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21
청도 천하에 유명한 영약 정도는 안다·
그에 의당 장로가 킬킬 웃음을 터뜨렸다·
“본래 전진의 도에서는 삿된 꿈을 멀리하라 가르친단다· 연단술이 다 무어냐· 불로불사 하겠다는 허무맹랑한 소리가 아니냐· 중양자께 전진의 가르침을 받고서도 기어코 연단술에 매진한 화산 놈들이야말로 고약하다고 할 수 있지·”
다만 화산은 이미 도관이라기보다는 거대 문파에 가까우니 큰 문파가 영약 연구를 하는 것이 딱히 이상하지 않기도 하고·
“게다가 거긴 좋은 풀이 많지 않으냐·”
화산은 산이 험악하기로 중원에 손꼽힐 정도로 산세의 악명이 높다·
산이 험악하다는 말은 사람 손이 닿지 않는 장소가 많아 기화영초가 많이 자라고 있다는 뜻이 된다·
그에 비하면 산세의 수려함으로 이름이 난 종남산이야 섬서성의 자랑이요 멋들어진 명승지이다·
덕분에 어디 한 군데 사람 발길이 안 닿은 곳이 없으니 작은 산삼 한 뿌리도 발견하기 힘든 황폐한(?) 산이라고·
“그러니 몇 알 사다 쟁여놓았지·”
“이런 귀한 걸 주셔도 돼요?”
“그건 별로 안 귀하단다·”
“네?”
“열어보렴·”
그에 청이 목함을 열어보니 어째 잘게 부서진 조각들이 안에 가득하다·
“어찌 만들었나 이리저리 구경을 해보다 보니 대충 절반 정도 된단다·”
“아· 네···”
청이 자소단(절반)을 손에 넣었다!
연구하느라 이리저리 헤집어 두고 남은 것들이었으니 본래 동그랗게 잘 빚어놔야 하는 환약이 어째 모양새가 그리고 색도 영····
그래도 감사한 것은 감사한 것이다·
천하에 이름 높은 영약인데 반절이라도 어디란 말인가·
그런데 남의 문파 영약을 함부로 막 해부해서 연구해도 되나?
물론 청은 궁금하면 참지 않으므로 그에 대해서도 곧장 문의를 해 보았다·
“우리와 화산이 뭐 남이더냐? 좋은 게 있으면 서로 나누고 하는 거지· 애초에 화산이 우리 종남에게서 나왔으니 화산의 영약도 따지고 보면 우리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화산 문도가 들으면 복장이 터질 소리다·
“그 정도면 너도 부담 없이 받을 수 있고 우리도 부담 없이 줄 수 있지 않겠느냐? 장문인께서 그리 신경을 써 준 것이지·”
본래 영약이란 목숨이 달린 문제다·
혹여 멀쩡한 것을 주었다가 나중에라도 모자라 불상사가 생기면 사람 마음이 어쩔 수 없이 원망하는 마음이 들지도 몰라서·
그러니 거 반절 남은 거라도 좀 주라고·
사실 청이 절검벽의 감상을 공유한 일은 어차피 절검벽이 종남에게 남겨진 유산이라 당연히 치러야 할 대가였다·
그리하여 주고 받았으니 청이 종남에게 빚지지 않고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거기에 영약 하나 온전히 더해서 준다면 오히려 부담을 끼치는 일이니 먹다 만 영약이라면 마음 빚을 지지 않고서도 기꺼이 받을 수 있지 않겠냐고·
물론 영약 알기를 대충 많이 좋은 거 쯤으로 여기는 청이다·
반절도 고맙고 온전한 한 알도 고맙지만 그렇다고 이 은혜를 어찌해야 하나 마음이 불편하지는 않았을 터다·
청을 아주 과대평가한 사례라고 하겠다·
—-
청의 단전 속은 오랜만에 와글와글 아주 진기들이 전원 집합하여 북새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집 밖 단전 밖이 아주 개박살이 난 통에 도저히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도망갈 곳을 잃은 마기들이 구석에 박혀 오들오들 떨고 환희진기가 슬쩍 월녀진기의 눈치를 본다·
그러나 월녀진기가 고개를 저으니 그냥 내버려 두라고 그러니 환희진기가 입맛을 쩝 다시며 눈만 부라릴 수밖에는·
너희 재수 좋은 줄 알아라 하고·
