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0
강 부인은 청의 호들갑이 마음에 차지 않는 눈치였다·
물론 청은 눈치따윈 보지 않았다·
“근데 갑자기 무슨 연주를 배워요?”
“연주라니? 본 부인은 예악이라 했다·”
“그게 그거 아닌가요?”
“너는 검술을 칼질이라 부르느냐? 본 부인이 네게 천심화음이라 하는 예악의 연주를 봐 줄 것이니 네가 속히 익혀야 할 것이다·”
강 부인이 엄히 말했다·
그러나 청은 심드렁했다·
“제가요? 왜요?”
“왜냐하면 네년이 복신적을 훔쳤으니까!”
“훔치다뇨· 말이 심하네· 그런 치졸한 짓은 안 해요· 그냥 죽이고 뺏었거든요?”
“강도질을 그리 당당하게 자랑하다니·”
“강자존 몰라요? 승자독식· 복신적· 내 꺼·”
강자존의 효과는 대단했다·
강 부인이 입을 다물고 부들거렸다·
“···으으!”
청이 싱글거리며 물었다·
“그래서 왜 지금 하필 예악을 배우는데요?”
“네가 알 필요는 없다·”
“그럼 저도 안 배울래요·”
“지존께서 내리신 명을 어길 셈이냐!”
“난 몰라요· 난 그런 명 못 들었는데· 직접 와서 이야기하라 해요· 그럼· 왜 배워야 하는지 알려주던가 아님 말던가·”
청이 그리 말하며 아예 발라당 드러누웠다·
“이 빌어먹을 년이!”
“어허· 말조심해요· 나 지금 무기 들었어·”
청이 누운 채로 복신적을 붕붕 휘둘렀다·
복신적은 통짜 한철로 만들어진 피리였다·
만년한철로 제련되어 튼튼하기가 신병이기와 같은 피리다·
그리고 복신적 정도의 길이로 매우 튼튼한 물건을 강호에서는 단봉이라고 불렀다·
단봉이란 참으로 신묘한 무기라서 일단 손에 들고 어떤 병기술을 펼쳐도 대충 호환이 된다·
물론 그 위력이야 반의반도 안 나오겠지만 검술 쓰면 검 대신 도법 쓰면 도 대신 창술 쓰면 창 대신 어찌어찌 쓸만한 것이다·
“이익···!”
강 부인이 어쩔 줄 모르고 발만 동동 굴렀다·
가르치라고 명을 받았기에 가르쳐야 하는데 그렇다고 교의 비밀을 털어놓아야 할까?
그리고 비밀을 알게 되면 과연 정파의 협객이란 년이 순순히 협조를 하겠는가?
“나는 잘 거니까 문 닫고 나가 줄래요? 말로 할 때 듣는 게 좋을 거예요· 다리가 불편할 뿐이지 아예 못 걷는 건 아니니까·”
“큭·”
“안 나가요? 나 잔다? 나 자요? 좋은 밤!”
청이 아예 눈을 감았다·
한번 달아난 잠이 그런다고 돌아오지는 않았지만 중요한 건 의미의 전달이었다·
청의 타고난 줄타기가 소리쳤다·
지금은 청이 갑이라고·
이 사감 선생님이 어떻게든 가르쳐야만 하는 입장이라고·
청의 줄타기는 이미 하늘의 경지였다·
이미 마교에서 별 충돌 없이 잘 지내고 있는 지금의 상황부터가 그 증거가 아니던가·
분노조절장애 금쪽이인 모 호소인에게만 한번 실수를 했을 뿐이었다·
그나마도 그 이후로 납작 엎드려 기어다니지 않았던가·
청의 날카로운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강 부인이 심각하게 갈등했다·
지존께 알려야 하나?
하지만 강 부인은 이미 지존을 오래 보아온 사람이었다·
지존에게 ‘그년이 안 배우겠대요’ 하고 일러바쳐봐야 그럼 알아서 가르쳐야지 없는 능력을 자랑하느냐고 머리통을 날려버릴 터였다·
한번 명령을 내리면 어떤 방법으로든 수행을 해야 했다·
그것이 지존의 지엄한 명령이었다·
“···좋다· 본 부인이 이유를 알려주면 천심화음을 배우겠다고 사문과 사부를 걸고 약속해라· 그러면 내 알려주겠다·”
“음····”
그래도 신녀문이랑 사부님 이름 걸라고 하니 되게 찝찝하네·
이래서 맨날 사문이랑 사부 걸라고 하는구나·
근데 열심히 배우라는 말은 안 했지?
