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27
무림맹은 각 무림 방파들의 상급 단체가 아니라서 임무 서한이 날아든다고 무조건 명을 받듭니다 하고 따를 필요는 없다·
하지만 무림대회 이후 첫 번째 임무부터 뻗대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중원에서 체면이란 목숨과 같은 것이다·
물론 목숨과 체면 중에 골라야 하는 일이 생기면 백이면 백 목숨을 고르긴 하겠지만 말이 그렇다는 수준이라는 뜻으로·
그러니 무림대회 끝나자마자 임무 안해요 싫은데요 하면 무림맹의 체면에 먹칠을 하는 셈이 된다·
심지어 청은 잠룡비무회의 우승자다·
당대 정파 무림의 후기지수 중 가장 앞에 선 대표이니 청이 임무를 무시하면 세상에 그 누가 임무를 따르겠는가·
게다가 임무라고 해도 가서 목숨을 걸고 싸워라 하는 내용도 아니다·
그냥 좀 먼 타지에 가서 딱 올 겨울까지만 머물러 달라고·
그것도 가서 고생할 일도 없이 융숭하게 대접이나 받는 일이었으니까·
그러니 뭐 어쩌겠는가· 해야지·
특히나 임무를 피할 수 없는 몇몇 인원이 있다·
개중에 하나는 빙궁의 대표자로 무림맹에 파견되어 지금까지 온통 놀고먹고 하는 일이라곤 없었던 설이리도 있었다·
무림맹이 설이리의 위치를 추적할 방법 따위는 없다·
그러나 부군사보인 사마춘봉이 사람은 참 이상해도 일 처리 하나만큼은 똑부러지는 괴인이었으니 임무 서신마다 별첨된 문서가 있어서 혹시 여기 이름 중 곁에 있는 인물이 있다면 임무를 전해달라고 적어놓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사춘기 혹은 반항기로 말은 지지리도 안 듣고 갑자기 수련에 미쳐버린 수련광이 된 설이리가 청의 손을 꼭 붙드는 것이다·
“서문 소저· 내가 꼭 돌아올게요·”
그리 말하는 설이리의 눈빛이 비장하다·
표정만 봐서는 목숨을 장담할 수 없는 사지에라도 나가는 이가 꼭 돌아오겠다고 말하는 투다·
“소주라고 안 했어? 소주 음· 갑자기 확 땡기네· 방어회에 한 잔 땡기면 크으·”
이건 안 되겠다· 못 참겠다·
청이 내공을 끌어올려 제 속 안 내장 어딘가를 마구 더듬어댔다·
그에 청이 뱃속에 품은 생명이 자극을 받아서 발버둥을 치니 얼큰한 독기가 솟아져 뜨끈하게 속을 데운다·
역시 술병이야· 성능 확실하고·
독기 쪽쪽 잘 빨아먹다가 진기에 두드려 맞은 기생 도롱뇽 혈고 술병이만 억울한 일이다·
나름 몸에 쌓인 독기를 해독해주는 내장형 애완 기생 동물이 아니겠는가·
“아흐으 이거지· 그런데 소주면 좋은 데 가는 거 아냐? 거기 요리가 그렇게 맛있다던데· 아· 구녕이 용돈 필요하니?”
“네· 아니요· 그건··· 으음· 그리고 구녕이라고 부르는 건 싫어요·”
소주라고 했어? 네·
좋은 데 가는 거 아냐? 아니요·
용돈 필요하니? 으음·
생각해보니 아무리 가난뱅이 거지 같은 재력의 설이리라고 해도 냉큼 네 용돈 좀 주세요 할 리가 있겠는가·
주면 받을지 몰라도 청이 물어볼 때만 한정하여 은근히 눈치를 보는 설이리다·
“아· 이런 내가 무심했네· 잠깐만 잠깐 챙겨줄 테니 기다리고 있어봐·”
그렇게 청이 급히 가져다 내민 것이 비단 전낭 한 개였다·
“돈 생겼다고 너무 막 쓰지 말고· 아껴야 잘 살지· 그렇다고 너무 쫌생이처럼 굴지는 말고· 그래도 사람이 전낭이 든든해야 어디 가도 당당하게 걷기 할 수 있으니까·”
설이리가 전낭을 받아들고 꾸벅 고개를 숙인 후에 다시 청을 바라보며 말한다·
“내가 많이 강해져서 지켜줄게요·”
“그래그래· 이 아빠는 듣기만 해도 아주 감동의 도가니란다 우리 구녕이가 이렇게 기특한 소리도 하고·”
그에 설이리가 구녕이라고 까지 말하다 고개를 갸웃거리기를·
“왜 아빠죠?”
“엥? 그럼 엄마해?”
“···?”
“···?”
서로 모르겠다는 눈빛이 오갔다·
설이리는 잠깐 갸웃하다가 그냥 늘 내뱉는 헛소리 쯤으로 넘어가기로 했는지 다시 작별 인사를 건네는 것이다·
“꼭 돌아올게요·”
“아까 한 말 아닌가? 그런데 왜 신녀문에 와? 무림맹으로 가는 게 아니라?”