마기들이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며 또 그렇다고 불가 도가 쟁쟁한 단전 속에 어디 갈 데도 없으니 그냥 구석에 짱박혀서 아유 마공 기氣생 참 서럽구나 말도 못하고 서로 그렇게 슬픈 눈빛만 교환하고 있을 때였다·
크큭···! 하고 파천마기의 웃는 소리·
안 그래도 서러운 참에 저 단전벽에 핀 곰팡이 같은 게 속을 긁는다·
울고 싶은데 뺨 때려준다고 마기들이 우르르 몰려가 파천마기를 때리고 할퀴고 막 짓밟으며 괜한 화풀이를 한다·
오늘도 파천마기는 처맞는다·
크크흑 크큭! 크흑 흑 크크···!
파천마기는 아직도 웃고 있다····
그러던 와중이었다·
기경팔맥이 아주 작살나서 들어올 길도 없는 지금 돌연 단전의 문이 발칵 열린다·
여기서 갑자기 새 식구가?
도가와 불가의 진기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리고 파천마기를 패던 마기들도 우리도 왕언니 같은 거 오셨나 하는 기대로 때리던 자세 그대로 멈춰 눈을 빛낸다·
파천마기는 그러거나 말거나 크큭 크흑 흑·
그러나 새 식구는 낯설다·
희고 뭉게뭉게하니 풍성한 털의 짐승 가죽을 하나 척 뒤집어쓰고는 아무런 표정 없이 쓱 들어와 좌중을 한 번 둘러보고는 당연하다는 듯이 한쪽으로 향한다·
그리고는 어디선가 거대한 빙산을 하나 꺼내 단전 바닥에 꾹 눌러 심는 것이다·
그에 빙공 세자매 옥녀진기와 빙천마기 한심한寒기가 일제히 화색을 띠며 달려든다·
와! 빙정! 정말 차·갑·습·니·다·
이게 음한지기에 정말 좋은 건데 달리 뭐라고 설명할 방법이 없네····
빙정을 중심으로 단전 바닥에 쩌저적 흰 서리가 빠르게 번져나간다·
그러다 월녀진기가 가볍게 발을 쿵 구르니 딱 반절 지점에 선이 그어져 냉기가 침범하지 못하는 것이다·
반대편에서는 주양진기가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하니 천불을 일으켜 반절을 불바다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반은 얼고 반은 불타고·
딱 중간에 반반 걸친 파천마기가 반절은 춥고 반절은 뜨겁겠지만 그저 웃고만 있으니 정확한 감상은 알 수가 없다·
어쨌거나 이렇게 단전에 새 식구 빙백진기가 자리를 잡는 순간이었다·
서문청 빙백신공 최고 가성비 육 성·
“후우우·”
청이 뇌 주물럭주물럭 으극 으거걱 침이 줄줄 눈은 회까닥 상태에서 벗어나 깊은 숨을 내뿜었다·
상태창의 뇌새김 요법은 도대체가 익숙해 지지가 않는다·
뇌가 농락당하는 듯한 이 기분은 정말로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한동안 기분이 축 쳐져 계속해서 더러움이 남는 것만 같아서·
청이 그에 찝찝한 여운으로 그저 인상만 찌푸리고 있을 때였다·
드륵 문이 열리며 설이리가 들어온다·
“아· 그래· 구녕아 이리 와 봐· 내가 개쩌는 이야기를 들려줄 테니까·”
“탕약부터요· 그리고 구녕이라 부르는 건 싫어요·”
설이리가 큰 대접에 큰사발로 든 대용량 탕약 쟁반을 양손으로 받쳐 다가온다·
그런데 어째 파들파들 떨리는 손으로 쟁반을 옮기는데 도대체 마치 시간이 열 배쯤 느리게 흐르는 듯한 동작이라서 도통 탕약이 도착하질 않는 것이다·
청이 이건 또 무슨 얘는 또 왜 이러나 하고 멀뚱히 지켜보고 있으니 한참이나 지나서야 대접이 청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고 만다·
아· 약을 아주 고봉으로 담아놨구나·
안 그래도 큰 대접에 무슨 탕약을 넘치기 직전까지 부어놓았다·
그러니 설이리가 나름 한 방울도 안 흘리겠다고 저렇게 느린 화상 열 배로 굼벵이 기어오는 꼴인 모양·
그런데 도대체 어디서부터 이런 속도로 가져오기 시작한 거지?
