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
아청은 최근까지 참으로 행복했다·
왜냐하면 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삶이 재미가 없다면 재산부터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 해외여행은 재미있고 국내여행은 재미없다 하는 사람의 특징이 꼭 자국에서 돈을 아낀다는 것이다·
추귀인가 하는 놈의 전낭이 굉장했고 약탈은 고대로부터 승자의 권리였다·
아청의 무림 생활 최초로 금자 이상의 재산을 쌓은 순간이었다·
악인의 머리도 관청에 갖다 바쳤다·
높은 악업만큼이나 현상금도 두둑했다·
과장 조금 보태서 전낭이 무거워서 몸이 기우는 바람에 똑바로 걷기가 힘들 지경이었더란다·
그래서 아청은 강호의 미식을 양껏 즐겼다·
연인과도 같았던 늙은 월광검(5호)를 떠나보내고 새로 어리고 어여쁜 월광검(6호)를 맞이했다·
항상 남의 검을 주워다 쓰기만 했지 아예 새 검을 장만하기는 또 처음이었다·
남의 손이 닿지 않은 온전한 내 검·
새삼 애정이 퐁퐁 솟아올랐다·
너는 내가 잘 관리해 줄게·
이전에 쓰던 월광검(5호)는 관리 미숙으로 내부부터 모조리 삭은 상태였다·
철방에서 고철값도 못 준다고 도로 가져가라고 하는 통에 그냥 길가다 슬쩍 내다 버렸다·
거기에 튼튼하고 저렴한 새 옷도 사 입었다·
아청은 큰 깨달음을 얻었다·
돈이 많으면 이 빌어먹을 무림 세상도 즐거울 수가 있구나!
심지어 상태창을 보고도 관대하게 넘어갈 수 있었다· 미식 활동으로 한껏 고양된 기분은 상태창의 발길질에도 굳건했다·
아청의 소비 습관이 이러했다·
당장 미래가 보이지 않는 사람은 저축도 하지 않는 법이었으니 이는 청의 고향에서 세계 각국의 청년들이 보이는 행태이기도 했다·
덕분에 개털이 되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아· 좋았던 날들이여·
남은 것은 월광검(6호) 뿐이었다·
검객의 연인 검·
금자를 반 개나 떼어주고 산 명품이었다·
월광검 우리는 평생 함께하자 응?
사람이 질러야 하는 이유였다·
적어도 지른 물품은 개털이 되어도 곁에 남기 때문에·
“주문 나왔습니다·”
탁· 점소이가 성의 없이 그릇을 내려놓았다·
만두 세 개· 탕국이 하나·
만두를 세 개 이상 사면 탕국을 한 대접 준다·
무림 생활 2년차가 터득한 지혜였다·
현대의 상식과는 달리 강호의 만두란 속이 없이 순 맨빵으로 이루어진 최소한의 식품이었다·
보통 한 문 비싼 객잔에서는 두 문 정도 하는 강호에서 가장 저렴한 음식이기도 했다·
고기가 든 것은 고기만두라는 이름이 따로 있고 가격은 무려 열다섯 문에서 스무 문에 이른다·
무림 생활 2년차의 지혜·
만두가 퍽퍽할 때는 탕국에 적셔 먹으면 좋다·
목이 메이면 탕국을 마시면 좋다·
급격스레 초라해진 식단에 아청이 검객의 연인 애검 월광검(6호)를 내려다보았다·
이거 내다 팔면 얼마나 받으려나·
몇 번 쓰지도 않은 신상인데·
하지만 고작 무림 생활 이 년 차의 지혜였다·
도저히 도검의 중고가격과 감가상각비를 이해할 수 없었기에 일단은 들고 있기로 했다·
그나저나 진짜 돈을 벌어야 하는데·
어쩌지?
