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17
“할아범 벌써 가요? 점심 같이 먹지·”
“어차피 너도 떠날 참이 아니냐· 어차피 자귀에서 또 보면 그만이니 어울리지 않게 청승은 그만 떨고·”
청은 점심 먹고 종남파에 들렀다가 이미 시간이 너무 지체된 것 같아 곧장 호북 땅으로 향할 예정이다·
도중에 무당파 들렀다가 집에 가려고·
최리옹은 출신 때문에 종남파에 들르기는 부담스러우니 대신 장흥상방의 아가씨를 낙녕 땅에 가져다 놓기로 했다·
낙녕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던가·
애비 어깨 위에 아들을 매달아 놓고 돌을 던지던 아주 창의적으로 독한 사람들이다·
거기에 도시의 원수를 던져놓으면 도대체 어떤 고초를 겪을지 도저히 상상할 수조차 없다·
확실한 사실은 오히려 지금 죽여주는 편이 훨씬 자비로운 일이라는 것·
하지만 굳이?
자비를 베풀 이유는 없으니 알아서 고통스럽게 죽어가지 않을까· 하고·
설가놈 현 설가련은 서안에서 하는 일이 있어서 마치고서야 돌아갈 것 같다고·
“음· 설가놈· 그 혹시 여장에 취미를 붙였어요? 물론 나는 취미를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 모처럼 예뻐졌으니까 뭐 여장도 하고 싶어지고 그럴 수 있지·”
그에 설가련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진다·
“그런 취미는 없네·”
“에이· 그런 것치고는·”
청이 설가련의 가슴팍을 손가락질했다·
뭘 넣어놔서 볼록하게 튀어나온 상태다·
여인 옷 입고 가슴팍에다가는 가짜 가슴 넣어놨으니 누가 봐도 선이 진한 늠름한 미인이 여기에 있었다·
“하는 일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아니· 무슨 일을 하는데 여장을 해요?”
“미인계라네· 사업을 하다 보면 궂은일도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법이 아니겠나·”
“그렇게 당당하게 밝힐 만한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청이 떫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저 꼴을 하고 사내에게 아양을 떨고 있다 그 말 아닌가?
천하의 설가놈 즉 섬서성 제일의 지성이 하기에는 너무 뭐랄까 잘 어울리니 하찮은 건 아닌데 쫌 음 머리가 아깝다?
“그럼 막 애교도 떨고 그래요? 보여줄 수 있어요?”
“미인계란 자고로 대상이 애걸복걸 아주 매달리도록 만들어야 하는 일이 아니겠나· 여인이 먼저 아양을 떨며 치대면 사내놈은 금방 질려서 흥미를 잃고 떨어져 나가는 법이라네·”
“아· 차갑고 도도한 여인이시다?”
“그런 흉내를 내고 있기는 하지·”
어쩐지 할 일이 있다면서 자주 자리를 비우더니만 그동안 아주 사내놈의 애간장을 팍팍 태우고 있었던 모양·
이 재미있는 일을 이제야 알다니!
밥 먹고 나면 헤어져야 하는데!
어떻게 이런 재미있는 소리를 이제서야 해 주는 건데!
청이 아주 크나큰 배신감을 느꼈다·
“그걸 왜 이제야 말해요? 알았으면 내가 진작에 구경을 갔을 거 아냐·”
“그래서 안 했네·”
“당당하게 밝혀놓고는 부끄러우시다?”
“그런 건 아닐세· 다만 한참 계략을 펼치고 있는 와중에 자네가 얼굴을 비추면 전부 허사가 될 수 있지 않겠나? 게다가 옆에 구녕이도 끼고서는·”
무림육화 중 둘이 구경이랍시고 자리에 끼면 설가련은 잘 생긴 미인에서 그냥 잘 생긴 사람으로 돌변하고 만다·
청이 그 대답에 납득했다·
그리고 나니 떠오르는 것이 하나·
딱 든든한 지성인에게 물어볼 만한 일이기도 했다·
“아· 맞다· 그런데 이리 말예요· 빙백신공 그걸 못 익혔다던데·”
“맞아· 이리· 그런 이름이었지·”
설가놈이 쓰게 웃었다·
“빙궁 놈들도 여전하군· 구녕이 다음은 개년이라고·”
“개년이요?”
“나름 신공을 이어 직계로 편입한 아이에게 대놓고 견공이니 견녀 따위로 지을 수가 없으니 이리라고 붙였겠지· 이름 지어놓고 저들끼리 낄낄거리는 모양이 눈에 선하네·”
“아니 도대체 그쪽 놈들은 얼마나 인성들이 썩었길래 그래요?”