겨우 탕약 한 그릇에 벌벌 떠는 하찮은 설이리와는 달리 청은 균형 감각 역시 천하제일이라 하겠다·
대접을 들어 냉큼 제 주둥이에 갖다대니 꼴깍꼴깍 아주 호쾌하게 목울대를 움직여 기혈을 보하는 보약을 들이킨다·
“크으 진짜 개맛없어·”
그래도 탕약 맛없는 건 아는지 쟁반에 그 비싼 분당(각설탕)을 예쁘게 쌓아놓았다·
청이 냉큼 하나 집어 제 입에 넣고 하나 들어 내미니 설이리가 얌전히 입을 벌려 쏙 받아먹는다·
“자 구녕아 이제 여기 앉아 봐라· 내가 개쩌는 이야기 들려줄 테니까·”
“구녕이라 부르는 건-”
“싫겠지· 그럼 구멍아 여기 앉아 봐라· 내가 개쩌는 이야기 들려줄 테니까·”
“구멍이도 싫어요·”
“까다롭기는· 이리야· 여기 아니 같은 말을 몇 번이나 해야 해· 앉아서 듣던가 서서 듣던가· 일전에 북해보다 더 먼 북해에서 투명하니 저 심연까지 뻗은 얼어붙은 벽을 보았다· 인근에 생고기나 뜯는 미련하고 더럽고 못생긴 야만족 오랑캐의 굴이 있어 물어보니 일만 년이 넘은 얼음이라 하여 신령하게 여긴다고 하였다· 그들의 하찮은 말은 굳이 옮길 필요가 없으니 이는 세상 가장 우월한 언어로 빙백 빙백이라 표현할 것이다·”
빙백신공의 시조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인종 차별이 심했다는 정도는 잘 알겠다·
정작 지도 북해 오랑캐 야만족 주제에·
심지어 한어가 저네들 말도 아니면서·
“서문 소저? 지금-”
“됐고· 구결 불러줄 테니 귓구녕 열고 잘 들어· 음? 구녕이 귓구녕? 구멍이 귓구멍?”