마두나 할 법한 비열한 생각이었다·
“좋아요· 약속·”
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청을 정파의 여협으로 알고 있는 강 부인이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과거 손자가 지피지기 일단 무조건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한다고 피를 토하며 강조했던 이유다·
모든 사기가 결국 이래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지피 사기꾼이 사기꾼인지 몰라서·
지기 내가 사기를 당하는 사람인지 몰라서·
“하아· 과거 무천대제 그 작자가 살아 있을 때의 일이다···”
또 무천대제야?
이 할아범은 안 끼는 데가 없네·
무천대제가 황제만 조진 것이 아니었다·
그나마 황제는 황제라서 봐준 축에 속했다·
멱살 잡고 황궁 꼭대기에서 흔들기만 했으니까·
혈교에서는 혈미륵의 허리를 접었다·
사도련 본단을 급습해 수뇌부 전부를 학살해 강제로 해체시켰으니 강호에 화근이 될 세력을 찾아서 조져놓은 것이다·
천마신교도 화근 중 하나였다
무천대제가 천마신교에서 천마와 소천마 둘을 참살하고는 천마서고에서 천마혼을 빼앗았다·
“천마혼?”
“초대 천마조사님의 심득이 담긴 보물이다·”
“많이 중요한 건가 봐요?”
“그건····”
강 부인이 멈칫거렸다·
이걸 다 말하는 게 맞나?
청이 으름장을 놓았다·
“뭉개지 말고 자세하게 말해줄래요? 숨기는 거 있으면 예악이고 뭐고 없는 거야·”
하지만 비밀을 토해내는 것보다 청이 예악을 배우지 않는 미래가 더욱 두려웠다·
그랬다간 그 이상의 미래가 사라질 테니까·
실패에 대한 용서가 없이 경직된 사내 문화란 이렇게 해로운 것이었다·
단체의 막대한 피해보다 나의 사소한 피해가 훨씬 아픈 것이 사람의 당연한 본성이기에·
다만 적어도 청에게는 천마신교의 이 꼴을 비웃을 자격이 없었다·
청의 고향 위대한 대한민국에서는 절대다수의 기업들이 이렇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십년 전 쯤 신교의 염탐부대가 무천대제의 숨겨진 기록을 발견했다·”
무천대제는 천마혼을 차마 없애지 못했다·
불가나 도가와 같이 조로아스터라고 하는 한 종맥을 뿌리로 하는 천외 무공의 정수였다
비록 마교의 것이라고는 하나 무천대제 역시 한 명의 무인으로서 일교 종맥의 정수를 차마 부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대신 그 누구도 찾을 수 없게 꽁꽁 감춰두었다·
그리고 신교의 총력이 그 수색에 나선 결과 천마혼을 숨긴 장소를 알아내고 천마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천마총이요?”
“천마조사님의 혼이 담긴 신물을 봉인한 비동이니 천마총 말고 어떤 이름을 붙일까·”
청이 생각했다·
어쩐지 잘 날아다니는 말이 묻혀있을 것 같은 이름이지 않나?
