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2
밤산책에 취미가 들린 청이 밤마다 설가놈의 집으로 출근했다·
덕분에 오늘도 물을 뒤집어쓴 설가놈이었다·
어제 그제는 물방울을 뚝뚝 흘리면서 책망 섞인 눈빛으로 멀거니 쏘아보곤 했다·
오늘은 어쩐지 주춤하니 떨리는 눈빛이었다·
청이 떫은 표정으로 물었다·
“뭐야요? 그 눈빛?”
“마교도가 아니라더니 혈교의 마녀였나·”
“오잉? 혈교?”
청의 ‘그 표정’은 처음 보는 사람도 충분히 알 수 있을 만큼 설득력이 있었다·
중원에서 청만큼 나는 몰라요 하는 표정을 정확히 표현하는 인물은 없었던 것이다·
“소수마공을 휘두르지 않았나?”
“아! 소수마공 아시는구나! 요즘에 정말 겁· 나· 쎕· 니· 다·”
진짜로 소수마공이 한층 진화했다·
빙천수라마공 덕분이었다·
소수마공은 사음한 성질의 소수한독 침투경을 뿌려 영구적인 후유증을 선물하는 악독함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청의 진기에 차가운 녀석이 없었다·
고급유 넣어야 하는 차량에 경유를 주유해서 운전하고 있었던 셈이었다·
이젠 빙천마기가 있었다·
고급유까진 아니지만 휘발유 정도는 된다·
“그런데 혈교 인물이 아니라고?”
“아닌데요?”
“소수마녀는 맞고?”
“그것도 아닌데요?”
“소수마공을 익힌 건 맞고?”
“아! 소수마공 아시는구나! 요즘에 정말 겁· 나· 쎕· 니· 다·”
“이젠 헛것까지 들리나···· 아까도 들었던 것 같은데···”
설가놈이 그리 중얼거렸다·
청이 인상을 찌푸렸다·
설가놈이 흠칫 놀라자 청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뭐야 왜 그렇게 경계를 해요?”
“알려준 이름마다 잔인하게 도살이 되어 발견되는 판에 내가 긴장을 안 하게 생겼나?”
설가놈은 청이 어설픈 도적인 줄 알았다·
그런데 실은 천하의 대살성이었다·
그것도 그 혈교의 소수마녀!
마교가 나쁜 놈들이라면 혈교는 세상 개말종 모임이었다·
사악함에도 체급 차이가 있었던 것·
설가놈은 진지하게 마교 탈출을 고민했었다·
혈교와 엮여서는 좋은 꼴을 못 보니까·
차라리 죽는 게 나은 꼴이 되는 것보다야·
고통은 두렵지 않지만 혈교는 두려웠다·
그에 청이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안 죽인다고 약속했잖아요·”
“보통 정보 제공자는 오래 살아남지 못하는 법이지·”
“너무하네· 우리 사이에·”
“그래· 이젠 확실히 해야겠군· 도대체 우리 사이는 뭔가?”
오잉· 그런가? 우리가 무슨 사이지?
청이 잠시 생각하다 적당한 단어를 찾았다·
“친구?”
설가놈의 눈썹이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친구 친구라· 이름도 모르는 친구로군?”
“서문청·”
“사문은?”
“신녀문·”
“사부는? 마공은 어디서 배웠지?”
“중립국 이 아니라· 사부님은 서문씨에 수 짜 린 짜 쓰세요· 마공은 오다가다 배웠구요·”
설가놈의 눈썹이 높이 도약했다 되돌아왔다·
“서문수린? 대모? 신녀문의 아니 신녀문이라 말은 했군· 대모의 제자가 아니 서문에 서문· 기명제자라고? 아니·”
설가놈이 횡설수설하는 꼴이 신기했다·
그러나 그도 잠시였다·
침착해진 설가놈이 다시 물었다·
“도대체 요즘 중원 꼴이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건가? 혹시 무슨 대단한 역병이라도 퍼져 망하기 직전인가?”
“중원은 멀쩡한데요·”
“아쉽군· 드디어 세상 망하는 줄 알았더니·”
설가놈이 그리 말하곤 몸을 돌렸다·
“뭐야 어디 가요?”
