 모른다·”
저도 모르게 청의 지옥 아가리를 사전에 차단하는 큰 쾌거를 이룬 유라달이 그 뒤로 말을 이었다·
“너도 알겠지만 본노는 낭인이다· 낭인이라 하면 대가를 주고 쓰는 칼이지· 하면 칼이 사람을 가리더냐? 본노는 이미 대가를 톡톡히 받았으니 그저 손에 들려 휘둘리는 칼일 뿐이다·”
딱 늙은 낭인이 할 법한 소리였다·
낭인으로 오래 살았기에 할 수 있는 자부심 가득한 소리이기도 했다·
“내게 아무도 통과시키지 말아달라 부탁을 받았으니 본노는 그리 할 것이다· 네가 정 지나가고자 하면 무인의 방식으로 해결해야 할 일이 아니냐·”
그러면서 허리에 찬 검자루를 잡아 촤악 잡아 빼는데 뭐가 끝도 없이 차르르륵 계속해서 끌려나온다·
그리하여 바닥에 와르르 쏟아진 것들이 아홉 철봉을 이어낸 철편 구절편이라 하는 기문병기였다·
유라달을 구절낭인이라 불리게 만든 독문병기이기도 했다·
무인은 무인의 방식으로·
물론 옳은 말씀이십니다만·
청이 황당함에 되물었다·
“어르신? 이미 화경의 경지를 넘지 않으셨나요? 보통 열 수를 양보해 주신다거나 그렇게 말씀을 해 주실 것 같았는데요·”
“크크· 본노가 날 때부터 화경이었더냐? 오래 살아남아 늙었다는 이유로 굳이 불리함을 감수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이냐·”
“네····”
낭인이라서 그런가?
맞는 말이긴 한데 어쩐지 치사하기 짝이 없다는 그런 생각도 들고·
사실 굳이 자신이 있냐 없느냐를 물으면 당연히 자신이 있다·
절정 때도 잡았는데 초절정에 이름 지금에서야 못 잡을 것도 없지 않나 하고·
물론 그때 화경이 무슨무슨 대법을 받아 돌덩이같이 단단하면서도 한참 느리다던가 뭐 그랬던 것도 같지만·
이제 나도 강기 쓴다 이거야·
청이 척 포권을 하며 말했다·
“무림말학 신녀문 외문제자 서문청이 어르신께 배움을 청합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로 대접을 해 드려야 구절낭인 어르신 정도 되는 고수분을 식객으로 모실 수 있습니까?”
한결 편안해진 지부장에게 부하가 문득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본래 상인들의 기질이란 용의 꼬리보다는 뱀의 머리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이다·
남의 아래서 일하기보다는 언젠가 독립해 작은 상방이라도 하나 차리기를 원한다·
물론 가장 좋은 상황은 남의 아래서 일을 하다가 역으로 잡아먹는 그림이지만 장흥상방쯤 되는 초거대 상방에게야 씨알도 안 먹히는 일이 아니겠나·
그러니 남의 아래서 일을 할 때에 최대한 상리를 배워두어야 하니 화경의 고수를 부려먹으려면 돈을 얼마나 써야 하냐는 그런 질문이었다·
“천하에 알려진 고수를 모시려면 금은으로는 어림도 없지· 어딜 가도 금은이 굴러들어오는 고수가 굳이 금전이 아쉽겠냐?”
“그럼 어르신께서는 어찌···?”
“크흠· 인의지· 인의· 예전에 상방으로 한 여인이 아픈 아이를 안고 찾아와 말하기를 이 아이가 구절낭인의 핏줄이니 낫게 해 주면 큰 은혜를 지울 수 있을 것이라고 당돌하게 이야기를 했다던가·”
“아니 그렇게 복이 스스로 알아서 굴러들어왔단 말입니까?”
“하지만 굴러들어온 복을 잡는 것이 능력이지· 크흠·”
지부장이 눈치를 보더니 목소리를 바짝 낮추어 뒷말을 이었다·
“누더기를 걸친 창기가 대뜸 찾아와서는 제 아이가 절세고수의 자식이라는데 자네 같으면 순순히 그렇군 하고 치료를 해 주겠나? 심지어 모르는 이도 아냐· 문지기도 알아보는 싸구려 창기였단 말일세·”
“음· 그래도 치료비가 얼마나 한다고· 그 푼돈으로 절세고수를 부릴 수 있다면 무척 남는 장사가 아닙니까?”
“쯧쯧· 자네가 이미 들었으니 그렇게 말하지 훤히 얼굴 아는 창녀가 찾아와서는 제 딸내미가 실은 절세 고수의 핏줄이라고 우기면 그걸 믿나? 상방에 찾아오는 사기꾼이 한둘이야? 돈푼 안 든다고 그걸 다 받아줄 테야? 자선 사업 해? 장사 안 할 거야?”