“글쎄· 중원하고 비교해서 그렇게 특히 썩었다고 할 것은 아니네· 어차피 여기나 거기나 사생아 취급이야 종놈 아래가 아니겠나· 그걸 좀 대놓고 할 뿐이지·”
“듣고 있으면 어마어마한데·”
“중원 땅이라고 다르지는 않네· 나중에 중원의 사생아를 만날 일이 있거든 한 번 물어보게· 다만 중원에서는 그런 취급을 당하면 더러워서라도 뛰쳐나가지 않나·”
“음·”
“북해 땅에서 그리하면 그냥 자살이라네· 애초에 중원까지 나오는 데에도 식량에 물자에 개썰매 한 번 끌면 물자가 얼마나 나가는 줄 아나? 그러니 심심하면 얻어맞고 종놈처럼 부려 먹혀도 도망칠 구석이 없지· 그뿐이라네·”
“충분히 악질 같은데·”
“뭐· 그러니 구녕이에게 좀 잘해 주게·”
“이보다 더 잘할 수가 없다니까요·”
“그런 것 같더군·”
설가놈이 어쩐지 뜨뜻한 눈빛으로 청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 신공에 대해 물었던가? 그야 구녕이가 사생아라 그런 게 아닌가·”
“그래도 빙백신장은 배웠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막 홀대해도 돼요? 빡쳐서 중원에 막 신공 풀어버리고 그러면 어떡해·”
“자네가 개를 키운다고 치세· 혈통 없는 잡종견이야·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주고 은혜를 베풀었더니 때리고 지지고 아무리 괴롭혀도 그저 낑낑 우는 소리나 내며 꼬리를 마는 하찮은 개새끼야· 자네라면 그런 개한테 물린다고 생각조차 할 수 있겠나?”
“하지만-”
“북해에서 그저 먹이고 입히고 재우기만 해도 은혜인 건 맞네· 그러니 사생아들이란 마땅히 부려먹고 심심풀이로 괴롭혀도 되는 존재들이고· 그걸 당연하게 여기다 보면 저 자신이 해를 입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하게 된다네·”
그리고는 설가놈이 히죽 웃었다·
흉흉하니 사나운 그러나 만족스러운·
“그게 어느 정도냐 하면 제자들이 하나둘씩 계속 죽어 나가는 와중에도 감히 사생아가 범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정도네·”
“아주 좆으로 보고 있다는 거네요?”
“그렇지· 그리고 뭐· 신공을 푼다고 해도 어차피 못 익히네· 배우고 싶다 해서 배워지는 그런 무공이 아니라 북해의 핏줄이 아니면 빙정 친화력이라고 부르는 자질이 없으면 아예 입문 자체가 불가능하거든·”
그뿐이랴·
성취의 한계조차도 타고나야만 이룰 수가 있어서 누구는 삼 성 성취 누구는 오 성 누구는 십이 성 대성까지 아예 그 상한선이 딱 정해진 무공인 것이다·
그 한계를 넘어버리면 단전에 깃든 빙정을 제어하지 못해 꽁꽁 얼어붙은 얼음 조각상이 되고 만다고·
그러다 보니 자질만 있으면 설령 사생아 출신이라 하더라도 일단 가르치고 본다·
어차피 자질이라고 해도 핏줄이다·
초대 북해빙궁주 빙신氷神 다노후아우의 피를 얼마나 짙게 물려받았는지 싸움이다·
그러니 빙정 친화력이 있으면 초대의 피를 짙게 받았다는 증거라서 직계의 족보에 편입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요? 직계로 편입이라면서· 그런데 왜 신공을 안 가르쳐 주고?”
“그야 말이 그렇지 사생아 출신의 궁주라면 그 누가 모시고 싶겠나? 내 생각에는 둘 중 하나 혹은 둘 모두네· 구녕이가 가진 자질이 의외로 굉장히 뛰어난 탓에 견제를 했거나· 기껏해야 삼 성 정도에서 멈출 것 같으면 그냥 가르쳤을 테니까·”
“그건 좀· 이리가요? 자질이? 뛰어나?”
“물론·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그러면요?”
“지금 궁주의 자식 중에 제대로 자질을 가진 놈이 나타난 모양이지· 궁주 자리도 기왕이면 제 자식에게 넘겨주려고·”
그에 청이 잠깐 고민하다가-
“그러면 혹시요· 내가 모종의 방법으로 빙백신공을 익혔다고 하면 그거 이리한테 가르쳐주고 빙백신장을 익혀도 될까요?”
“그런 의미 없는 가정 놀이는 즐기지 않는 편이라네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내가 부탁하고 싶을 정도로군·”
“흠· 그렇다 이거죠?”
청이 그리고는 씩 장난스런 미소를 지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미인계는 잘 돼 가요?”
“놀랍게도· 그리 되더군·”
“사내의 순정을 막 가지고 놀아도 돼요?”
