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19
청이 그에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마음에 걸리는 것이라·
“자· 멀대같이 서 있지 말고 여기 앉아 봐라·”
무천대제가 검에서 긴 검강을 뿜어 제 앞의 돌바닥을 툭툭 두드렸다·
청이 미처 알지 못한 검강의 새로운 사용법이었다·
“거긴 돌바닥이잖아요· 보통 옆에 앉으라거나 하지 않아요? 거기 바위에 자리도 넉넉한데·”
“어른이랑 맞먹을 작정이냐? 내가 여기 앉았으면 네년은 당연히 땅바닥에 퍼질러 앉아야지· 궁둥짝에 살집 붙은 거 보니 뭐 방석이 따로 필요 없겠구만· 투실투실한 게 어디 앉아도 푹신하니 편하겠어·”
“진짜 그게 내 속마음 맞아요? 내가 그런 희롱까지 듣고 싶어 한다구요?”
“나야 모르지· 알게 모르게 지금 육신에 불만이 있는 걸지도· 그래서 계속 그렇게 서 있을 테냐· 싫으면 말라·”
그에 청이 순순히 바닥에 앉았다·
아씨 돌바닥이네 아주·
청이 한 손으로 몸을 받쳐 엉덩이를 살짝 들고는 다른 손으로 아래를 쓱쓱 훑었다·
수강 어린 소수마공이 돌바닥을 야무지게 쓸어내니 돌멩이와 돌가루가 팍팍 뿌옇게 흩어진다·
“자· 저 위를 한 번 봐라·”
그러고 나니 무천대제가 검강으로 하늘 위를 가리킨다·
청이 그에 상체를 젖혀 고개를 번쩍 치들고 나니-
“오우·”
새까만 밤하늘에 가득 박힌 것이 별들으로 희고 푸르고 붉고 온통 창백한 별빛이 촘촘하게 모여 바다가 되어 흐른다·
고향에서 화면 너머로나 보던 은하수다·
보정을 떡칠해서 창작이나 다름없는 바로 그 사진들·
인간 초월의 시야 때문인지 아니면 중세 미개 고대 중원에서는 석유 화학이 발달하지 않아서 석유는커녕 석탄도 거의 안 때는 청정한 대기 상태 때문인지 아니면 이 지상에 밤을 밝힐 어떤 인공적인 불빛도 존재하지 않아서인지는 모른다·
아니면 셋 다·
공해 없고 인간의 불빛 없는 땅에서 초월한 시력으로 하늘을 보았기 때문에·
“천하天河다·”
중원인에게 하늘은 본래 검은 것이다·
즉 중원인의 하늘색은 검정이다·
왜냐하면 태어나 가장 먼저 배우는 글자 하늘 천 따 지 검을 현 누를 황 천지현황 하늘은 검고 땅은 노랗다 네 글자라서·
그러니 맑은 하늘을 청천백일 밝은 낮을 백주대낮이라 하지만 밤은 그냥 밤이다·
흑천 따위의 표현은 쓰지 않으니 원래 검은 것에 굳이 검다는 수식을 붙이지 않기 때문에·
청의 고향에서도 본래 색 앞에 그 색을 붙이지는 않으니 검은 흑인이라고는 하지 않는 법이잖는가·
“종남 새끼들은 별에 집작하지· 천하삼십육검 천성검 무극검 은하비성 태을신공 은하천강신공 선천공 북두신공 은하유영비 천강북두진· 죄다 별 별 별이야·”
“이름은 다 멋진데요·”
“쯧· 다시 천하를 보아라· 사람은 누구나 별 하나를 가지고 태어난다· 세상에 무수한 머리통이 존재하는 만큼 그 위에 별들이 존재하는 까닭이지·”
“제가 알기로는 별이 훨씬 더 많을걸요·”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세어봤어? 이 지상 천하에 사람이 몇인가 세어보고 또 저 천상 천하에 별이 몇인가 세어봤냐고·”
“그건 아니고 그렇다더라고· 아니 그럼 어르신 말대로라도 세어봐야 아는 거 아니에요? 사람 수랑 별 수랑 똑같은지·”
“쯧· 유치하게 말꼬리나 잡고· 니가 애냐? 애야? 다 큰 년이 애새끼처럼 굴고· 다 큰 게 아니라 죄다 너무 크지·”
아니 와· 씨· 진짜 기가 막혀서·
청이 간만에 말문이 막히는 경험을 했다·
고금제일인이라더니 말싸움으로 땄나?
“좋은 칼 놔두고 뭣하러 말싸움을 해? 푹 쑤시면 끝인데·”
“자꾸 남의 생각을 읽지 말아주실래요?”
“됐고· 저마다 속에 별을 하나 품었으니 그걸 바로 천성이라 한다· 하늘이 내려준 천품 그렇기에 하늘에 박혀 별빛으로 내려오는 천명이지·”
“음· 여기 우주에서는 그런 걸로 쳐요· 막 소리도 나고 그러는 걸로·”
“···? 왜 갑자기 우주가 나와?”