아이가 아픈데 방도가 없으면 어미라는 것들은 남을 속이는 데에도 주저가 없다·
안 그래도 상방에는 온갖 종류의 사기꾼이 찾아온다·
좋은 약을 연단했다는 약장수들로부터 가문의 가보를 팔려고 왔다느니 혹은 좋은 사업 거리가 있다느니·
금맥을 찾았다면서 자금을 요구하는 탐광자들은 또 어떠한가·
장보도를 입수했는데 능력이 없어 팔려고 왔다는 사기꾼들은 한 달에 한 명씩은 꼭 찾아오는 판이다·
“그러니 거짓과 참을 가려내는 방주님의 혜안이 빛을 발한 것이지· 아니면·”
아니면 어차피 거짓이라 해도 아픈 것이 계집아이라서 나중에 충분히 회수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거나·
지부장이 뒷말은 꿀꺽 삼켰다·
어쨌거나 그 이후에 구절낭인이 장안에 모습을 드러낸 때가 있어서 딸내미 호소인을 만나보고는·
부성의 본능이 있었는지 혹 달리 알아볼 방도가 있었는지 아니면 그냥 말년에 적적해서 딸 삼기로 했는지는 모르지만 호소인 딱지 떼고 진짜 딸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나서 유라달이 말하기를-
‘본노가 멍청하여 제 피붙이가 있음에도 알지 못하고 그도 모자라서 고작 하찮은 열병에 영영 잃은 줄도 모를 뻔 하였구나· 내 딸아이의 목숨값을 선금으로 받았으니 낭인으로서 계속 갚아나갈 뿐이다·’
-라고 하셨다나·
“오오· 멋진 이야기입니다·”
“그렇지? 게다가 그렇게 식객으로 상방에 눌러앉아 계신 지가 벌써 오 년이 넘었다· 그럼에도 아직 따님의 목숨값이 남았다고 하시니 방주님의 공덕이 부러울 뿐이지·”
그래서 지부장도 어느 정도 마음을 놓은 것이다·
자식 살려준 은혜를 설마 저버리겠냐고·
유라달이 멈칫했다·
“잠깐· 신녀문이라고? 신녀문의 제자가 어찌 홀로 막 돌아다녀? 한 번 입문하면 아예 속세와 연을 끊고 내려오지 않는 신비 문파가 아니더냐?”
“소녀는 그저 서문수린 도고를 스승으로 모셨을 뿐 신녀문에 적을 올리지 않았으니 그러합니다만 그 아니더라도 스스로 한 몸 지킬 수 있는 제자라면 허락을 받아 하산할 수도 있답니다·”
신녀문이 막 폐쇄적인 문파는 아니었다·
일 대 제자쯤 되면 그냥 외출하고 싶을 때 허락을 구하고 외출하면 된다·
신녀문 제자가 간혹 사내와 눈이 맞아서 이름을 내리는 일이 어째서 발생하겠는가·
금남의 성지 신녀봉에서 사내를 만날수는 없으니 다 밖에 놀러 나갔다가 눈도 맞고 입도 맞고 배도 맞고 하는 거지·
유라달의 표정이 더욱 굳었다·
“잠깐· 방금· 네가 서문 선배님의 직전 제자라고?”
직전 제자란 스승이 제자로 거두되 사문과는 거리를 두는 형태의 제자를 말했다·
당연히 사문의 절기를 가르쳐서도 안 된다·
모종의 이유로 사문에 들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거뒀다는 뜻이니 직전 제자들은 대개 스승과 유달리 돈독한 편이기도 했다·
다른 특이한 제자의 종류로는 적전 제자와 기명 제자가 있다·
적전 제자는 스승의 모든 것을 온전히 물려주는 후계자를 말한다·
그와 반대로 기명 제자는 사이비다·
제자에게 스승의 이름만 빌려준다·
그게 무어냐 하겠지만 불가나 도가의 문파에는 기부로 들어가서 반 년 일 년 기본공만 배우고 도명 혹은 법명을 받아 내려오는 경우가 흔했다·
청이 들었다면 와 사찰 숙박! 하고 서양 말을 내뱉었을 터이니 사실 그 개념과도 얼추 다르지 않은 형태기는 했다·
어쨌거나 서문 선배님 이라는 말에 청이 눈을 동그렇게 떴다·
아니 여기서 인맥의 예감이?
“앗· 사부님하고 아는 사이세요?”
“크흠· 아니· 그 말을 먼저 했어야지·”
유라달이 그리 말하며 멋들어진 자세로 척 구절편을 휘두르니 용케도 그렇게 긴 병기가 차르르륵 감겨 허리춤에 딱 수납이 되더니 손잡이만 남는 것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새해가 밝았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다사다난했던 일 년이었습니다만 그래도 이렇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 연말부터는 즐거운 마음으로 시간 가는 줄을 몰랐네요·
항상 감사합니다· 감사하십시오· 땡큐·
여러분! 24년 올해에는 하는 일마다 승리 또 승리하시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새해에 독자 제현 여러분 모두 건승 건승천하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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