“친구에게 차 한잔은 대접해야겠지· 거기 장 옆에 접상이 있으니 좀 펴 두게·”
“오 과자도 있어요?”
“집안 꼴을 좀 보게· 뜨거운 물 내놓지 않는 것만으로도 찬사를 받아야 할 살림이 아닌가? 게다가 무슨 과자를 찾나? 애도 아니고·”
설가놈이 그리 핀잔을 주며 밖으로 나갔다·
청이 주변을 둘러보다 장과 벽 사이에 세워진 접상을 꺼내 다리를 착착 폈다·
친구 집이니까 답답한 복면도 끌렀다·
그리고는 대충 퍼질러 누웠다·
친구 집에 오면 일단 눕는 행위야말로 진정한 우정의 지엄한 예법이었기에·
잠시 후 차주전자와 잔을 들고 돌아온 설가놈이 그 꼴을 보고 말했다·
정확히는 청의 소녀스러운 얼굴이었다·
“애가 아닌 게 아니었군· 애가 맞았어·”
“애라니요? 여기 어디에 애가 있어요?”
“내가 일찍 성혼했다면 자네만 한 딸이 있었겠지· 그럼 애라고 말할 자격이 있지 않나?”
설가놈은 역시 논리적이었다·
청도 스무살 애들을 보면 애기 같으니 중년의 설가놈이야 오죽하겠는가·
와· 도저히 반박할 수가 없네·
설가놈이 앉은뱅이 다상 위에 든 것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래서 대체 뭐가 문젠가?”
“그래· 그거요! 순찰조장? 걔 완전히 개털이잖아요! 절세의 경공이니 뭐니 했으면서!”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있다고만 했지· 흠· 그런데· 나는 그걸 묻는 게 아니었다만·”
“그럼요?”
설가놈이 청을 바라보았다·
“자네 말일세· 그렇게 정 붙일 데가 없던가? 좀 심각해 보이는군·”
“그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죠? 뜬금없이·”
“명문 정파의 어린 대마두가 도대체 왜 이런 신세 망가진 중년에게 정을 붙이냔 말일세·”
“어린 대마두라니· 말이 넘 심하시네·”
“대충 자네 별호도 알겠네· 삼두마녀쯤 되지 않나? 아니 대모가 성을 물려줄 정도의 제자라니 정파가 한가족이라 삼두마협쯤 되겠군·”
“뭐야 자꾸 내 젖탱이 가지고 시비 걸래요? 떼다 붙여주는 수가 있어요· 이 불편함을 직접 느껴봐야 아 내가 남의 고통을 재미로 삼았구나 하고 반성을 하지?”
“어린 친구가 입담만은 내 동년배로군·”
설가놈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 말은 협도 좋지만 살의에 사로잡히지는 말라는 것이네· 출신 좋고 인물 좋고 젖통은 천박해서 유감이네만 중원에는 자네 좋다고 하는 친구들 얼마든지 있을 것이 아닌가·”
“그야 그렇죠?”
“그런데 굳이 이 궁벽진 마교까지 들어와서 악인참을 행할 이유가 있나? 내가 봤을 때는 자넨 지금 정상이 아니야·”
설가놈이 보기엔 청의 상태는 이미 살성으로 눈을 뜬 지가 오래였다·
서문수린의 제자라고 하니 정통 도가의 심법으로 어찌어찌 버티고는 있는 모양이지만·
사람이 주변에 마음 둘 사람이 없으면 서서히 고독이 들어차 미쳐버리고 만다·
아직 어린 소녀가 온통 나쁜 놈들 우글거리는 소굴에서 마음 터놓을 상대가 있었겠는가·
강도짓에서 범인과 피해자로 마주한 이다·
대화 며칠 나눴다고 정을 줄 정도다?