아청이 상태창의 무공창을 불러들였다·
볼 때마다 기분이 나빠지는 더러운 물건이지만 쌓아놓은 자유 수련점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자유 수련점은 순간적으로 무공을 익힐 수 있는 수단이며 위급할 때의 한 수가 되어줄 테니까·
월녀검법(진체)과 월녀심결(진체) 그리고 가지고 있는 경신법인 월녀산보(진체)는 어느새 십이 성에 이르렀다·
십이 성이란 해당 무공의 최고 성취였다·
흔히 대성을 이루었다고 하면 무공을 여기까지 익혔다는 뜻이었다·
물론 청의 대성과 무림인이 말하는 대성에는 상태창으로 무공을 익히는 만큼이나 완전히 다른 개념이기는 했다·
청에게는 모든 초식이 다 각인되고 무공마다 추가 능력점과 특수 능력을 얻는 상태를 십이 성 대성이라 했다·
그 외엔 서책점에서 잡다하게 손을 대어 목록만 띄워놓은 무공들이 자리를 잡았다·
하나같이 흰색 테두리를 가진 무공들이었다·
무림생사전의 등급 분류로는 가장 낮은 흰색 테두리 파란색 빨간색 황금색 그리고 가장 높은 보라색 테두리로 구분했다·
제작자가 딱히 등급별 명칭을 정해주지 않아서 공략에서도 흰색 무공 파란색 무공 이런 식으로 표현했던 것 같았다·
참고로 월녀검법 진체본은 보라색 무공이었다·
최고 사기 무공 중 하나라고 했는데 다른 무공을 배우지 못해 아직은 알 수 없었다·
비교는 대조군이 있어야 가능한 행위다·
그리고 지금 보라색 무공을 하나 추가할 시간이었다·
일 년 동안 갖은 고생을 통해 선업 오백 점을 넘겼다·
참으로 긴 모멸의 시간이었다·
선업은 매우 유용하게 쓸 수 있었다·
바로 선업보상·
선업이 일정 치에 도달할 때마다 원하는 무공을 선택하여 익힐 수 있는 게임 내의 시스템이었다·
일 회차 교환이 이루어지는 선업은 오백 점·
참고로 악업은 쓸 데가 없다·
악업은 악행을 저지르면 쌓이는데 보통 그 과정에서 수련점을 낭낭하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쁜 놈만 골라 죽여야 하는 선업수행은 수련점을 쌓기 어려운 대신 선업으로 원하는 무공을 교환할 수 있는 구조였다·
아청은 고민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목표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천마신공 역시 솔깃하긴 했으나 게임 다운로드 중 검색을 통해 천마라는 것이 웃음벨 취급임을 알고 나서는 관심을 끊었다·
요즘 천마는 밥집도 하고 빵집도 하고 재벌도 하고 야구도 한다던가·
정통 무협에서도 주인공의 세 번째 첩쯤 되는 위치에 불과하다고 하니 천마신공이라고 해봐야 이름만 번드르르하고 별 볼 일 없을 것 같다·
아청이 곧장 선업보상을 수령했다·
순간 뇌 속으로 글귀가 무공의 형과 진의가 초식의 모습들이 침입하여 제멋대로 속을 헤집어 뒤집어 놓았다·
저도 모르게 바보 같은 소리가 나온다·
“어억··· 으어 어엑···”
낯선 지식이 뇌로 파고들며 누군가 손을 쑥 넣어 주물럭거리는 듯한 필설로 표현할 수 없는 끔찍하고 더러운 체험이었다·
그러고 나면 꼭 큰 후유증이 뒤따랐다·
이게 말이 되나?
누가 이딴 식으로 무공을 익혀?
사실 여기는 게임 속 세상이 아닐까·
나는 내가 맞고 내가 온전히 판단하여 움직이는 것이 맞을까?
실은 저 하늘 너머 투명한 화면이 있어서 누군가 키보드 두드리고 마우스 휘두르며 조종하고 있으면 어떡하지·
그럼 나는 뭐야···?
아니야· 안 돼· 나쁜 생각 멈춰·
아청이 억지로 생각의 물꼬를 틀었다·
이럴 때는 주접을 떨어야 한다·
한때 현대인으로 존재했던 기억들 아청이 살아있는 객체로 스스로를 규정하는 과거의 흔적을 필사적으로 더듬어 본다·
내가 누구? 바로 여·래·신·장· 오우너·
주성치 게 섯거라· K-여래신장이 간다·
여래신장을 김치에 싸서 드셔보세요·
트럼프가 놀라고 시진핑이 질투하는 K-여래신장 이 무공은 이제 제껍니다·
여래신장은 수박도에 그려져 있으며···
불만 있어요? 중화 사람들? 그러면 저기 붉은 군대 문화대혁명에 문의하세요·
아무 일도 없었다구요?