천마총의 입구는 복잡한 기관진식으로 봉인되었는데 조사 결과 과거의 전설적인 대장장이 반치의 작품으로 밝혀졌다·
천마총의 입구를 열기 위해선 반치가 만든 복신적으로 그 아내가 가장 좋아했던 악곡을 연주해야만 했다·
그 악곡이 바로 천심화음이었다·
강제로 열었다간 비동 전체가 무너져 천마혼이고 뭐고 영영 땅 아래 파묻힌다고·
신교는 최선을 다해 복신적을 찾아다녔다·
그러다 마침내 발견된 복신적을 청이 홀라당 처먹어버리고 만 것이다·
청이 차가운 눈으로 복신적을 보았다·
역시 다 이거 때문에 이 지랄이었네·
에이씨· 괜히 주워다가 이게 무슨 꼴이야·
아주 개 같은 피리 같으니라고·
복신적이 들을 수 있었다면 억울해서 속이 다 터지고 뒤집힐 소리였다·
일만 금이라고 냉큼 챙겼던 청이었으니까·
청이 뒤이어 남 탓을 다시 시전했다·
그리고 무천대제 그 사람도 그렇다·
숨기려면 잘 숨길 것이지 일을 왜 허술하게 처리해서 이 사달을 내나 몰라·
어쨌거나 사부님 이름 걸고 한 약속이었다·
마음 같아서야 나는 나쁜 년하고 약속 같은 거 안 한다고 배 째고 싶지만 그래도 사부님 걸고 나니 찝찝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래서 청이 어쨌거나 약속은 지켰다·
다만 그 태도가 매우 불량했는데 설렁설렁 무슨 소리 하는가 들어나 보자는 식이었다·
“자 서두의 곡조는 구슬프고 여의도록 거기 악보를 보거라· 초단에서 이어지는 음보에서는 숨이 끊어지도록 가냘프게 쌕쌕 새는 듯한 숨소리로···”
삑삑·
청이 힘차게 소리를 불어냈다·
“아니 내 뭐라고 했지? 그리 날뛰는 망아지처럼 불어대지 말고 당장 끊어질 것만 같은 얇은 실 같은 악상을 뽑으라고···”
“아씨 부인이 복신적으로 한번 불어 볼래요? 내공 담아서 힘주는데 가냘픈 소리 같은 소릴 하고 있어·”
“아니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그럴 생각이 안 보이잖나! 모름지기 예악이란 주자가 펼치는 심상으로 공간을 점유하는 데에 그 묘리가 있는 것이다!”
“심상이 취향에 안 맞는걸· 그러지 말고 신나게 편곡이나 해 보죠? 내가 봤을 때 무천대제 그 양반도 그딴 숨넘어가는 소리 안 좋아해·”
청은 실제로 무천대제가 남긴 심득을 보았다·
호호탕탕하게 술을 동이채로 퍼마실 영감이지 구슬픈 피리 소리를 애호할 위인은 절대 아니었다·
게다가 이 시대 악곡은 청에게는 굉장히 지루한 바가 있었다·
일단 느리고 또 질척하다고 해야 하나·
“갈 길이 멀다· 이래서야 어찌 내공까지 담아 제대로 된 소리를 내겠는지· 내 이 방법까지는 안 쓰려고 했건만·”
강 부인이 무녀의 맥을 이었다고는 하나 지존이 무녀라 해서 존중하는 인물이 못 됐다·
폭군의 치하에서 오래 살아남은 인물이다·
나름 그에 대비한 바가 있기는 했다·
“소영·”
그러자 뒤편에 있던 시녀가 움찔거렸다·
청에게 무공 꾸러미를 전해주었던 그 시녀다·
“네가 수업에 영 뜻이 없어 보이니 잘못을 할 때마다 저 아이가 대신 벌을 받을 것이다·”
“엥?”
“봐라 이 아이가 벌을 받는 것이 전부 네년 때문임을 잊지 말고·”
강 부인이 허리띠를 풀었다·
좀 특이하다 싶더니 손에 쥔 이후엔 허리띠가 아니라 채찍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시녀가 덜덜 떨며 옷을 풀고 그리고는 짝!
갖 스무살이나 되었을 법한 소녀의 등짝에 긴 상흔이 패였다·
강 부인의 손속이 지독해서 한 방에 가죽이 찢어져 피가 몽글몽글 배어 나왔다·
청이 눈살을 찌푸렸다·
“오우· 아프겠다····”
동시에 생각했다·
매 맞는 아이라니?
근데 그것도 뭐 일면식이라도 있는 사이여야 효과가 있는 거 아닌가?
견포희와 비슷한 악업 수준이니 마교 내에선 아직 악인 꿈나무 정도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도 세 자리수 넘어가는 악인이었다·
악인이 악인 때리는 광경이 청에게 있어선 별 감흥이-
아· 채찍 저거 손맛이 되게 좋아 보인다·
편술이나 하나 익혀볼까?
다른 측면에서 감흥이 있기는 했다·
그러니 청의 수업 태도가 나아지진 않았다·
짜악! 짜악! 짜악!
덕분에 시녀만 아주 난도질이 되어 견디지 못하고 눈을 까뒤집은 채 혼절해버리고 말았다·
강 부인이 독기 가득한 눈빛으로 청을 노려보았다·
“네년이 아주 독하구나· 눈앞에 무고한 아이가 이 지경으로 쓰러지는데도 아무런 죄책감이 들지 않는단 말이냐!”
