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8
어쨌거나 선물을 받았으면 그 자리에서 시식을 해 보이는 것이 예의까지는 아니어도 참 기분 좋게 해주는 그림이다·
청이 앵속 유액에 절인 잎사귀를 입에 넣고 씹었다·
일단 쓰고 그리고 이상한 맛이었다·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미지의 맛과 식감·
절인 나뭇잎이 입안에서 녹거나 풀어지는 일 없이 그냥 씁쓰레한 즙만 쪽쪽 나왔다·
그렇다고 뱉어낼 정도는 아닌데 맛이 있는 건 또 아니고·
애초에 맛으로 먹는 음식이 아니니 뭐 어쩔 수 있나 싶기도 했다·
그렇게 꼭꼭 씹어 즙을 마시고 천떼기 같은 잔여물도 꿀꺽 삼켜버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몽롱하니 약기운이 퍼져나갔다·
어쩐지 둥둥 뜬 것만 같고 마음이 편해지고 세상 만물이 둥실뭉게한· 그런·
청이 흐느적흐느적 엉덩이로 기어 물러나며 벽에 닿아서야 기대며 축 늘어졌다·
사실 중원에서 앵속은 상비약에 가까웠다·
앵속의 효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열을 내리고 체기를 해소하며 설사가 멎는다·
거기에 아픔과 배고픔을 달래주기까지 하니 세상천지에 이런 신묘한 약초가 없었다·
게다가 잘 죽지 않고 잘 자라기까지 했다·
민간에서 뒷뜰에 몇 대 심어 약용으로 길러내는 일이 당연한 풍습일 정도였다·
여류 무인들이 한 달에 며칠 있는 괴로움을 대비해 품고 다니는 일도 흔했다·
그저 기분 더럽고 좀 앓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도검삼림 비정한 강호는 여인의 사정을 헤아려주지 않는 법이다·
그러니 나머지 둘도 딱히 말리지는 않았다·
창빈은 원래 할 말이 있어도 없는 것과 같아서 민망한 듯 시선만 돌렸다·
팽대산은 그냥 조언이나 한 마디 했다·
“무인에게는 좋지 않다· 정 힘들 때에만 한 번씩만 쓰는 게 좋겠다만은···”
그렇게 말하다 남궁신재를 바라보았다·
적어도 팽대산은 바라보았다고 생각했다·
“한데 남궁 형은 어찌 그 날을 아십니까? 그리 챙겨두기까지 하시고?”
“허어· 팽 아우 눈빛이 영 불순해? 내가 챙긴 것이 아니라 수비구 어르신이 찔러주셨네·”
“수비구 어르신이 말씀입니까? 어찌 그분이?”
개방의 집법장로 수비구 누곡이 비밀에 대한 집착으로 워낙에 유명한 인사였다·
“검우가 처음 만났을 때 하필 음· 패악질이· 음· 그랬지· 나는 세상에 무슨 이렇게 사나운 여인이 있나 생각을 했는데· 아마 어르신도 그 꼴 보셨으니 앵속이라도 좀 물려주고 싶으셨나 보네·”
“아·”
팽대산의 눈빛이 바뀌었다·
패악질· 사납다·
도대체 수비구 어르신은 무슨 꼴을 보셨길래 손녀뻘 되는 여아의 앵속을 직접 챙겨서 보내셨는가·
“아니 그렇다고 그렇게 측은한 눈빛을 보낼 필요는 없네· 뭐 결국 이리도 귀한 검우를 사귀었으니 인생만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딱 그러하지 않나? 안 그런가 검우?”
