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9
정보를 캐낸다는 측면에서 고문은 대단히 비효율적이었다·
고문은 상대의 반감을 사는 행위다·
고문으로 한껏 적대감이 고조된 대상이 털어놓는 정보를 어떻게 신뢰할 수 있을까·
게다가 피고문자 고문을 받는 사람은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고문자의 눈치를 본다·
정확한 사실의 전달이 아닌 고문자가 듣고 싶은 내용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청은 어차피 모르는 사실이었다·
알았어도 상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악의가 있었다·
늘 집요하게 속삭이는 강력한 충동이었다·
피와 피· 그리고 더 많은 피·
비명· 고통의 아우성· 피가래 끓어 쌕쌕· 연약하게 겨우 붙은 숨결· 억지로 삼켜 틀어막힌 울음소리·
초점 없이 멍하게 풀린 자리를 잡지 못하고 세차게 떨리는 죽음의 직감 앞에 허무/불신으로 확장되는 전부 다른 매력의 눈동자들·
그 모든 고통의 순간들이 너무 아름다워서·
부르르 몸이 떨리고 가쁜 숨을 참을 수 없어 몸뚱의 모든 신경이 뼈와 마디가 근육이 불타오르는듯한 끔찍한 쾌락이 있었다·
아· 이래서 예술가들이 미쳐 사는구나·
수은 증기 먹으며 그림을 그리고 폐병 앓아 쿨럭쿨럭 피를 토하며 글을 쓰는 이유였구나·
그러다 단명한 인생이 불운하지 않았겠구나·
평생 행복하다 갔을 테니까·
그래서 청의 태도는 고문과는 달랐다·
차라리 진리를 향한 탐구나 종교적 예배 의식에 가까웠다·
살을 헤집고 근육을 뒤집으며 신음과 비명과 숨소리로 대상이 받는 피해를 본능적으로 가늠했다·
산 것을 산 채로 해체하며 어떻게든 그 생명을 유지시키는 방법을 알기 위한 탐구였다·
그렇게 살려 더 많은 고통을 주기 위해서·
그래서 청의 손길은 섬세하고 조심스러웠다·
모처럼 손에 넣은 하나뿐인 교보재였다·
문득 청의 손길이 멎었다·
아· 여기서 뭘 더 건드리면 위험할지도?
근거 없는 직감이었다·
에이 한참 좋았는데·
청이 입맛을 다시며 물러났다·
“제발 제발 차라리 죽여주세요···”
사람 모양의 혈인이 된 왕손만이 빌었다·
비명으로 혹사당한 성대는 모래 긁는 소리를 내고 쥐어짜진 폐는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너 나쁜 짓 한 거 있지?”
청이 키득거렸다·
“우린 비밀 친구잖아? 나한테만 살짝 말해주지 않을래? 무슨 짓을 하면 삼백 점을 넘어?”
그래· 이걸 먼저 알아냈어야 하는데·
생각 없이 목이나 뎅겅데겅 날려버렸지 뭐야·
나 너무 생각없이 살았나요?
인정하고 또 반성합니다·
근데 어차피 이 세상이 잘못한 거잖아·
잘 살던 사람을 대뜸 납치해서는·
“제가 제가 사람들을 속였습니다···”
“아· 실종된 사람들?”
청이 고개를 갸웃했다·
“에이 아니지· 꼴랑 그걸로 마이너스 삼백 점이 되겠어? 사람 좀 속인게 그렇게 나쁜 짓이야?”
“그 사람들 돌아오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아· 알면서도 죽을 자리로 보내셨다? 그건 좀 말이 되네· 얼마나 보냈는데?”
“일주일에 둘 셋· 그렇게 반년이 넘었는데·”
“뭐야· 그럼 이 쩜 오 잡고· 사 주에 열 명· 반년이 넘었으면 대충 육십 명은 넘는 거네? 음· 음· 그정도면 합격이지·”
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소 육십 명을 죽음으로 내몰았으면 악업 삼백 점 쯤 되나 보다·
아니 아니지· 아닌가?