“섬서성 도지휘사의 아들놈이라네· 어떤 놈인지 궁금하면 저자에 가서 소문을 들어보게나·”
가지고 놀만한 놈이라는 뜻이었다·
뭐 설가놈이 그렇다는데야·
—-
그 빙백신장 용 튀어나오는 거 보니까 진짜 멋짐이 폭발하던데· 음· 갖고 싶다·
아니 나는 가져야겠어·
겸사겸사 하찮고 쓸모없는 설이리도 조금이나마 덜 하찮고 덜 쓸모없어질 테니 뭐 일석이조 일타쌍피의 상생이라고도 하겠지·
물론 이리의 사정이 딱해서는 아니고·
한 개 익히면 한 개 더 일 더하기 일로 보라색 무공이 두 개가 되는데 이걸 놓치고 다른 무공을 교환하면 두 개 대 한 개다·
그야말로 절반의 손해가 아닌가·
그러니까 정에 흔들리지 않는 냉철한 이성으로 판단했을 때 선업 사천 점 교환은 빙백신공으로 하는 게 맞다·
그야말로 냉철한 청 냉청이라고 하겠다·
그리하여 청이 슬그머니 운을 떼 보았다·
“이리야· 빙백신장 말이야· 내가 어디서 빙백신공을 주워 오면 나한테 가르쳐줄 수 있어? 서로 맞교환을 하는 거지·”
“아니요·”
“엥·”
앗· 아니요는 예상하지 못했는데·
본인이 싫다고 하면 어쩔 수 없지····
안녕 내 얼음용· 왼팔에 흑염룡까지는 아니더라도 푸른 눈의 빙룡이라도 깃들게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실망한 청에게 놀랍게도 설이리가 말을 꺼내 잇는다·
단답형 대답 전문인 설이리의 놀라운 기행이라고도 하겠다·
“빙백신장을 익히고 싶어요?”
“응· 멋있더라구·”
“서문 소저가 원한다면 가르쳐줄게요·”
“오잉· 그냥 가르쳐 준다고? 빙백신공 안 받아도?”
“네· 네·”
아니요가 그 아니요가 아니었다!
빙백신공 안 줘도 그냥 가르쳐 주겠다는 뜻의 아니요였던 것이다·
아니? 이렇게 기특한 소리를?
하긴· 내가 얼마나 예뻐해 줬어·
예뻐하면 그만큼 돌려주는· 그래 이 맛에 애완동물 키우는 거지·
“하지만 빙정이 없어서· 있다고 해도 빙정을 버틸 수 없을 거예요·”
“그럼 이리는? 빙백신공 구결을 알려줘도 그 빙정이란 게 없으면 당장 익힐 수 없는 거 아냐?”
“아니요· 이미 단전에 빙정이 있어요·”
“그래? 그럼 뭐·”
입 벌리고 기다리고 있으렴·
빙백신공 쏙 들어간다·
일단 종남파 들렀다가 가는 길에·
“아· 맞다· 그런데 빙백신공이나 신장이나 뭐 부작용 있고 그런 거 아니지? 그 빙···수라 그거처럼 빙공 종류들이 막 감각이 사라지고 그런다며?”
“아니요· 네·”
신공 신장에는 부작용 없음·
빙공 종류가 감각을 무디게 하는 건 네·
설이리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사실 이 순간은 대단히 역사적인 장면이었다·
청이 무려 배우기 전에 부작용을 물어보지 않았는가!
그야말로 이제야 생각이라는 행위를 겨우 하기 시작한 그야말로 원숭이 아니 원숭이조차 생각할 줄 안다·
그저 자극에 반응할 뿐인 버러지의 수준에서 단숨에 영장류까지 이른 진화의 순간이라고도 하겠다·
그러나 모처럼의 생각은 여전히 짧다·
무려 보라색 테두리의 신공이 부작용이 있을 리가 있겠는가·
부작용이 있었으면 보라색이 아니라 금색으로 한 단계 격하되었을 테니까·
물론 쓰면 쓸수록 사악해지는 소수마공이 있기는 하나 소수마공은 초식의 이름들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아주 작정하고 원한을 품고 만들어진 마공이다·
소수마공 일 초식 절대희소·
대를 끊고 기뻐하며 웃다·
무공이란 초절정의 끝에서 자신의 것으로 완전히 재해석을 이루지 않는 이상 원래 만들어진 심상을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본래의 심상 세상에 한을 품고서 천하에 악독하기 그지없는 심상으로 만들어진 소수마공이라 그 주인들이 거기서 벗어나지 못할 수밖에는·
어쨌거나 이제 일도 마무리했겠다·
드디어 다시 절검벽 보러 갈 시간이었다·
다행히 종남산은 서안의 지척이다·
애초에 이름부터가 종남이지 않던가·
본래 한 왕조에서 도읍 아래에 있는 산을 부르기를 남산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서안은 한때 중원의 중심 왕조가 난 땅 중에서도 제일이었으니 남산 중에서 가장 정통한 최고의 남산 종남산이다·
그리하여 종 자 떼고 남산이라 해도 중원 사람들은 당연히 종남산이라 알아듣고 또 과거에는 천하의 중심에 있는 산이라고 하여 중中남산이라고도 불렀으니 종남산을 위아래로 중원 북부와 남부를 구분지었다·
그리하여 서안에서 점심을 먹고 천천히 마차 타고 굴러가면 두 시진 조금 넘어 종남파의 본산 누관대까지 이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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