“예에에· 검우우·”
청이 팔을 들어올리며 화답했다·
본래 앵속은 독하다·
처음부터 하나를 덥썩 물어서 잘근잘근 아주 온통 물을 빼먹고 있으니 안 취할 리가 있나·
본래 앵속을 처음 씹을 때는 잘게 자르거나 아니면 차처럼 끓여 적당히 마시며 조절을 했다·
팽대산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무슨 앵속 처음 씹어보는 사람처럼·
“···설마· 너·”
-귀빈분들· 석식이 준비되었습니다만·
하인이 객을 청하는 소리가 팽대산의 말을 끊었다·
—-
청은 취한 게 아니라 마약을 빨았다·
사실 술도 엄밀히는 마약의 한 종류이며 마약들에는 큰 줄기가 있어서 그 줄기가 다르면 효과도 달랐다·
술이 혈기를 돌게 만들어 기분을 띄우고 성급한 판단을 하게 만든다·
한편 아편은 정신을 흐려 꿈결 같은 편안함을 제공했다·
청은 약효가 돌아 대단히 편안한 상태였다·
마치 신녀문에 머무르던 때처럼·
그리고 신녀문에서는 항상 서문수린의 어검비행을 통한 핵꿀밤 폭격에 행동거지가 버릇으로 고정이 된 상태로 지냈다·
본래 버릇이란 정신이 혼탁하면 혼탁할수록 튀어나오기 마련이니 아편 빨고 혼몽한 청이 버릇을 드러내는 것도 당연했다·
사뿐사뿐 나비 같은 소녀가 길을 누빈다·
팽대산이 인상을 찌푸리고 창빈이 청을 흘끔거렸다·
남궁신재는 원래 별 생각이 없다·
이미 온갖 꼴을 다 본 검우가 이런들 저런들 추하지만 않으면 그만이었다·
대정문 문주 왕개육과 자식들이 눈을 비볐다·
누구야? 아까 ‘그’ 맞나?
과자들이 부모님이라도 살해한 원수처럼 세상에서 치워버리려 씹어먹던 여자다·
그리고 나선 담화 내내 졸린 기색을 심지어 몇 번 졸기까지 했던 왈가닥이었는데?
갑자기 기품 만발한 소녀가 되어 나타났으니 놀라울 만도 했다·
앵속은 배고픔을 잊게 만들고 포만감을 준다
청이 맛난 음식만 천천히 얌얌 골라먹었다·
일동 놀라움 속에서 혼자 다른 감정으로 속이 간질간질한 이가 딱 한 명 있었다·
왕개육의 둘째아들 왕손만이었다·
식사 내내 싱글생글 웃으며 눈을 마주쳐오는 손님 때문이었다·
서문 소저가 나한테 반했나?
아니라기에는 너무나 노골적인 눈빛이었다·
가끔 눈이 마주치지 않을 때는 그의 머리 위 어딘가에 잠깐 초점을 주나 싶기도 한데 금새 다시 눈을 마주쳐 고운 미소를 보내주었다·
왕손만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자부심이 용솟음쳤다·
그래· 나다! 형님이 아니라 바로 나!
이 왕손만이다! 형님이 아니라 나라고!
그에 비례해서 옆에 앉은 옥기린에게서 점차 불편한 기색이 흘러나오기는 했다·
고수의 심기를 거스르게 되어 불안하게 뛰는 심장과는 별개로 왕손만의 콧대가 높아지고 턱의 각도가 위로 올랐다·
옥기린은 너무 잘생겼으니 애초에 오를 생각도 하지 않았겠지? 딱 현실적으로 이 자리에서 내가 바로 내가 가장 매력적인 것이로군·
왕손만이 승리감에 취하고 팽대산이 어째선지 심기가 점점 불편해지고 있는 지금이었다·
청은 그저 좋았다·
바라보기만 해도 좋다는 게 이런 것이다·
-324·
이 얼마나 아름다운 숫자란 말인가·
임무창이 양민을 사람으로 치든 안 치든 상관없이 저 자식은 무림인이니까 결국 나쁜 놈이 맞았다·
쟤네 아빠는 선업이고 쟤네 형도 선업이고 심지어 계속 못마땅한 눈빛을 보내주는 쟤네 여동생도 –17에 불과했다·
일가 중 혼자서 ‘난 달라!’를 외치듯이 삼백 넘는 악업을 가졌으니 신기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무척 고맙고 대견했다·
오후에 다과 자리에서 확인한 인재였다·
이후에 방에서 실종에 관련된 이야기를 듣다가 보니 딱 감이 왔다·
아· 그 새끼구나!
굳이 대정문의 이름을 판 이유?
그야 당연히 그게 잘 먹히니까·
정파인 대정문에서 의뢰한 크게 돈 되는 건수라고 하면 일단 덜 위험해 보이고 또 후환의 두려움도 덜했을 거다·
그런데 그게 먹히려면?