“아니 웃기시네· 부인이 때려놓고 왜 나한테 지랄이에요? 그게 내 탓인가? 어이가 없네·”
강 부인이 그제야 청의 본성을 엿보았다·
아주 독하디 독한 년이었다·
그러나 강 부인도 독하기로는 어디서 빠지지 않는 여인이었으니·
“오냐· 어차피 모르는 이다? 그래 그러면 대신 맞아주는 이를 좀 바꾸자꾸나· 내 듣자하니 환희궁 내에 네 수발을 드는 아이가 있다지?”
“···? 그런 애가 있었어요?”
청이 고개를 갸웃했다·
“모르는 척 해도 소용없다· 듣자하니 네가 퍽 총애하는 통에 금방 서열이 올랐다고 하던데· 그 아이가 대신 맞으면 네년도 좀 성실히 임할 생각이 들겠지·”
뭐야 받침대 2호인가·
청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늙은이라서 봐줬더니 아주 기어오르네·
“이봐요 부인· 선생님? 그래 교수님!”
“흥· 이제 와서·”
“됐고· 학생이 못 배우면 그건 학생의 잘못이 아니에요· 교수님이 못 가르쳐서 그런 거지·”
청이 침대에서 내려와 자리에 섰다·
절룩거리며 한쪽 다리를 질질 끌며 나아가니 왠지 모르게 간담이 서늘한 광경이었다·
“하여간 교수님들이란 아주 빠져가지고· 정신 못 차린다니까· 학부생이 뭘 알아요? 그런데 첫 수업부터 우다다다 막 쏘면 그걸 어떻게 이해를 하냐고· 아주 교수님 실격이야·”
“무 무어냐 왜 다가오는···”
“조용히 하세욧!”
빡!
청의 복신적이 허공을 갈랐다·
핵꿀밤을 날려주고 싶지만 기동성을 잃은 체를 하는 지금은 아무래도 조금 무리다·
그러나 복신적의 손맛은 굉장히 떨어져도 그 공격 사거리는 핵꿀밤보다 우월했다·
“깍! 흐억 흐어억···”
한 방에 꼬꾸라진 강 부인이 미친 사람처럼 자신의 정수리를 문질러댔다·
머리에 불이 난 것 같은 통증이었다·
강 부인이 머리를 문지르고 손바닥을 들여다보고 또 머리를 문지르느라 바빴다·
분명 가죽이 찢어지고 머리뼈가 깨진 것 같은데 피는 또 묻어나지 않아서였다·
청이 처맞으며 배운 절묘한 힘의 배분이었다·
“뭐냐! 대체 이 무 무슨 스승을 때리다니 어찌 이런 잔학무도한····”
“교수님 꼼짝 마· 교수님 까불면 죽어· 내가 막 이렇게 피리 휘두르면 교수님 대갈통 아주 반쪽이 나는 거야· 교수님? 왜 씨를 뿌리세요? 씨뿌리기 하기 있기 없기? 마음에 안 드시면 차라리 재수강을 시키시지 그러셨어요? 얼굴 다시 보기 싫으면 빨리 졸업을 시켜야 할 거 아니야· 한 학기나 얼굴을 더 보면 서로 민망하잖아요· 이게 증오의 연쇄라니까?”
청의 눈깔이 희번덕거렸다·
강 부인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 알에서 그저 몸을 벌벌 떨었다·
분명 정파의 여협이라고 들었건만 눈앞에 선 것은 눈빛부터가 천하의 광인이 따로 없었다·
청이 허리를 아주 깊숙하게 숙여 강 부인의 면상에 바짝 얼굴을 들이댔다·
“선생님·”
강 부인의 숨이 턱 막혔다·
무슨 어린 계집년이 이런 위압감을····
“왜 왜 그러는···”
“이제부터 수업에 내가 뭐 틀리고 잘못하고 이해를 못 하거나 집중을 못 하면 다 교수님 아니 우리 선생님 잘못이에요?”
“그게 말이 되는···”
“잘못했으면 뭐다? 맞아야지· 못 가르친 죄로 처맞는 거야· 그리고 이건 압수·”
청이 자연스럽게 강 부인의 채찍을 빼냈다·
그러고는 희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자 선생님· 우리 수업 계속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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