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2
청의 복신적에서 구슬픈 소리가 새어나왔다·
여기에는 눈물 없이 들을 수 있는 감동적인 서사가 있었다·
일전에·
서문수린이 복신적을 돌려주며 말하길·
“이 스승은 이미 늙었으니 손때 탄 정겨운 벗을 두고 굳이 새 피리가 필요하지 않구나·”
그러자 청이 주접을 떨었다·
“사부님 무려 일만 금짜리 초 명품이거든요? 지금이라면 천하의 보물이 공짜! 오직 사부님을 위한 혜택! 제자의 뜨거운 마음!”
핵꿀밤으로 응징하려던 서문수린이 멈칫했다·
복신적은 무가지보 가격표 없는 보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보물의 가격을 달면 일만 금 정도가 된다·
일만 금 아래로는 보물에 어울리지 않는다·
일만 금 이상으로는 어차피 대대손손 일하지 않아도 먹고 살 만한 금전이었다·
그러니 일만 금이나 이만 금이나 별 차이가 없는 것이다·
서문수린이 놀란 것은 청이 의외로 복신적의 가치를 정확히 알고 있어서였다·
몰라서 주는 것이겠거니 했더마는·
가치를 알면서도 스승에게 주는 선물이라면서 망설임 없이 척 내밀었으니·
늙은이의 마음속이 진한 감동의 파문으로 일렁거렸다·
그래· 애는 참 착하지·
천살을 타고나고서도 이렇게 바른 아가다·
그냥 아가가 좀 많이 맹한···
아니 그래도 정도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맹물도 이렇게 맹하지는 않을 터인데?
그러나 고마운 것은 고마운 것이었다·
제자의 마음이야말로 갸륵하여 참으로 기쁘고 어여쁠 수밖에는·
서문수린이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마음만 받을 터이니 네가 쓰도록 하려무나·”
“하지만 전 연주할 줄도 모르는데요·”
“모름지기 여인이라면 적어도 사예 중 하나는 능히 할 줄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사예는 금(예악) 바둑 서예 그림을 말했다·
중원에서 최고로 치는 취미였다·
고작 취미가 아니다·
현대로 따지면 요트 승마 골프 클레이사격쯤 되는 취미였다·
이를 즐긴다고 하면 사람이 참으로 고급지고 품격있게 보이지 않는가·
중원에서 사예가 그랬다·
“마침 좋은 피리가 있고 음악이 사람의 마음을 온화하게 다스리니 마를 가라앉히는 치심의 도구로다· 제자의 살성을 가라앉히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야·”
그렇게 수련과 더불어 부전공으로 피리가 추가되고 만 것이다·
그래서 겨울 내내 추워 죽겠는데 아주 피리만 오지게 불었다·
당연히 그 곡조가 서글프기 그지없고 마음이 저절로 동하여 눈물이 주르륵 흐를 수밖에는·
그런데? 한 번 소리를 떼더니 잘 분다·
아니 잘 부는 수준이 아니었다·
서문수린이 듣기에는 세상에 없던 곡조가 마음대로 튀어나오는 수준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성과에 절로 찬탄이 튀어나올 정도였다·
“그야말로 예악으로 일가를 이룰 아니 아예 역사를 쓸 천하의 재능이로다! 제자가 이러한 재능이 있었을 줄이야!”