진즉부터 무너지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설가놈이 똑같은 수순으로 끔찍한 살업을 저지르고 이리 도망친 신세였으니까·
빙궁에서 학대받던 천덕꾸러기 사생아가 중원 반대편 마교에 숨어 사는 이유였다·
겸사겸사 스승 사형 사저 사저 사매 골고루 죽인 후에 비급까지 훔쳐서 도망쳤던 건 조금 심하지 않았나 반성도 하면서·
어쨌든 설가놈이 청의 상태를 정확하게 짚어냈다·
청이 받침대 둘에게 무른 것이 본인도 모르게 외로움이 사무쳐서 의지한 것이므로·
청이 외로움을 탄 것이 무림 초출 이후로 죽 이어진 것이다·
사실 강호에서 정을 받은 지가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저 좋다는 사람에게 끔벅 죽는 것이 당연할 수밖에는·
청이 아니라 청의 체질에만 눈독을 들인 누구에게 질색하는 것도 그 연장이었다·
청이 울컥한 마음에 부러 언성을 높였다·
“아씨· 누가 이런 데에 있고 싶어서 있는 줄 알아요? 납치당했으니까 탈출 계획에 화풀이도 겸사겸사하는 거지·”
“아· 납치를 당했나· 그건 몰랐군· 유감이네· 난 또 악인 베겠다고 기어들어 온 줄 알았지· 자네 또래들이 으레 그런 소리를 하지 않나·”
“나중에 수련 필요하면 한번 들를까 생각은 하긴 했었는데 지금은 아니거든요?”
“탈출이라···· 그래서 경신법 가진 마두가 누군지 물어봤던 게로군· 익혀서 탈출할 생각이었나·”
청이 마침 이때다 하고 물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만약 설가놈이 세상에서 무공을 딱 하나 골라서 익힐 수 있다고 치면 뭘 익힐 것 같아요?”
“그야 소녀환희경이지·”
즉답이었다·
설가놈이 말을 이었다·
“어찌어찌 훔쳐서 배울 기회가 있지 않을까 하고 이리로 도망쳤더니만 환희궁에서도 궁주만 익히는 비전이라 하더군·”
“아씨 누가 설가놈이 익히고 싶은 거 물어봤어요? 내가 익히면 도움이 될 만한 거요·”
“분명 내가 익힐 수 있다고 치자고 했던 것 같은데· 흠· 하나 익힌다면이라· 딱 그 나이대 친구끼리 할 놀이로군·”
이는 의외로 중원에 널리 퍼진 놀이었다·
원시 고대 미개 중원의 놀이 문화가 발전하지 못한 탓이었다·
설가놈이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빠진 척을 하더니 결국 결론을 내놓았다·
“당장 위기를 모면해야 한다면 흡정마공만한 것이 있을까· 물론 세상 무인 모두가 병장기 꼬나쥐고 죽이려 들 테니 중원이 아니라 서역 멀리 도망쳐야 할 테지만·”
“기각·”
물론 청은 뭘 익히든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어차피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
가차없는 기각은 후환이 두려워서가 아니다·
청도 이미 살중살이라는 멋드러진 악명에 한 번 검색을 해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안 나왔다·
중화 원주민 전용이거나 독고구검처럼 특별 임무를 통해 익혀야 되는 것이 아닌가 추측할 뿐이었다·
“당장 풀어야 할 위기만 없었다면 역근세수경이지· 근골과 혈맥을 가꾸는 데 있어서 천하에 감히 비교할 무공이 없는 최고의 신공이니·”
“아 역근세수경은 두 표네요· 우리 스승님도 그러셨는데·”
“그야 당연하지· 제자를 아끼는 스승이라면 누구라도 꿈꾸는 일이 아닌가· 하지만 대성이 어렵고 효과가 천천히 나타나니 당장 위기를 모면하기엔 적절치 않지·”
청이 한 가지는 확실히 알았다·
이번에 안 배우면 이천 점은 무조건 저거네·
“그럼 당장 효과를 보려면요?”
“자네도 알다시피 당장 익혀서 쓸만한 거라곤 순 마공뿐이지 않나?”
“대충 어떻게 대성이 된다면요?”
“망상하는 취미는 좋지 않아· 현실을 살게·”
설가놈이 한심하다는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
“아씨 그건 내가 알아서 하구요·”
설가놈이 또다시 한참 생각에 빠졌다·
그러나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천주만독수· 그래 천주만독수가 있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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