“네· 지켜주겠다고 했잖아요· 네·”
“그래그래· 자· 배 시간 맞춰야지· 가·”
“꼭 꼭 돌아올게요·”
설이리의 비장한 눈빛에 청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신녀문에서 소주까지 가는 여정은 힘들고 위험하기는 커녕 아주 편안하니 날로 먹는 여행이다·
그냥 자귀에서 배 타고 바닷물 나올 때까지 계속 떠내려가면 코앞이 소주가 아닌가·
이는 사실 사마춘봉의 배려로 중원 땅에 익숙지 않으리라고 추정되는 설화를 위해 절대로 길을 잊어먹지 않을 만한 자리에 배치한 것이다·
그러고 나선 황후에게도 일이 있어서 이만 하산해야 한다고 말을 전해야 했다·
음 말하기 어렵네·
막 붙잡으면 어떡해·
이제 보름이면 제사도 끝나고 알아서 떠날 텐데 더 있다 가지 않느냐고 불잡으면?
매몰차게 거절할 자신이 없는데·
그러나 황후는 의외로 담백했다·
“그래· 자식이 어미를 배웅하기보다는 그 반대여야 사리에 맞지 않겠니· 몸 조심하고 아무거나 주워먹지 말고 아무데서나 졸리다고 자지 말고 욕탕 없다고 대충 씻지도 말고 모르는 사람 따라가지도 말고· 어디 귀여운 짐승 봤다고 쫒아가지 말고·”
“제가 애인가요 뭐·”
“이제 스물 먹은 계집이 애가 아니면 무어란 말이냐· 무엇보다 몸 조심하고· 행여 위험할 것 같거든 이 어미를 생각하렴· 너 잘못되었다 소식을 들으면 이 어미도 같이 목숨을 끊어버릴 테야·”
“그런 말씀 마시고·”
“널 잃고도 목숨을 끊지 않은 이유가 네 시신을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죽지 않으려 한 것이란다· 혹시 이렇게 살아있을까 봐· 무인으로 살겠다니 무인으로 죽게 되는 일도 있겠지만 혹여나 죽게 되더라도 너무 두려워하지 말렴· 우리 꽃돼지 저승길에 어미가 같이 가 줄 테니· 네 목숨에 한 목숨 더 얹혔다고 생각하면 소중히 할 테지·”
너 죽으면 따라 죽겠다는 소리였다·
아무리 봐도 농으로 하는 소리가 아니다·
진짜 너무 무겁다! 진짜!
어쨌거나 황후는 그렇게 의외로 순순히 청을 놓아주었다·
서문수린은 여느 때처럼 담백했다·
“잘 다녀오거라· 바다가 닿아있는 땅이니 제자가 좋아하는 해산물이나 듬뿍 먹고 오너라· 바닷고기 회를 찾지 못해 안달이더라니 이참에 아주 원을 풀어야지·”
“헤헤· 아· 맞다· 이제 초절정이 되었으니 태극혜검이랑 사일검은 뒤로 미뤄도 되지 않을까요? 익힐 만한 무공이 있을까요?”
“으음·”
어디서 자꾸 귀한 남의 비전을 훔쳐오나 싶었더니 실은 공주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나름대로 납득해버린 서문수린이었다·
황궁 무고에 온 무림의 무공들이 죄다 모여있다고 하더니마는 필요한 것이 있으면 구해다 주는 이가 있었던 모양이라고·
그렇다고 진작 익히라고 한 두 종류 무공을 아직 익히지 못한 것을 보면 금방금방 배워오는 것은 아니더라·
빼돌리는 과정이 어렵거나 오래 걸리거나·
“초절정에 이르렀으니 스스로의 무도를 정련해야 할 때다· 그러니 이제는 굳이 남의 것을 탐낼 필요가 있겠느냐? 그래도 굳이 익히려 든다면야 내공은 다다익선이라 강기공 위주의 어려운 내가 공부를 익혀도 좋겠지·”
“강기공· 네·”
서문수린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남의 무공 훔쳐배우라는 것이 도대체가 스승이 할 소린가 싶어서·
하지만 제자는 이제 신투이기도 하니 또 그리 생각하면 뭐 그러할 수도 있지 않나·
신투에 생각이 미친 서문수린이 말했다·
“한림학사에게 서신이나 써 두거라· 네 사정 설명하고 올 겨울에는 못 갈 것 같다고 알려야지· 둘째라도 네 스승이 아니냐·”
“앗·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올 겨울까지 남녕에 머무르는 예정이라면 봄에는 돌아오겠구나· 그러니 한림학사에게 봄 늦게 가도 되느냐고 서신으로 물어보도록 하고· 하던 수련이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아· 맞다· 사부님· 혹시 가도 된다 허락이 돌아오면 장명이 데리고 다녀 와도 될까요? 무림 대회 끝나고 같이 강호 한 번 둘러보기로 약속했는데 이리 되어서요·”
“태원이라면야 나쁘지 않겠지·”
한림원이 직접적인 정치에서 밀려나고선 북경에서 멀어지겠다며 태원으로 이사를 가지 않았던가·
덕분에 태원이라 하면 유림의 총본산이니 가서 배우는 것도 있으리라 하고·
그리고 신투라 하면 도둑놈일 뿐이지만 한림원의 시강학사라 하면 또 유림 선비의 교육을 맡은 거인이다·
서문수린이 두 번째 스승을 선선히 수락한 이유가 이것이었으니 정종 무학이란 유불도의 도리를 따르는 것이라서·
불가와 도가는 경전을 읽혔다만 유가는 서문수린에게도 좀 낯설고 멀다·
그놈의 유가는 유난히 계집에게 가혹하게 구는 막먹은 학문이라 정나미가 떨어진 탓에 그나마 가진 유가 경전도 몽땅 태워버리고 없지 않던가·
그렇게 사부님께도 인사를 드리고·
진장명은 청이 간다고 해도 꽁하고 뚱하니 이전의 그 불량 꼬맹이처럼 못마땅한 표정이나 짓더니만 다녀와서 같이 태원에서 한 계절 나고 올 거라는 소식을 전했더니 돌연 표정을 바꾸어 활짝 핀다·
“약속이야· 늦게 오면 안 돼·”
“얼마나 먼 데라고 늦겠어?”