그러면 청은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려다가·
몹시 춥고 또 추워서 덜덜 떨며 이불이라도 한 장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서문수린을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돌아오는 것은 없었지만·
물론 그 재능의 정체는 표절이었다·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저마다 기억하는 곡조가 있는 법이었다·
일부의 극으로 치우친 분류가 아니면야 중원 사람들 귀에는 시대를 뛰어넘은 그보다 더한 근본적인 음악 형식의 틀을 깨는 충격이 되고 마는 것이다·
개중에서 신녀문도들이 최고의 곡조로 꼽는 것이 둘 있었다·
대포 변주곡과 회전목마·
물론 그 희망적인 찬가 어디에 대포라는 흉악한 이름을 붙였는지 이해할 수 없다·
또 대체 회전하는 목마라는 듣지도 보도 못한 기물과 삶의 지나간 아름다움을 불러일으키는 서정스러운 곡조가 무슨 상관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일말의 감조차 잡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뭐 어때· 곡이 좋은데·
청에게는 오랜만에 고향의 향수를 불러오는 출도 이전의 증거물이었던 것이다·
이전의 생활이 썩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혼자 만족하며 살았더란다·
그래도 그 시절이 지금 이 너무 춥고 창피한 꼴보다는 나았다·
그러니 피리 들고 불어대는 곡조가 이 세상 존재하지 않는 추억일 수밖에는·
—-
무림맹 본단이 발칵 뒤집어졌다·
새로 확인된 보고 때문이었다·
발단은 장강 수로채의 항의에서부터였다·
무림맹의 독행 순찰이 회라고 하는 암중 세력의 일부였으며 혈강시 생강시를 다루는 사악하기 그지없는 술사였다는 것이다·
심지어 수로채주의 아들이 목숨을 잃었다·
무림맹에서는 당장 진주의 언가로 무인들을 보내 그 진위를 파악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이미 그 수명을 다한 진주언가의 장원으로 되돌아왔다·
의외로 집이란 유지와 보수를 내내 끊임없이 해주어야 하는 손이 많이 가는 재산이었다·
청의 모옥처럼 오매불망 누군가를 기다리며 쓸고 닦고 해주는 꼬맹이라도 없으면 아무리 큰 집이라도 금방 폐가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리하여 조사대가 진주언가의 장원으로 들이닥쳤을 때는 이미 사람이 산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폐가뿐이었다·
놀라운 것은 도시 사람들의 증언이었다·
겨우 칠 일 전까지도 진주언가에 드나드는 수많은 세가원들을 보았다고·
이는 언연영이 세가를 몰살시키고 전원 강시로 만들어 부렸다는 그런 자백을 얻어냈다고 하는 장강수로채의 증언을 뒷받침했다·
애초에 진주언가에 사람이 살지 않았다·
식인마군과 중원 제일 강시 술사가 속한 세력이 있으며 무림맹의 눈을 감추고 턱 밑에서 활동할 정도로 용의주도한 세력이었다·
무림맹은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무림맹이 그 무겁고 거대한 몸뚱이를 움직이려 하는 것이다·
—-
사실 서문수린이 청에게 벗으라고 한 말은 수련이 아니라 체벌이었다·
경각심도 없고 아둔하며 심지어 마공까지 짠 하고 익혀 사문과 스승을 위태롭게 만든 심히 패륜적으로 괘씸한 제자였다·
그렇기에 했던 가장 강력한 처벌이었다·
그런데?
본래라면 울고불고 눈물 줄줄 흘리며 제자가 잘못했으니 제발 그것만은 피해달라고 애원을 해야 맞았다·
아무리 여인끼리 산다고 해도 그랬다·
심지어 항렬 아래의 제자들에게 알몸보다 더한 꼴을 보이는 수치였다·
서문수린이었다면 차라리 혀를 깨물었지 그렇게는 안 했다·
아니면 스스로 단전 깨고 사지근맥 자른 후에 더럽고 치사해서 제자 안 한다고 뛰쳐나갔을 것이다·
그런데? 제자의 상태가?
세상에! 어쩜 수치심조차 없구나!
조금 부끄럼을 타기는 하나 딱 그뿐이었다·
수치보다는 추위가 더욱 큰일이었다·
그건 서문수린에게 지금까지의 제자가 보여준 모습 중에서도 가장 큰 위기감을 느끼도록 만들었다·
여인으로서 수치심을 몰라서는 안 되는데·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음을 몰라서야·
그래서 아예 속옷과 침구를 압수하고 모옥의 창문과 문짝까지 전부 떼버리지 않았던가·
제자가 얼마나 창피하고 망측한 꼴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저 떨기만 하고 부끄러움을 모른다·
기가 차서 내버려두었다·
그리고 혹여 밤중에 얼어죽지는 않을까 몰래 살폈더니·
이런 세상에!
호신경이 저절로 일어 몸을 보호하지 않는가!
