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3
낮에는 제법 따뜻한 봄볕이 찾아오나 싶었다·
그러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온화해졌다·
시간이 어쩜 이리도 빠르게 흐르는지·
어느새 꽃은 피어오르고 날은 화창하니 한창의 봄이 흐드러졌다·
청이 벗은 채로 돌아다닌 날짜가 겨울의 초입으로부터 초봄 쌀쌀한 날씨를 쇠기까지 무려 사 개월이 조금 넘었다·
청의 모옥에는 다시 창문과 문짝이 붙고 침구가 자리를 잡았다·
사라진 의복과 속옷도 돌아왔다·
하지만 이 차림새 너무 편한데·
원통형으로 이어붙인 아주 얇은 반투명 천에 어깨끈 두 개를 단 의복?이었다·
팔랑팔랑 무게감이 없어 가볍기도 하고·
허벅지까지 오는 기장도 움직임에 전혀 걸리는 데가 없어 편했다·
최애 잠옷의 탄생이었다·
편한 잠옷 입고 이불에 들어가 누우면 극락이 따로 없었다·
무엇보다 속옷을 안 입은 것이 신세계였다·
처음엔 민망해서 죽을 것 같았는데·
익숙해지고 나니 정말로 세상에 이보다 더한 해방감이 또 있을까 싶었다·
그야말로 자유 그 자체!
미개 원시 중화의 직조 기술이 신축성 있는 옷감을 발명하지 못한 탓이었다·
끈으로 매듭지어 묶어야 하는 불편함이란·
청에게는 매번 큰 고역이었다·
덕분에 한동안은 하루하루가 핵꿀밤이었다·
아씨 도대체 속옷 안 입은 걸 어떻게 그렇게 바로바로 알아차리시지?
고수가 되면 혹시 투시 능력이라도 생기나?
아니 그렇게 추울 때는 못 입게 하시더니·
좀 살만하다 싶으니까 또 안 입었다고 패고·
청의 입술이 불퉁하게 튀어나왔다·
서문수린이 그 꼴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예 헐벗고 돌아다니게 해야 했나···”
“그래두 달라지는 건 별로 없었을 악·”
괜히 말대꾸를 붙이던 청이 핵꿀밤을 맞았다·
하지만 청의 비명의 크기가 많이 줄었다·
겨우내 자리를 잡은 호신경 덕분이었다·
이젠 핵꿀밤 정도는 가뿐한·
따악!
“끄악!”
청이 바닥을 굴렀다·
인간은 진화하는 생물인 것이다!
하물며 여인으로 태어나 쟁쟁한 남자 고수들을 다 제끼고 무림 천하 십 대 고수로 우뚝 선 서문수린이다·
서문수린의 삶이 투쟁 그 자체였으니 핵꿀밤의 위력 조정 정도야 간단했다·
애초에 절정 후기의 호신경이 아무리 대단한 것이라도 무려 현경의 주먹 앞에서는 종잇장만도 못했다·
“제자는 어쩜 점점 방만해지는구나·”
“끄흑· 진짜 아파요···”
“아프라고 때렸으니 아프겠지 그럼 간지럽겠느냐? 어찌 나이를 한 살 더 먹었음에도 외려 더욱 아이처럼 구는지 이해를 못 하겠구나·”
“헤헤···”
청이 멋쩍게 웃었다·
서문수린이 아예 고개를 돌려버렸다·
스승에게 점점 정이 붙으니 어리광을 부리는 그 마음을 몰라서 하는 소리겠는가·
서문수린도 제자 앞에서 계속해서 물러지고 있음을 경계하고 있는 참이었다·
그래도 처음 보았을 때는 영락없이 사내놈처럼 굴었더란다·
이젠 선머슴처럼 거칠기는 해도 여자아이는 같아서 이걸 나아졌다고 해야 할지·
“그래 곧 떠날 생각이겠지? 이번엔 어디를 다녀올 생각이더냐?”
“음· 잘 모르겠어요· 그냥 발길 닿는 대로?”
“그러면 아미파에 한번 들르거라·”
“오오으· 아미파요?”