중원인에게 아직 하늘 바깥이라는 개념은 없다·
천외천으로 도가에서는 선계가 불가로는 수직으로 쌓아 올린 삼천세계가 있을 뿐·
중원인에게 우주란 대기권 밖이 아니라 우란 고정된 공간 주란 흐르는 시간이니 우주는 시간과 공간 세상 전체를 이른다·
“됐고· 그런데 네년의 별은 별들 중에서도 아주 천하의 흉성이란 말이다· 게다가 지금은 운행의 때가 맞지 않아 사바세계를 비출 때가 아니건만· 아니 왜 닿지도 않는 흉성을 안에 품었냐? 왜 저 멀리에 있는 천살고성을 굳이 흉중에 품었어?”
“저한테 물어보셔도· 애초에 도대체 그게 무슨 뜻인데요?”
“네년이 아주 천하의 개썅년이란 소리지· 자· 이제 말해봐라· 너도 짚이는 게 있지?”
말본새 하고는·
청이 그냥 그러려니 했다·
“음· 사실은· 계속 자격이란 소리를 듣곤 해서요· 잘 모르겠어요· 저는 그냥· 으음· 그냥 어떻게든? 좀 좋은 방향으로?”
“뭘 어떻게? 뭘 좋은 방향으로?”
“살인이 즐겁다? 질질 짜고 오줌 지리며 비명을 지르게 하는 게 너무너무 재미있다? 해도해도 안 질린다? 또 하고 싶다?”
“이럴 줄 알고 내려와 봤더니 생각보다 더 가관이로군· 그야말로 대마인 그 자체가 아니냐·”
“방금 내려왔다고-”
무천대제가 청의 댕겅 말을 잘라먹었다·
“그런 것치고는 선업이 아주 하늘을 찌른다만·”
“앗· 어르신도 선업을 아세요?”
청이 반색하며 물었다·
뭐야! 나만 보이는 게 아니었구나!
나만 이상한 게 아니었나보다!
그에 무천대제가 피식 비웃음을 머금는다·
“너 같은 하수 찌꺼기들은 모르지·”
“저도 나름 고수거든요?”
“초절정이 언제부터 고수였냐? 현경이나 되어야 이제 겨우 걸음마나 좀 떼었거니 하지· 생사경을 넘으면 대충 보인다· 그래서 주제에 어찌 그리 선업을 쌓았냐·”
“그래서 나쁜 놈만 골라서 죽이거든요? 죽을 짓 한 놈을 죽이는 건 아무런 문제가 없잖아요? 오히려 세상에 이로운 일이고·”
“문제가 없다? 아니 넘어가지· 그래서?”
“그런데 그럼 하나같이 그런 소리를 하는 거예요· 너가 무슨 자격으로 단죄를 운운하느냐· 그러면 좀 기분이 안 좋지· 사실 뭐· 그냥 취미를 즐기는 김에 좋은 일을 겸사겸사하는 거지· 내가 뭐라고 천벌이다 외치며 단죄를 해요?”
“그런데?”
“그냥 그렇다구요· 나는 정당한가? 내가 이래도 되나? 솔직히 나쁜 놈도 죽을 때까지 나쁜 놈으로 남지는 않을 수도 있을 수도 있는? 물론 일백 중에 한 놈이 그럴까 말까 하겠지만요·”
“그런 고민을 품은 것 치고는 아주 망설임이 없이 죽여대던데?”
“그야 죽일 놈 하나 바뀌려면 좋은 사람들이 여럿 고생해야 하잖아요? 죽여도 되는 나쁜 놈 하나 갱생시키자고 좋은 사람들이 고생해야 하는 이유가 어디 있어요? 그 사람들은 그럴 시간에 더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인데·”
“음· 대체 뭘 어디서부터 따져야 할지· 네 고민은 잘 알았다· 딱 계집년 같은 소리나 처하고 있으니 아주 복장이 터지겠다· 쓰레기 같은 년 같으니라고·”
대뜸 또 폭언이 날아든다·
청이 떫은 표정으로 볼맨소리를 냈다·
“아니 왜 또·”
“네 편 들어달라 하는 거 아니냐? 그럼 내가 뭐 세상에 이로운 일이니 거리낌없이 죽여라 선업 오르는 것 보면 하늘이 허락한 인간 백정 아니겠냐 이런 소리 듣고 싶은 모양인데 그게 딱 계집년이 하는 소리지· 네가 죽여놓고 나는 잘못 없지 않나요 내 편 들어줘요 징징징· 이게 쓰레기가 아니면 뭐냐? 개쓰레기?”
“지금 좀 위로가 필요한 때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저 이러다 삐뚤어지는 수가 있어요? 진짜로 대마인이 되어버려요?”
