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20
종남의 무인들은 장문인의 말처럼 할 일이 없어서 따라온 것만은 아니다·
그 드넓은 도관의 규모 만큼이나 계속 할 일이 생기는 것이니 하루를 땡땡이치면 내일에는 할 일이 두 배다·
하지만 심심해서 따라왔다는 장문인의 말은 딱히 틀리지는 않았다고 하겠다·
도관 생활에 뭐 극적인 사건이 있겠는가·
그러던 와중에 천하제일미의 가장 유력한 후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에 가장 가깝다고 하는 절세미인 천화검이 찾아왔으니 당연히 너도나도 모여들 수밖에는·
그러나 역사가 증명하기로 이러한 한심한 호기심들이 큰 발견으로 이어지곤 했으니 이 자리에 선 종남의 무인들에게도 크나큰 무리를 견식할 기회가 주어지게 되었다·
천화검이 절검벽을 잠시동안 바라보는가 싶더니 돌연 검을 뽑아 하늘을 가리키듯 높이 치든다·
순간 검이 하늘에 닿았다·
그저 검을 뽑아 높이 세운 모습일 뿐이지만 자리의 모두가 그 사실을 알았다·
거인 거인이로구나!
사람이 하늘의 별에게서 독립하여 스스로 걸어나가니 비로소 홀로 온전히 존재하여 스스로를 이루었으니 이룰 성成 성인이라·
하늘의 지도를 따라 그저 순명하여 따르는 아이들이 보는 온전한 성인이다·
당연히 고개를 번쩍 치들어 높이 올려다볼 수밖에는·
그 끝이 하늘에 닿은 거인으로 보이기에·
그리하여 사람의 검이 하늘을 찌른다·
사람의 것이기에 빛나지 않는 칼날이나 마음으로 벼린 날카로움은 모두의 심상으로 파고들어 심장이 쪼개지는 듯한 두려움으로 피어난다·
그리고 마침내 이미 어느새·
청의 검이 내려앉아 제 검집으로 되돌아가니 모두의 마음으로 거인이 내리친 검이 절벽을 베어내는 모습을 보았다·
그 장엄한 일격에 모두가 숨을 죽이니 그저 고요함만이 남은 세상 속에 천화검이 후우우 깊은숨을 내쉬며 입을 연다·
“좆·”
음? 뭐라고?
그리고는 풀썩·
물 밖의 미역처럼 흐느적 가라앉아 버리는 것이다·
—-
종남파를 뜨겁게 달구는 장안의 화제는 분명했다·
천하제일미인(종남은 이제 청을 천하제일미인으로 인정했으므로) 천화검이 쓰러지기 전에 남겨준 화두에 대해서였다·
도대체 무천대제 선배님께서 남기신 깨달음과 좆이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
심지어 천화검은 여인이라서 좆도 없다·
그런데 좆이라니?
그 하늘에 닿는 거인의 일검과 좆이 대체 무슨 상관이라고·
어느 도사는 좆이란 모름지기 원기충천 하늘을 향해서 높이 뻗어가는 선천진기의 자연스러운 비승을 말한 것이 아니냐고 하기도 하고·
또 어느 도사는 그냥 깨달음을 얻고 좋다고 말하려다가 힘이 빠져서 쓰러진 것이 아니냐고도 했다·
하지만 그런 것 치고는 너무 선명하니 누가 들어도 그건 좆이었지 좋다에서 끊긴 소리는 아니었다고·
그도 아니면 두려운 상상이지만 종남에 남긴 초식명이 좆일수도 있겠다고·
독고구검 제 몇 초식· 좆·
가는 데마다 여인을 안았으면서도 원망을 받기는 커녕 인생 최고의 밤을 보냈노라고 그리움을 샀던 무천대제의 절륜한 좆질은 그 무위만큼이나 유명하지 않던가·
거기에 온갖 기행을 일삼은 그 괴팍한 성정으로 보아 아예 가능성이 없는 일은 아닐 것이라고·
그러나 그 해답을 가진 천화검은 쓰러져 의식이 없었으므로 종남파 도사들의 궁금증만 눈덩이처럼 커져 갈 뿐이었다·
그리하여 청이 의식을 차린 것은 기절 후 사흘 째 되는 날이었다·
덕분에 눈을 뜨자마자 아니 정확히는 눈을 뜨기 전 의식을 찾자마자 속을 불로 지지는 것만 같은 끔찍한 고통에 정신이 번쩍 들어 눈을 번쩍 뜨며 몸을 일으켜 비명처럼 소리를 지를 수밖에는 없었다·
“배고파! 밥!”
그에 움찔 놀라는 기색에 옆을 돌아보니 설이리가 놀란 눈이 동그랗게 변해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괜찮아요?”
“안 괜찮아· 지금 등이랑 배랑 붙어있는 것 같은데· 먹을 거 먹을 거 없어?”
“네·”
한 글자가 이리도 야속해보기는 또 처음이었다·
얘는 먹을 것도 안 가지고 다니네·
진짜 쓸모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어·
하지만 동전 한 푼 없는 설이리가 어떻게 먹을 것을 가지고 다니겠는가·
“아으 왜 이렇게 배가 고프지? 절검벽 보고 쓰러진 건 알겠는데 도대체 얼마나 누워있었길래 이래?”