청이 오우를 겨우 참았다·
하지만 아미파라니? 범상치 않은 이름이었다·
어쩐지 덕이 높을 것만 같은·
“그렇단다· 이 스승이 아미파의 방장 대사와 친분이 깊으니 안부도 물을 겸 가서 불가의 기본 심법들을 좀 배워오너라·”
“어 그렇게 막 가르쳐 주실까요?”
“아무렴· 정철연니라면 기꺼이 전수해 줄 것이니 제자는 혹여라도 걱정할 필요가 없단다·”
“그런데 아미파가 멀까요?”
“가는 길이 편치는 않아도 그리 멀지는 않지· 바로 서쪽의 사천 땅에 있으니·”
“사천!”
청이 탄성을 내질렀다·
현대 한국인에게 가장 익숙한 지명이었다·
사천이라면 떠오르는 것들이 많았다·
사천 짜장 사천 탕수육 사천 짬뽕에 마라탕 마라룽샤까지!
그야말로 고추기름이 강 대신 흐르는 미식의 대지가 아닌가! (아님·)
출도 이전에도 매운 것을 즐긴 청이었다·
하수 시절에는 살아남기 급급해 감히 가 볼 생각을 못 했고 고수가 돼서는 잊고 있었다·
“다만 절검벽은 초절정에 이르기 전까지는 닿을 필요가 없느니라· 제자의 하찮은 수준에 무제께서 남긴 심득을 얻어도 개 목에 걸린 진주 목걸이나 다름이 없을 것이 아니냐·”
“사부님?”
뭐지? 또 내 취급이 박해지지 않았나?
설마 사부님마저?
“하아· 그리고· 제자가 계속 고절한 무공에 닿는 인연이 있는 모양이지 않더냐· 그렇다고 아무 무공이나 익히지 말고 특히 마공을 더 익힐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말 것이다·”
“에이· 이제 안 그래요·”
서문수린의 눈이 가늘어졌다·
“도대체가 믿을 수가 있어야지·”
“이제 저도 알거든요? 뭐 누가 칼 들고 마공 익히라고 협박이라도 하겠어요?”
따악! 청이 또 바닥을 굴렀다·
“제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어쩜 점점 가관이로구나· 그 말본새도 말본새거니와 함부로 그리 내뱉어선 안 될 것이야· 말에는 힘이 깃드는 법이니 필요 없는 언행이 종래에는 결국 업으로 돌아올 터·”
청이 머리를 문지르며 생각했다·
업이고 나발이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하셔야지·
세상에 누가 칼까지 들고 마공 익히라고 협박을 한다고···
—-
“직접 왕림하시니 천세의 영광입니다·”
“됐고· 그년은? 아직도 신녀문이래?”
“그렇습니다·”
“신녀문 그 계집들은 거기 박혀서 지들끼리 지지고 볶는 년들 아닌가? 그냥 안 내려오는 거 아냐? 그냥 쳐들어가서 뺏어오면 안 되나?”
“알려진 대모의 경지가 현경입니다· 혹시 더 경지가 올랐다면 신교의 피해가···”
“쯧· 고작 다 늙은 계집년이 무서워서 참아야 한다는 거야? 이 내가?”
“송구하옵니다·”
“그럼 여름까지만 기다려 보자고· 그쪽에다 애들 쫙 깔아놨지? 바로 연락이 오나?”
“그렇습니다·”
“그년한테 복신적이 없으면 어떻게 해?”
“복신적은 무가지보입니다· 그런 보물 앞에서는 부모자식도 없는 법입니다·”
“그럼 복신적을 벌써 불었으면? 사십 년을 더 기다릴 순 없잖아· 정파 년이 순순히 협조할까?”
“억지로라도 마공을 익히게 만들면 됩니다· 돌아갈 곳 없는 공적으로 만들어버리고 나면 어쩔 수 없이 신교에 귀의할 겁니다·”
“정파 새끼들 대가리가 처 막혀서는· 좋아· 내가 이래서 비각주를 좋아한다니까·”
“삼생의 영광입니다· 천마앙복· 신교천하·”
—-
아씨 너무 꽉 묶은 것 같은데·
사람이 익숙한 일이라도 오랫동안 하지 않으면 감을 잊어버리기 마련이었다·
청이 엉거주춤 엉덩이쯤의 천을 붙들고 잡아당겼다·
이상하다· 이게 자꾸 먹네·
좀 쪘나?