나쁜 놈 죽이는 건 선업인데?
“그게 다야?”
“마공 마공도 익혔어요·”
“마공? 무슨 마공?”
“섭심공···”
어차피 청은 무공 몰라요다·
하지만 이름만 들어도 뭔지는 알 것 같았다·
섭심공· 심장 먹는 무공이라지 않는가·
사실은 청의 생각보다 더 흉악한 마공이었다·
섭심공은 변질된 밀교의 비전으로 연단술로 정제한 심장을 섭취해 내공의 성취를 이뤘다·
사이한 대법으로 아홉 살 아이의 진원을 심장으로 옮겨야 섭심공의 흑심이 완성되는데 이 과정은 끔찍한 고통을 수반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익히는 이의 자질과 체질에 상관없이 먹은 심장의 숫자만으로 척척 성취가 올랐다·
사실 대성을 이루어도 엄청난 내공의 증진이 있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 끔찍한 연공 방식과 척척 내공 고수를 뽑아낼 수 있다는 가능성이 문제였다·
섭심공이 천하에 끔찍한 마공으로 널리 알려진 이유였다·
“그래서 심장을 드셨다?”
“그 사람들이 가져다 줘서···”
“그 사람들?”
“정체는 몰라요 정말 정말로 모릅니다·”
거짓말을 같지는 않았다·
청이 뒷목을 살살 문질렀다·
“아니 왜? 모르는 놈들한테 사람 바쳐가면서 마공을 익힐 필요가 있어? 그것도 사람 심장 먹으면서 아니 그건 좀 맛있을 것 같긴 한데· 좀 신선한 상태로 오냐?”
“무슨····”
청이 제 뺨을 짝짝 때렸다·
“아니 시발· 식인은 좀 아니지· 미안· 정신이 좀 오락가락 하네· 어쨌든 왜? 굳이?”
“문주가 문주가 되고 싶어서···”
들어 보니 생각보다 더 쌍놈이었다·
그 사람들의 집단이 빼돌린 양민들로 무언가 작업을 하고 있으며 그게 끝나면 대정문으로 습격해 올 계획이라고·
그때 장남 왕손석이 크게 다치고 차남 왕손만이 멋진 활약 끝에 적들을 물리칠 예정이었다·
그제야 청의 마음속에 기쁨이 피어올랐다·
아· 이거 악업이 악업 값은 하는구나?
어차피 개쌍놈들이었네 잘 죽였다·
그간 해왔던 취미생활이 실제로 세계 평화에 이바지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새삼 보람을 느껴 뿌듯해지는 것이다·
“그럼 이제 다 말했으니 살려주시는·”
“뭐야 아깐 죽여달라며?”
“제발···”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는 두렵다·
놀라운 집중력으로 인체의 신비전을 자습하던 상태의 청이 그런 상태였다·
하지만 대화가 통하고 나니 살그머니 살고자 하는 소망이 틔어오는 것이다·
“뭐· 인심 썼다· 덕분에 고민 해결도 했고·”
“살려주시는···”
얼굴 가죽이 벗겨진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그 얼굴에 선연한 희망이 피어오른다·
사람이 생을 원하는 의지가 새삼 대단했다·
물론 이 새끼가 팔아넘긴 사람들도 그랬을 테지만·
그러니 아직 죽일 수는 없었다·
세심하게 죽지 않도록 신경 써서 살려놨는데 이제 죽여버리면 다 물거품이 되고 마니까·
“뭐· 그래· 이번만 봐 드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항상 감사하십시오· 알간?”
그렇게 즐거운 시간도 끝!