필사적인 주접 덕분인지 기분이 더 더러워지는 꼴은 면했다·
다만 더 이상 상태창을 볼 용기가 없었다·
사람을 볼 용기도 없었다·
지금은 사람 머리 위에 숫자를 보면 안 된다·
아청이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숙였다·
만두도 꼭꼭 씹었다·
그렇게 꼭꼭 씹었음에도 어째서인지 목이 뜨끈하니 중간에 걸려 메여왔다·
억지로 관심을 돌린다·
눈을 감으니 주변의 말소리들이 귀에 들어왔다·
내공심법 한 개를 대성한 아청의 신체 능력이란 사실 초인에 가까웠으므로 그저 관심을 기울인 것만으로도 객잔 내의 말소리가 전부 들려왔다·
개중 귀에 콕 박히는 목소리가 있었다·
“이봐 표두가 용성으로 간다고 들었는데·”
“아! 혹시 소협의 존함을 알 수 있겠습니까?”
“팽대산이다·”
“옥기린! 세상에 팽가의 장자분이 아니십니까? 이거 참으로 영광입니다! 용성이면 화산까지 가시는 겁니까?”
“표두가 그 이상 알 필요는 없지·”
“아하! 그렇지요· 그렇구말구요· 대협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어이쿠 이리 앉으시지요· 여봐 점소이 여기 탁자 부러지도록 한 상 차리게!”
건방지기 짝이 없는 말투와 갑자기 비굴하게 간드러지는 목소리가 대화를 이뤘다·
아청의 우울한 기분이 한방에 싹 날아갔다·
고수는 그냥 표행에 함께 나서기만 해도 저렇게 대접을 해 주는구나!
세상에 이럴 수가!
신세계였다·
돈이 떨어지면 죽여도 되는 악인을 찾아 어슬렁거리는 아청이였다·
아청이 아는 무협 지식이란 일 년 조금 넘게 굴러다니며 취득한 가난뱅이의 궁상맞은 삶뿐이었다·
그리고 주성치 영화의 몇 장면 정도·
그러니 아청이 하북팽가를 알 리가 없다·
천하 오대세가의 장자란 우리 무천대제 슨배님 황궁을 뒤집어 놓으셨다 사건 이후로 어지간한 왕부의 왕자들보다도 더 높은 분이시다·
곤붕표국도 두 개 성의 유통을 하는 작지 않은 상단이었지만 하북팽가의 이름값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아청은 이런 사정을 몰랐으므로 그냥 고수라면 다 대접을 해 주는구나 생각했다·
쓸데없이 행동력만 뛰어난 아청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기요· 표두님이 용성으로 가신다면서요?”
아청이 표두에게 말을 걸었다·
고수의 당당한 태도였다·
“어 음· 소저는···”
표두가 떫은 표정을 지었다·
지금이 무슨 자리인가·
황금 인맥 중에서도 금강석에 해당하는 귀인을 모시려는 자리였다·
한자로는 관계關係 중화인들은 꽌시라고 읽는 전통적 친분 도모의 장이었다·
그런 자리에 대뜸 끼어드는 객을 보고 표정이 밝을 리가 있나·
“저는 아청이라고 하는데요·”
“아청?”
대답이 옆에서 들렸다·
아까 그 싸가지 팽가의 적자 팽대산의 초저주파 옥음이었다·
목소리만으로 여인이 사르르 녹아내릴 중저음이었지만 아청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팽대산은 의자에 앉아 등지고 있었기에 아청은 고개를 돌리고서야 팽대산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와! 어떻게 이렇게도 잘생길 수가 있지?
옥기린이라는 별호는 과거로부터 대대로 전해지는 전통 중 하나였다·
촉망받는 후기지수 중 제일 잘생긴 놈에게 붙여주는 특수한 별호였다·
그리고 이번 대의 옥기린 팽대산은 중원의 긴긴 역사 속에서도 역대 최강의 미모를 가졌다고 칭송을 받았다·
팽대산의 비공식 별호가 천하제일미남이었으니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아청은 여인으로 의태했을 뿐인 본질이 사나이였다·
그래서 사내의 외모에 흔들리지 않는다·
그저 깜짝 놀랐을 뿐이었다·
와! 얼굴 뭐야! 완전 잘생겼네! 부럽다!