대충 짐도 다 쌌고 이젠 다시 강호로 나설 차례였다·
정든 집 떠나려니 참으로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이 아니었다·
이번엔 바깥보다 집에서 더욱 고생을 했다·
지금 생각해도 겨울을 잠옷 한 벌로 버티게 한 일은 너무한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니 발걸음이 아주 잘 떨어졌다·
그렇게 활기찬 발걸음을 진장명이 막아섰다·
“언니 또 가?”
“그럼· 가야지·”
“안 가면 안 돼?”
“안 돼·”
청은 할 일이 많았다·
일단은 초절정을 찍어야 하고·
다음엔 화경 현경 뭐 등등등·
최종적으로는 태창이와 결판을 지어야 한다·
이대로는 도대체 불안해서 살 수가 없으니까·
“정”
“정말정말 그거 하지 마라· 안 귀엽거든?”
“칫·”
“너무 뻔한 거 아니냐? 시시하잖아·”
“뭐래는 거야·”
그렇게 말은 하지만 진장명의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점점 땅으로 향하는 꼬맹이의 시선을 보며 청이 상냥한 목소리를 냈다·
“최소한 절정에라도 들지 않을래? 그 정도는 되어야 내가 사부님한테 우리 장명이랑 같이 강호 한 바퀴 돌고 오겠다고 말씀이라도 드려 볼 거 아냐·”
진장명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절정이면 될까?”
“글쎄· 사부님 맘이겠지만· 어떻게 잘 부탁드리면 되지 않을까? 꼭 멀리 안 가고 가까운 데라도·”
청이 본 서문수린의 성격상 안 될 것도 없을 것 같았다·
다른 문도들은 결코 그리 생각하지 않겠지만·
“그럼 잘 다녀와· 나 갈래·”
“뭐야 어딜 가?”
“수련하러·”
아주 의욕이 만땅이었다·
청이 픽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진장명과 헤어진 청이 다시 출도에 나섰다·
마주치는 선녀문도들이 웃는 낯으로 배웅을 해 주었다·
“태사숙조님! 올 때 맛있는 거!”
“태사숙조님! 저두 머리가 허전한데에· 어디 이쁜 잠 같은 거 하나 꽂으면 좋은데에·”
“사숙조 가다 배고프면 먹어·”
그러던 중이었다·
신녀문도 하나가 주머니를 건넸다·
“태사숙조님···· 이거·”
“엉? 나 주는 거?”
“부디 몸조심해서 다녀오셔야 해요·”
살짝 끌러보니 붉은 비단으로 짠 가슴 가리개였다·
고맙기는 한데 이게 맞아야 할 텐데·
끼면 땀 차·
“고마워· 잘 쓸···”
청이 감사 인사를 마치기도 전에 신녀문도가 얼굴을 가린 채로 쌩 도망쳐 버리고 말았다·
뭐지? 왜 도망쳐?
청은 몰랐다·
겨울 동안 청은 많은 신녀문도들에게 재림 신녀라 불리는 이상형이 되어버린 것이다·
청의 무대 의상이 그만큼 강력했던 탓이다·
물론 연주 자체도 굉장했지만·
그런 쪽의 신녀문도들이 애타는 작별 인사를 건네왔다·
“사숙 돌아오면 우리 같이 비품 사러 가는 거다? 약속이야?”
“꼭··· 돌아오세요·”
“태사숙조님 제가 저번에 몰래 약주 한 병 묻어놨는데용 돌아오시면 같이 먹어용 네?”
“사숙조 이번에 돌아오시면 꼭 드릴 말씀이 있어요· 정말로 정말 중요한 얘기에요·”
그런데?
왜 이렇게 하나같이 뭔가 불길한 소리를?
꼭 내가 돌아오지 못할 사람 같아지지 않나?
어쨌거나 단순하게 살고자 하는 청이었다·
살갑게 배웅을 받으니 또 기분이 좋아졌다·
청이 콧노래를 부르며 현문을 지나 신녀봉의 내리막길을 탔다·
한껏 좋아진 기분에 예감이 참 좋았다·
어쩐지 이번 강호행에선 편하고 좋은 일만 가득할 것만 같은· 그런·
약 한 시진 후 납치를 당하기 전까지는 분명 그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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