“자꾸· 너무해요·”
“어쨌든 빙백을 보고 크게 감동하였으니 얼음 냉기야말로 우(공간)와 주(시간) 우주조차 얼어붙게 만드는 삼천세계의 제일로 강대한 힘인 것이다· 그리하여···”
본격적인 구결이 흘러나오자 설이리도 금방 눈을 감고 집중하여 귀를 기울인다·
청이 같은 구결을 불러주기를 두 번 세 번 네 번· 그리고 다섯 번째로 불러주려고 입을 달싹거리는 때였다·
돌연 방 안에 사나운 북풍이 몰아닥치며 늦여름 무지근하던 온도가 한겨울처럼 뚝 떨어져 버린다·
음· 시원한걸·
빙백신공의 부작용을 굳이 꼽자면 추위에 무뎌지고 더위를 많이 타게 된다고·
이는 무인이 고수가 되어가며 점점 한기와 열기에 몸이 상하지 않는 한서불침과는 또 다른 개념이다·
한서불침은 춥거나 더워서 건강이 상하지 않을 뿐이지 추운 건 계속 춥고 더운 건 계속 덥다·
그냥 추워도 아 춥다 더럽게 춥네 더워도 아 덥다 더럽게 덥네 하고 넘길 수 있게 되는 것이지 더위 추위 자체를 막아주지는 않는 것이므로·
그러니 빙백신공의 이러한 특성은 사실 공능이라고 해야지 부작용이라 할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북해는 춥기만 하기 때문에 이득만 가득 더위를 탈 일이 없어서·
하지만 청은 덥다·
어차피 한심공으로 시원하게 하면 그만이 아닌가 했는데 정작 그러고 나니 한심공은 무슨 내공 끌어올렸다가 격통에 기절까지 한 상태가 아니었던가·
생각은 얕은 주제에 행동력만 좋은 이의 특징으로 굳이 급할 필요도 없는데 급히 행동하다 맨날 손해를 본다·
청은 생각이 없는 주제에 아주 행동력은 뭐든 당장 해야 직성이 풀려서 꼭 같은 일을 여러 번 하는 비효율의 달인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어쨌든 덕분에 시원하긴 하다·
이렇게 살을 에는 듯한 얼음바람 쌩쌩 격하게 부는 방 안에 있자니 익숙하고 그리운 마음이 치솟는 것이·
마치 신녀문 꼭대기에 좁아터진 주제에 안락하지도 않은 썰렁하고 춥고 외풍을 초월해서 아예 눈폭풍이 불어닥치는 내 집 내 방에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음· 생각하니 집에 가고 싶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설이리가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는 살짝 부드러운 모양으로 바뀌며 살포시 휘는 눈을 하고 청을 바라보았다·
청이 그에 각설탕 하나 집어 제 입에 툭 던져놓고 그리고 또 손을 쭉 뻗었다·
날름 받아먹은 설이리가 밀려오는 쓴 맛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평소에는 표정도 별로 없는 주제에 놀랄 때만 눈이 땡그래지는 게 음 귀엽긴 해·
“우웁·”
“허어· 뱉으면 못 써· 그거 영약이거든? 자소단이라고 알아? 귀한 거니까 꿀꺽 삼키고 갈무리 해·”
청이 저도 공짜로 받은 주제에 생색을 냈다·
의당 장로에게서 받은 자소단 반절 분량의 잔해들을 다시 하나로 뭉쳐놓은 소형 자소단이다·
청이야 뭐 애초에 내공이 짱짱하니 경지 오르고 나선 모자라서 아쉬운 적이 없다·
오히려 너무 많아서 문제 이번에도 무청대제 그 늙은이에게 된통 당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청에게는 대환단이 있다·
아무리 그래도 무능력 무쓸모 그 자체한테 대환단까지 먹이기는 좀 아깝다·
하지만 반절짜리 자소단이면 의당 장로님 말씀대로 부담도 별로 없고·
이제는 우리 구녕이가 달라졌어요 본격 시원한 죽부인 역할을 기대해도 되지 않을까···
엥· 아니 뭔데?
생각해보니 죽부인 역할 하나 보고 데리고 다녔던 건데 지금까지 그 쉬운 거 하나조차도 제대로 못 하고 있었던 거 아닌가?
죽부인은커녕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재우고 아주 수고만 잔뜩 들어간 것 같은데·
하지만 이제는 좀 보답받을 때도 됐다·
왜 상환받을 겁니다 그거 있지 않았나? 어디서 봤지?
어쨌든·
신공 익히고 영약 반이나 먹었으면 이제는 반의 반 인분 정도는 하지 않을까?
애초에 일 인분은 기대하지도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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