무천대제가 코웃음을 쳤다·
“위로는 무슨· 네가 선택한 방식이라면 이해를 구하지 마라· 그리고 결과에서 도망치지 말고 책임을 져· 그게 무인이지· 암·”
“진짜 대마인이 되는 수가 있어요? 제가 삐뚤어져서 막 아무나 썰고 다녀도 그렇게 말씀하실 참이에요?”
“그러면 세상 사람 모두가 너를 막으려 들겠지· 게다가 미움받는 건 싫어하지 않느냐?”
“뭐····”
“그리고 칠 초식 견월망지見月忘指다·”
“엥· 이렇게 갑자기 초식 전수요?”
“자· 잘 봐라·”
무천대제가 검을 뽑아 휙휙 세로로 한 번 가로로 한 번 가볍게 휘두른다·
“그게 다예요?”
“이게 다다·”
“검강도 안 썼잖아요·”
“검강은 별빛이지· 하지만 달을 봤다면 손가락은 잊어야 하는 법· 별이 가리키는 자신에 닿으면 별빛은 잊거라· 그리하여 더는 하늘에 의지하지 않으면 천명에 따르지 않으면 내가 바로 천하의 중심 내 마음을 온전히 들여다보고 이해하여 내 검으로 세상의 중심을 정하면(검정중원劍定中原) 검이란 더 이상 빛날 필요가 없다·”
청이 그에 뒤를 돌아보았다가 입만 쩍 벌렸다·
어느새 절벽에 거대한 열 십자가 박혔다·
위로는 열 장 가로로도 열 장으로 거대한 상흔이었다·
독고구검 칠 초식 견월망지·
달을 보고 가리킨 손가락을 잊다·
“과거 도사라고 하면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자를 말했다· 역천 하늘이 정한 수명에서 벗어나 불로장생 오래오래 건강하게 젊게 잘 살면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처 없이 첩만 삼백육십명 이끌고 날마다 다른 구멍 쑤시며 잘 살기를 바랬지·”
“꼭 말을 해도 그렇게 해야 해요?”
“그러니 아주 예전 도가 수법들이 그래· 지상의 운행을 뒤바꾸어 하늘의 눈을 속이는 진법 사람이 절대 먹지 말아야 할 것을 이것저것 갈아 넣어 처먹는 연단 교접해 붙어먹으면서 순리대로 새끼는 안 치면서 내공만 쌓는 양생·”
어느 순간부터 역천은 순명으로 바뀌기 시작했으니 중양자가 전진의 법을 굳건히 세운 이후로는 도를 닦음이란 하늘의 뜻을 이해하고 그와 하나가 되려는 목적으로 변질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사람이 그리해서는 안 된다· 제 천성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극복하여 마음이 일어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어어 잠깐만요·”
문득 아득해지는 정신 세상이 흐려지며 뭉개지고 하늘의 별들은 긴 꼬리로 궤적을 그어 커다란 원을 그린다·
“정해진 운명이란 바로 하늘의 별 천성天星이다· 타고난 천성이 바로 운명이라서 누군가는 재능이 없다고 하고 누군가는 또 천품이 사악하다 하고 누군가는 또 핏줄이 천하다 태어나기를 이렇게 태어난 것을 어쩌란 말이냐 한탄을 한다· 그러나 한탄만 하고 있을 셈이냐? 사람은 저마다 세상의 주인 제 세상을 바꾸기 위해 태어난 변화이다·”
무천대제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대지에 다리를 붙이고 선 작달만한 노인이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큰 세상보다 더 큰 세상으로 존재감을 발한다·
“누구보다 가혹한 천성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야· 치열하게 고민하고 번민해라· 어느 때에 네 마음을 네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되는 자립의 때가 오면 그때는 별빛에 흔들리지 않을 것이란다·”
그 사이에서 서서히 번져나가는 찬란한 인간의 빛을 발하는 무천대제가 보이지는 않지만 어쩐지 웃는 것만 같은 표정으로·
청의 몸이 저절로 움직여 검을 뽑는다·
“어어?”
“그래도 한 번은 휘둘러 봐야지· 초절정? 경지가 버러지 수준이라서 당분간은 아주 병신이 되겠군· 혹시나 다른 절검벽을 보려거든 최소 두 달은 쉬었다가 봐라· 진짜로 죽는 수가 있으니까·”
인제 보니 웃는 표정에는 아주 사악한 심술 가득한 노인네의 음흉함이 가득하다·
“잠깐만요···! 아윽!”
순간 단전이 요동치며 모든 내공이 일제히 끓어올라 전신 혈맥으로 내달리기 시작한다·
온갖 신공의 공능으로 잘 닦이기가 이미 경지를 초월한 청의 기혈이나 가진 내공이 그보다 더 강맹하니 당장 단전에 붙은 가장 큰 대로인 단중혈에부터 병목을 감당하지 못해 갈가리 찢겨나가는 끔찍한 통증이 그리고 전신 혈도로 퍼져나가는 미친 왜 내 내공이 내 말을 안 듣고···!
청이 직감했다·
아· 이거· 좆됐네·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