항상 즐거운 시간은 이렇게 빨리 지나가는지·
청이 아쉬움을 느끼며 왕손만을 이불 위로 대충 던져놓고 질질 끌어 밖으로 향했다·
왕손만의 기대와는 다른 방식이지만 결과적으로 이불 위에 눕기는 한 셈이었다·
그러니 아주아주 일부나마 목표 성취다·
청이 철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이미 해가 쨍쨍하게 뜬 이후였다·
생각해보니 소리 안 새는 곳을 아느냐니까 이런 수상한 지하실로 안내한 데에서부터 이미 싹수가 노란 놈이었던 것 같다·
아마 몰래 심장 파먹고 모르는 사람들 만나고 한 장소였겠지·
의외로 청은 멀끔한 꼴이었다·
물론 소매는 질척하고 손으로 문지른 얼굴이며 목덜미엔 굳은 피 부스러기가 잔뜩이었다·
그래도 평상시 아주 뒤집어쓰던 꼴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굉장히 깔끔한 모습이긴 했다·
지하실이 대정문과 그리 멀지 않았던 탓에 청은 금방 대정문의 도객들을 맞이했다·
—-
아침부터 대정문은 아주 바빴다·
귀한 손님이 실종되고 둘째도 겸사겸사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니까·
객의 눈치를 보아 문도를 풀어 수색을 실시하긴 했다·
하지만 사실 대정문주 왕개육은 딱히 걱정하진 않았다·
그냥 아침부터 볼일이라도 있어 나갔거니·
잠룡지회의 청년 고수들은 걱정이 되는 눈치였으나 본래 황천이 흉흉한 도시가 아니다·
왕개육은 그렇게 굳게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라졌던 객이 질질 끌고 온 무언가그것이 왕손만이라 주장할 때는 놀라서 쓰러질 뻔했다·
사람은 예상하지 못한 충격에 약한 법이다·
그러나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둘째를 급히 의당으로 보내고 난 이후에 객이 한 말 때문이었다·
“걔가 실종자들을 속여 빼돌렸대요· 직접 들었어요· 나쁜 놈들과 손잡고서 형 죽이고 후계자 자리를 차지할거래요·”
“말도 안 돼! 그런 증좌가 증거가 있나? 저 놈이 불퉁하긴 해도 그런 사악한 짓을 꾸밀만한 자식은···”
“섭심공을 익혔다던데요? 고수를 부르면 알아볼 수 있지 않을까요?”
“섭심공!”
왕개육이 탄식하며 비틀거렸다·
옆에 있던 왕손석이 급히 부축하여 받쳤다·
“그런 그런···”
정말로 왕손만이 마공을 익혔다면 그걸 확인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굳이 확인이 어렵지 않은 거짓말을 하겠는가·
그야말로 상황을 뒷받침할 완벽한 증거였다·
그때 청이 짝짝 손뼉을 치며 이목을 샀다·
“자 그럼 다음· 모르는 사람들 집단이 사람들을 끌고 간 장소도 알아냈거든요?”
청이 왕개육을 빤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대정문도 결국 책임 있는 거 아시죠? 그럼 같이 가셔야지 않겠어요?”
끌려간 놈들은 없어져도 신경 쓰는 이 없는 시궁창 막장 인생들이었다·
그러니 딱히 구출해야 한다! 하는 건 아니다·
뭐 겸사겸사 살아있으면 구할 수도 있지·
솔직히 도박 빚에 마누라까지 팔았다는 새끼를 굳이 공들여 구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남겨진 사람은?
청이 자식을 찾아달라던 할머니의 얼굴을 그 간절했던 표정을 떠올렸다·
인생 얼마 안 남으셨더라도 할머니는 할머니 남은 생을 사셔야 했다·
다 큰 아들내미 찾아 온종일 반검객들 붙들고 애원이나 하고 다녀서는 안 되는 거다·
어쩌면 이하삼은 진짜 마지막으로 손을 털고 아내 찾아 잘 살수도 있을거다·
아니면 저쪽 세상 강원도 아귀 지옥에 붙들린 도박쟁이들마냥 다시 처자식 팔아넘길 씨발놈일지도 모르고·
하지만 그런 놈 때문에 남은 사람이 미련으로 붙들려서는 안 되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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