“삼 일 반요·”
“헉· 사흘이나 굶었다고?”
청이 경악했다·
그러면 그날 저녁에 이틀째 아침 점심 저녁 사흘 째 아침 점심 저녁 그리고 오늘 시간은 아직 모르겠으니 빼더라도 일곱 끼나 거르고 만 것이다·
먹을 수 있는 양은 한정되어있으니 하루 고작 세 번의 기회가 있는건데 그걸 일곱 번이나 놓치다니!
그것도 최소한으로 잡아서 일곱 끼다·
지금이 지금이 몇 시지?
“술시 정을 넘었어요·”
“헉!”
술시 정이면 저녁 여덟 시가 넘었으니 오늘 아침과 점심까지 도합 아홉 끼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심지어 종남파의 식사다·
머리에 황금을 뒤집어쓸 만큼 부유한 문파에서 쏘는 식사가 보통 식사였으리라고·
어떻게 이런 진짜 너무해·
무천대제 그 늙은이 증오할 테다·
“괜찮아요?”
“배고파 죽을 것 같아·”
그러자 설이리가 고개를 저었다·
“내공을 운용하기 힘들 거라고 했어요· 혈도가 다 상해서·”
“혈도가? 음? 멀쩡한 것· 허윽·”
생각 없이 내공을 돌리려던 청이 곧장 폐에 든 공기를 뿜으며 눈을 까뒤집었다·
전혀 준비되지 못한 상황에서 수십만 개 바늘이 일제히 내장을 찌르는 듯한 끔찍한 고통이 일시에 밀려들자 곧바로 정신줄을 놓아버린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배고파! 밥!”
“괜찮아요?”
“안 괜찮아· 지금 등이랑 배랑 붙 어라? 뭐지? 이런 대화 전에 했던 것만 같은 뭐라고 하지? 기시감?”
“몰라요·”
물어보는 말에만 대답을 하는 설이리다·
그에 청이 인상을 확 찌푸렸다·
“아니· 모르는 게 아니라· 아으·”
아니 지금 내 혈도가 어떻게 조져졌길래 내공 잠깐 돌리는데 정신줄을 놓을 정도로· 어으 어으으·
그 통증을 떠올린 청이 몸서리를 쳤다·
하지만 그렇다고 심각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무천대제의 사념인지 정신 기생체 비스무리한 무엇인지 그 늙은이의 주장대로 내가 해석해서 만들어낸 무천대제의 허상 내가 만들었으니 무청대제 쯤?
무청대제· 무청 무쳐 먹으면 맛있는데· 음· 열무김치 먹고 싶다·
시원하고 상쾌한 열무김치 소면에 말아서 후루루룩 빨아다 아작아작 함께 씹으면 끄아아····
“아씨· 배고파 죽겠네·”
배고프니 별생각이 다 든다·
애초에 청은 혈도에 대해서는 그 고통이 두려울 뿐 그리 걱정하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무청대제가 당분간 병신이 될 거라고 했으니 당분간이 지나면 멀쩡해진다는 소리가 아니던가·
그리고 청은 이미 내공 안 써도 천하에서 제일가는 인류 정점의 육신을 한 암컷이기 때문에·
그보다는 밥 밥이 급했다!
열무김치 생각했더니 진짜 뒤질 것 같다·
다행히 도관에 남은 밥이 있어서 남은 쌀밥에 소채 넣고 소채 넣고 소채 넣고 깨 기름 넣어다가 술술 비비니 청이 보기에는 훌륭한 비빔밥의 완성이었다·
참고로 중원에는 없는 문화라서 멀쩡한 반상을 죄다 섞어 훌륭한 개밥으로 만드는 기행을 펼쳐버리고 말았지만·
그걸 숟가락 가득 고봉으로 쌓아 볼따구가 미어터지도록 우겨넣는다·
종남파 장문인 타정 진인이 그 꼴을 보며 생각하기를 뭐지 천화검이 신녀문 제자가 아니라 개방 제자였던가?
내가 착각하고 있었나?
심지어 개방의 제자도 동냥밥을 저렇게 야무지게 또 맛있게 처먹지는 못할 텐데 하고·
그래도 청은 감히 천하제일을 논할 만한 미인이다·
어설픈 미인이 하면 오만 정이 떨어질 만큼 추잡하기 그지없는 게걸스러운 아귀와 같은 거지년의 식사법이었다·
하지만 미모가 너무 뛰어다보니 아이가 참으로 배가 고팠구나 그래도 복스럽게 먹으니 몸이 많이 상하지는 않은 것 같아 다행이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사람이 간사하기가 이러한 이치라고·
“흐아아· 이제 살겠다· 잘 먹었습니다·”
청이 대충 칠 개월쯤 애가 들어찬 것 같은 배때기를 쓰다듬으며 행복한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설이리는 보아도 보아도 놀랍기만 한 그 경이로운 복부 팽창률에 굳이 또 보면서 내가 제대로 보고 있나 하는 표정으로 계속 유심히 바라본다·
타정 진인은 그보다는 다른 일에 관심이 있었다·
“그래· 급히 준비하느라 남은 것들 모아 누추한 식사였다만 그리 맛있게 먹어주니 내 마음 또한 기껍구나· 그래 절검벽을 보고 크게 깨달음을 얻은 모양이던데·”
“음·”
청이 잠시 무청대제와의 대화를 더듬어 보았다·
딱히 깨달음이라 할 건 없지 않았나?