뭐지? 눈앞에 비현실적인 광경이 있는데?
이게 진정 실존하는 사내의 얼굴인가?
만약 세계의 미래와 역사를 통틀어 모든 사내를 외모순으로 줄세우면 영원한 일 위 맨 앞자리를 차지할 것이 분명했다·
정신적 사나이인 아청의 놀라움이 이 정도 수준이었다·
사실 마음의 준비 없이 옥기린의 옥안을 마주한 여인들은 선 채로 의식을 잃거나 아니면 진짜 쓰러져 혼절하는 것이 보통이었던 것이다·
청이 그 미모에 감탄하여 입만 떡 벌리고 있자 팽대산이 한마디 툭 전뎠다·
“아청· 혹시 월녀검법도 쓰나?”
“와· 월녀검법 아시는구나! 혹시-”
“하· 참· 이건 좀 신선한데·”
팽대산이 아청의 말을 끊으며 코웃음을 쳤다·
뭐지? 싸가지의 상태가?
얼굴 좀 생겼다고 나대는 건가?
아청이 띠꺼운 표정을 지었다·
“아청이 본명이라고?”
“어· 그런데?”
“들어본 적 없는 성씨인데· 그럼 가문의 시조께서는 존함이 어떻게 되시는데?”
“어 음· 그러니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하지만 모른다고 하면 너무 수상할 것도 같다·
사실 아청은 대부분 혼자 다녔다·
그나마 잠깐이라도 어울린 대상이라곤 같은 처지의 가난뱅이 정도였다·
끼리끼리 논다고 했으니까·
그러니까 비단옷 차려입은 상류층의 인사법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잘 사는 놈들은 시조까지 물어보는구나 싶을 뿐·
아청이 머리를 굴렸다·
그나마 아는 아씨 성을 가진 인물이 누가 있지?
“왜 대답을 못하나?”
“대답하려고 했거든?”
“그래서 시조께서는?”
“어··· 아수라?”
이게 맞나?
엉겹결에 나왔는데 아수라는 좀 아닌 것 같다·
아수라 17대손 아청· 괜찮은 것도 같고·
“큭 크큭· 크하하핫···!”
그러자 난데없이 팽대산이 빵 터졌다·
아무래도 아니었던 모양·
“좋아· 아주 신선해· 넌 27점이야·”
“뭐가?”
“얼굴은 평범하니 0점· 몸매는 봐줄 만하지만 키가 크니 감점· 가슴이 커서 천박하니 또 감점· 해서 7점· 하지만 날 웃겼으니 특별 점수 20점 해서 27점·”
뭔데 성희롱을 이렇게 당당하게 하지?
분명한 사실은 이딴 태도가 강호의 상류 문화가 아니라는 정도였다·
다른 여인들이라면 치욕과 서러움으로 도망치고 말았겠지만 청에게는 아무런 상처를 주지 못했다·
대신 분노는 했다·
이 싸가지는 용서할 수 없다·
“야· 이게 뚫린 입이라고 아주아무 소리나 찍찍 싸네? 입구멍이야 똥구멍이야? 입에서 똥을 싸요 아주· 내가 27점? 오냐 나는 백 점 줄 테니 참 잘했어요 도장 한 대 진하게 박아주랴?”
“잘은 모르겠지만 한 대 치겠다는 소리 같은데·”
팽대산이 비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좋아· 쳐 봐· 어디 한 번·”
다만 팽대산이 모르고 있는 사실이 하나·
무림 출도 이후 아청은 어지간해선 참지 않는다·
게임인지 현실인지 분간조차 안 되는 존재 자체의 불안함을 가진 아청이었다·
충동들을 인내할 여유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쳐 보라고 도발까지 당한다면야·
그래서 아청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팽대산의 미끈한 뺨에 야무지게 주먹을 빠악! 박아주었다·
그 광경에 표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선업교환 부분 좀더 가독성 있게 수정되었습니당
11·07 다듬기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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