확실히 그 의뢰가 대정문에서 나왔다는 확신을 줄 수 있어야 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이 직접?
당연히 믿을 수밖에는 없을 거 아냐·
그러니까 일종의 명함 사기다·
사기꾼 새끼들 생각이 다 거기서 거긴가 봐·
청이 마약 빨고 들뜬 머리로 생각했다·
이게 인게임에서는 어떤 식이었을까?
동료 이끌고 뭐 증거도 찾고 사람도 찾고 목격도 찾았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범인은 이 안에 있다 외치며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등등 나 말고 다른 사람 명예만 골라 팔아대며 탐정놀이를 즐겼을지도?
보통 NPC공격 안 되는 게임들이· 음모를 다 밝히고 나서야 적으로 판정이 되곤 했다·
그리고 나서야 때릴 수 있는 것이다·
근데?
이게 게임인가? 사실 나도 몰라?
그렇다고 내가 공격을 못 하나?
그건 아니거든·
상태창? 막을 수 있으면 막아 보시겠어요?
좆까· 난 내 좆대로 한다· 좆은 없어졌지만·
그래도 사나이 영혼에는 좆이 남았다고 믿어·
청의 미소가 점차 흉흉해졌다·
다행히 천살이 넘쳐서 방싯거리던 소녀가 갑자기 살기를 줄줄 뿜는 대참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때를 맞춰 식사 자리가 파했기 때문이었다·
식사가 끝나고 일어나 객실로 돌아가는 때·
청이 왕손만을 스쳐 지나가며 슬쩍 속삭였다·
“공자님 자시 넘어 쪽문에서 봬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왕손만의 코에서 콧김이 흥 빠져나왔다·
—-
심지어 청은 약기운에 살풋 졸다가 늦었다·
물론 청의 잘못은 조금도 없었다·
지각의 책임은 전부 방 안에 시계조차 없는 미개한 중세 중국 원시인 새끼들에게 있었다·
한편 청은 몰랐지만 대정문에 쪽문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래서 왕손만은 축시가 가까워서도 문파의 쪽문들을 왔다 갔다 맴들며 속을 태웠다·
혹시 나를 가지고 놀았나?
생각해보니 그 쟁쟁한 천무대원을 두고 나를 고를 이유가 없다·
심지어 그렇더라도 문파의 후계자를 두고 굳이 둘째에게 지분거릴 이유도 없다·
하지만 그 눈빛·
잠깐 졸아서 늦는 거라면?
그렇게 왕손만이 한 시진 반을 서성거렸다·
현대식으로 따지자면 여자 한번 따먹겠다고 세 시간을 마냥 서성거렸다는 뜻이었다·
사나이의 슬픔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아· 공자님· 늦어서 죄송해요·”
“아닙니다· 낭자· 저도 이제 나온 참이 아니아니 그리 오래 기다렸···지만 괜찮습니다·”
왕손만이 으레 나오는 대답을 하다 이상함을 깨닫고 말을 바꿨다·
한 시진 반이 넘게 늦었는데 이제 나왔으면 안 된다· 오래 기다리지 않았다고 하면 늦게 나온 놈이 되어버린다·
“그 공자님· 이런 말 여쭙기 민망한데···”
“무 무엇입니까?”
“혹시 어디 크게 소리를 지르더라도 들키지 않을 만한 장소가 있을까요?”
“헉·”
왕손만이 저도 모르게 남은 숨을 내뱉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
본 작품은 허용되는 범위에서 가능한 한 고증을 지키려고 노력중입니다·
그러나 작가가 아편잎을 씹어본적이 없고 찾아볼 수도 없어서 어물어물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혹시 독자 여러분들 중 그 맛과 향과 식감을 아시는 분이 있으시면 부디 댓글로 달아주시면 신고하겠습니다·
8/25 수정··
작가놈이 아편과 대마를 대충 섞어 알고있었나 봅니다· 검색이라도 한번 해 볼걸 그랬습니다·
해당 부분 수정합니다· 아편잎은 안전하니 독자 여러분들께서는 마음 놓고 드셔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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