호신경이란 내기로 신체를 보호하는 기예를 말한다·
청은 매일 밤 잠들 때마다 살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호신경을 둘렀다·
그리고 호신경에 있어서 최고의 기예로 여기는 것이 바로 이런 무의식적인 운용이다·
위험할 때 의식하지 않아도 튀어나와야 진정 몸을 보호하는 호신경이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실상은 초절정에 올라서 호신강기를 사용하는 고수들조차 큰 대결에서 애써 진기를 끌어올려 의식으로 사용했다·
호신경이 숨 쉬는 일처럼 당연한 경지라면·
화경 중기에는 들어서야 하는 정도였다·
적이 화경 중기에 이르면 기습으로도 승기를 잡을 수가 없는 이유다·
서문수린이 생각을 고쳐먹었다·
창피한 줄 모르는 제자가 아닌가·
차라리 이참에 호신경이 당연하게 자연스러운 기예에 이를 수 있다면·
강호에 나가서 최소한 목숨을 잃어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강력한 보신갑을 항상 두르고 다니는 셈이다·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서문수린은 그래도 제자가 살아서 숨쉬기를 바랬다·
이래서야 자식에게 업을 지운 양소월 그 막되먹은 탈주 제자를 욕할 자격이 없다·
나중에 평생 상처로 남게 될 수도 있음에도 살기를 원하는 어미의 마음이 이러했으리라·
그저 영원히 몰라서 고생했던 추억으로 남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못된 스승의 지독한 이기심이 미안하구나·’
학대다·
세상 어떤 스승이 제자를 이런 꼴로 지내게 만든단 말인가·
나중에 원망을 듣고 원수로 여겨져도 할 말이 없으리라·
그러나 제자가 칼을 들이미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의 기연을 포기하게 만들 수는 없다·
다시 강호로 나가야 할 제자였으니까·
세인들이 알면 손가락질을 할 결정이다·
서문수린은 전부 감내하기로 했다·
물론 청이 알았다면 괜한 걱정 하신다고·
그런데 그럼 잘 때에만 추우면 되지 괜히 온종일 벗고 다닌 거 아니냐면서 억울한 심정으로 주둥이 불퉁하니 내밀고 툴툴거리고 말았겠지만·
어쨌든 서문수린에게는 큰 결단이었다·
-그런 이유로·
신녀문도들이 이득을 보았다·
한기가 뼈에 사무치는 청과는 달리 신녀문의 겨울은 유달리 뜨거웠다·
신녀봉이 아니라 화산봉이라도 해도 될 정도·
물론 망측스럽고 천박한 옷을 입고 다니는 사문 최고 항렬의 막내 어른 때문이었다·
속이 어설프게 비치고 몸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나는 얇은 천떼기를 옷이라 분류해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연인 앞에서도 차마 할 수 없는 꼴이었다·
정말이지 강호에 색으로 이름난 요녀라 해도 하지 않을 야릇한 차림새다·
그러나 차림새와는 달리 청은 완전히 희게 질려 덜덜덜 떨어대기 바빴다·
처량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그 처량함이 요사함을 감춰 그저 가련함으로 활짝 피는 아름다움으로 화했다·
그러다 피리를 불면 또 언제 떨었냐는 듯-
물론 피리 분다고 내공을 일으키니 그때는 또 추위가 가신다·
-절절한 그리움으로 물든 구슬픈 눈빛을 하고 아름다운 곡조를 연주하는 미인이 강림했다·
본래 예악이 가지는 매력이 배경으로 세상에 없던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것에 있었다·
둘도 없이 망측한 차림새가 오히려 이 세상에 없던 감흥을 끄집어냈다·
우아하게 야하다! 차분하게 야해!
움직이는 춘화집 그 자체!
그냥 야해! 어쨌거나 너무 야해!
완전 마라 파피야스!
마라 파피야스는 불교의 최고 악신이다·
놀랍게도 세상 신화가 통하는 점이 있어서 성경에서 말하는 루시퍼와 같은 역할이었다·
마라는 욕망을 관장하는 신이자 번뇌의 상징 혹은 그 자체를 뜻한다·
마공 할 때의 그 한자 ‘마’가 마라를 말했다·
세간에는 명상하는 부처를 유혹하다 퇴짜맞은 사건으로 더욱 유명했다·
어쨌거나 우아하든 차분하든 결론이 같았다·
보기만 해도 어쩔 수 없이 몸이 달아오르고 단전 뒤편에서 열기가 피어올랐다·
그러니 이 추운 때·
너도나도 손깍지 끼고 한 몸처럼 찰싹 달라붙은 제자들이 이상하게도 너무나 많았음이다·
심지어 항렬의 준엄한 벽을 뚫고 한 잠자리에 드는 사제지간도 몇이나 될 정도였다·
겨울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
zakuti님! 항상 사랑해 주셔서 감사함니다·
요즘 재미있는 댓글들이 많아 심심하면 읽고 또 읽고 있담니다·
저도 끼어들고 싶지만 작가는 침묵하는 것이 작품을 위한 선택이 되겠지요··
다만 수정 메세지에 한해서는 제가 남기지 않으면 지적해주신 공짜 맞춤법 검···이 아니라
고마우신 분들이 엄한 부분 지적하는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리시고 말까봐 달고 있읍니다··
후원에도 항상 감사드립니다!
후원 유도가 될까 봐서 따로 감사드리지 못하는 점 이해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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