“멀지 않아?”
“해봐야 낙양 왕복보다 조금 짧은 거리 아닌가?”
“···?”
직선 거리로만 따지자면야 그렇지만·
딱히 험난한 장애물 없는 신녀문과 낙양 사이는 사실 지도에 그어놓은 직선 그대로 말 타고 달려도 딱히 막히는 데가 없다·
논 밟고 밭 밟는 민폐가 되기는 하겠지만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광서성 가는 길은 다르다·
중원 지리에서 서쪽은 매우 높고 동쪽은 낮으며 그리고 북쪽은 매우 높고 남쪽도 높다·
여기에서 높음이 겹치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중첩이 되어 더 높아진다·
그러니 광서성 가는 길은 일단 동정호에 이를 때까지 동쪽으로 쭉 그리고 호남 동부를 따라서 빙 돌아 광동성까지 내려가야 한다·
그렇게 광동에 닿아서야 서쪽으로 뻗어나가는 길이 정석이었다·
그러면 이동 거리가 두 배다·
“그야 마차 끌고 갈 때나 그렇고·”
물론 청은 그렇게 돌아갈 생각이 없다·
그냥 산길 타면 빠르게 갈 수 있는데?
굳이 평평한 길로만 다니겠다고 돌아갈 필요가 있나?
그냥 남쪽으로 쭉 달리면 되는데 뭐하러 빙 돌아가?
어차피 길 좀 잃어도 남쪽만 보고 가면 어쨌거나 도착하는 거 아닌가 하고·
천하일절의 경공 그리고 진짜 아무거나 막 주워먹어도 되는 경이로운 소화력 또 아무데서나 막 자는 친화력을 가진 청이다·
그리고 듣자 하니 길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라던데· 무어· 하고·
—-
중원의 행정성 모양은 아주 삐뚤빼뚤하니 어디는 좌로 길고 어디는 우로 길고 개중 가장 기이한 모양이라는 감숙성의 경계는 아예 길게 몸을 뻗은 뱀처럼 생겨먹었다·
굳이 왜 이렇게 경계가 생겼느냐·
그야 거기에 장애물이 있으니까·
지금보다 더 고대 놀랍게도 사람이 지금 이 원시 고대 미개 중원보다도 더욱 원시 고대 미개한 때가 있었던 것이다·
그 시절의 원시인들은 높은 산과 깊은 숲 그리고 습지를 정복하지 못했으니 발을 들이면 살아나오지 못하는 자연의 험난한 장애물로 감히 드나들지 않았다·
즉 중원 행정성의 경계란 산맥의 십 부 언저리 양옆의 정상으로 이어지는 능성 혹은 아주 울창한 숲 혹은 습지 아니면 밀림으로 구성이 된 것이다·
그나마 이 중 습지는 극복이 되었다·
중원 남부가 본래 습지라서 사람이 살지 못하는 척박한 땅이었으나 이제는 나라의 수도가 동쪽으로 옮겨 북경이 될 정도로 알짜배기 금싸라기 땅이 되지 않았던가·
하지만 청이 목표로 한 직선 길은 작금의 중원이 아니라 미래의 중원에서도 개발이 안 된 오지 중의 오지인 것이다·
다만 이 직선에서 미래에 개발이 되는 지점이 딱 한 군데 있다·
바로 청의 뿌리 한민족의 마음의 고향 한민족의 성지 효도 여행의 시작이자 끝인 지고한 민족의 성산이다·
그 이름하여 장가계!
물론 장가계가 한민족에게 정복당하는 일은 아직 먼 미래의 일이고·
지금은 다른 세력이 장가계를 점령하고 있는 중이다·
굳이 말하자면 장가계라는 이름은 아직 유명하지도 않은 인근의 코딱지만한 소도시에 불과하고 현 중원에서는 천자산이라는 굉장히 지고한 이름으로 불린다·
그리고 천자산에는 아주 큰 산적 무리가 기거하고 있었으니·
녹림· 산림 강도 살해 납치 약탈 종사자 노동 조합이 되시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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