“아· 맞다· 독고구검 칠 초식 견월망지라고 해요·”
“칠 초식?”
타정 진인의 얼굴에 아주 아이처럼 해맑은 미소가 활짝 피어올랐다·
“그래· 화산이 팔 초식이면 종남이 칠 초식은 먹어야지· 암· 그래야 하구 말구·”
무천대제가 알았다면 도사 놈이 번호에 운운하고 앉았다고 크게 갈을 외치며 흠씬 두들겨 팼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승천한 무천대제가 무얼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견월망지· 견월망지라· 불가의 경전에 있는 말이 아니니? 어디보자 그게 능엄경이었던가?”
그에 청이 아주 가만히 있었다·
모르면 가만히라도 있어야 하는 법이라·
타정 진인은 겉으로는 세속의 때가 아주 가득한 사이비 도사인 주제에 남의 경전의 이름까지 정확히 짚어내는 것이다·
능엄경 본문에서는 ‘누가 손으로 달을 가리켜 보라 한다면 당연히 손가락을 따라 달을 보아야 할 것이다’ 라고 설명한다·
이는 손가락을 불경에 빗댄 말씀이다·
불경은 열반에 이르는 도구에 불과함으로 경전 그 자체에 집착하여 매몰되면 진정한 깨달음을 놓치게 된다는 가르침이었다·
“그런데 어찌 그런 이름을 붙이셨다니?”
“아· 그건요·”
이번엔 아는 이야기가 나와서 청이 냉큼 아는 체를 했다·
원래 사람이 저 아는 이야기가 나오면은 아는 체 참기 일만 배라서 참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별빛이 이끄는 무리는 스스로에게 닿는 과정이지 무학의 목적이 아니라고 했어요· 천성을 극복하고 마음을 마음으로 다루며 자신만의 검으로 중심을 정해야 한대요·”
“음· 견월망지· 극기치심 검정중원하라·”
그리 말하는 타정 진인의 표정이 딱 재채기를 하려다 만 알 듯 말 듯 아리송한 상태에 있는 사람의 표정이다·
“그래도 하나는 알겠구나· 더는 별빛으로 빛나지 않는 검 마음으로 다뤄 일궈내는 사람의 일검이 아니니· 바로 심검이라 하는 경지로구나·”
“심검이요?”
청이 그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타정 진인이 진짜 도사 같은 미소를 짓는 것이다·
“나도 알지 못하니 모르는 것을 아는 것처럼 떠들 수는 없구나· 그러나 우리 막내 사매라면 충분히 닿을 수 있을 것이야· 한 번 펼쳐보았으니 지금은 모르더라도 후에 때에 이르러 큰 깨달음으로 돌아올 테니· 음 뭔가 올락 말락 한데· 무천대제 선배님의 말씀을 다시 되새겨 보아야겠구나·”
“네· 들어가셔요·”
그에 타정 진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 식당 밖으로 나가려던 타정 진인이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이 물었다·
“아· 그런데· 정신을 잃기 전에 좆이라고 했는데· 그건 무슨 뜻이었니?”
“아· 그게 입 밖으로 샜어요?”
청이 민망한 표정으로 뒷통수를 벅벅 긁었다·
—-
종남파 의당 장로라는 어르신의 말로는 내상보다는 기연에 가까운 것이라고 했다·
전신의 기경팔맥 어디 한 군데 조금의 틈도 없이 빠짐없이 골고루 박살이 났지만 그래도 끊어지거나 꼬이지는 않았다고·
“내공을 많이 잃어서 허전하겠지만 기혈이 보다 넓어지고 튼튼해졌으니 기연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 내공이란 살아있으면 어쨌거나 다시 쌓이는 것이니·”
“음· 네·”
평범한 무인이었다면 원래는 내공을 좀 잃어버려야 했던 모양·
그러나 청의 경우 잃기는커녕 좀 늘었다·
파천마기는 언제 그랬냐는 양 시치미를 뚝 떼고 또 단전 구석에 눌러붙었지만 그 중 또 아주 조금이 움직일 수 있는 상태로 흐느적거리게 되었으니까·
의당 장로가 손주딸 보는 눈빛으로 청을 바라보며 웃었다·
“다만 영약을 조금 곁들이면 조금 더 기연 쪽으로 기울 수 있겠지 자· 장문께서 네게 전해달라 하시더라· 자소단이란다·”
“와! 자소단!”
청이 일단 놀라는 모습을 취한 뒤에 음 그러고 나니 뭔가 좀 이상한 것이·
뭐지? 내가 잘못 알고 있었나?
“그으· 자소단이면 화산의 영약 아니에요?”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