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54
입을 쩍 벌린 채로 멈춰 눈동자만 좌우로 흔들리는 것이 게으른 개구리가 파리라도 들어오길 기다리는 꼴이었다·
그러다 무학이 퍼뜩 언성을 높이는 것이었다·
“너 아해야 아이야 너!”
“네? 뭔가 잘못되었나요? 앗· 혹시 덜 말라서 번졌다거나-”
“그게 아니라 범어 범어를 할 줄 알았느냐?”
범어는 어렵다·
애초에 수도승들이 쓰던 문자고 천축의 수도승이라 하면 모든 백성을 짐승처럼 부려먹는 천부귀족들이다·
여기서 짐승이란 업신여긴다는 표현이 아니라 진짜로 더러운 짐승을 뜻한다· 평민이 수도승과 살이 닿으면 더러운 짐승이 사제를 더럽힌 죄로 사형에 처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수도승들의 언어는 특별해야 한다· 더러운 짐승들이 감히 읽거나 써서는 안 되기 때문에 작정하고 어렵게 만들어진 글자가 바로 범어였다·
일단 띄어쓰기가 없다· 없을 뿐만 아니라 한 문장은 모든 글자가 이어져야 하므로 어두 어간 어미에 따라 기본적인 글자소의 형태가 전부 변화하는 것이다·
이는 끔찍할 정도의 복잡한 변화를 가져오며 주어마다 다른 동사와 시제에 따른 변화 그리고 명사와 동사와 형용사 모두가 남성 중성 여성형이 따로 있으며 단수 쌍수 복수를 또 따로 구분한다·
거기에 심지어 표음문자로서 입으로 소리를 내는 그대로를 적어야 한다·
만약 ‘네가 좆같이 굴었잖아 좆같네’ 라는 욕설을 범어로 쓰면 ‘니가조까치구럿짜나조깟네’가 되는 식이었다·
그러니 제대로 말하는 데에 십 년 읽는 데에만 십 년 쓰는 데에 십 년이라 했다·
그러다 보니 소림의 학승들도 머리에 희게 서리가 얹고 나서야 범어 경전을 연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걸 올해 스무 살 그것도 계집아이가 정갈하게 구사할 수 있다고 하니 놀라울 수밖에는·
천축국의 공주 출신이라도 되나?
어쩐지 톡 치면 튀어나올 듯한 큼지막한 눈이 옴폭 들어가 있는 것이 그쪽의 느낌이 조금 있나? 아닌가?
하지만 피부가 눈처럼 흰 것이 분명 그쪽 출신일 리가 없다마는·
“앗 범어를 쓰면 안 되나요? 그래도 한 문장마다 주석을 달아 두었는데···”
범어로 써진 원문에 한문으로 주석을 적어놓았다·
범어는 모양이 뚜렷하고 구분이 확실하여 헷갈리는 구석이 없고 한자는 한 글자 한 글자가 힘이 들어차 꿈틀거렸다·
작은 글씨가 활자로 박은 듯이 일정하고 반듯한 것 역시 경이롭기 그지없는 기예다·
헌데 내용이야 찬찬히 훑어보면 될 것이다만· 무학이 인상을 찌푸렸다·
“엮은이에 네 이름을 쓰지 않았구나?”
“굳이 제 이름자 박아 놓을 필요가 있을까요? 대대로 내려주신다면서 외인의 이름이 떡 박혀있으면 이상하지 않겠어요?”
그러며 살살 눈웃음을 치니 무학이 순간 부끄러움을 느꼈다·
장경각에 이름자 남겨 소림의 은인으로 영영 남게 될 명예에도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이다·
당장 현판이라도 좀 써달라 할까 진지한 고민을 하던 무학이었으니· 대체 글자가 다 무엇이라고 노욕을 부린단 말인가·
물론 청은 그냥 무식한 년이라 몰랐다·
애초에 떳떳한 수법으로 얻은 것도 아닌데 민망하기도 하고·
“자· 여기 적어놓거라· 신녀문 제자 서문청이 인연으로 닿아 배운 절기를 소림에게 전해주어 복원하다·”
무학이 아예 세필과 휴대용 먹병을 내밀며 채근을 했다·
청이 그에 못 이겨 글귀를 쓰니 무학이 실시간으로 펼쳐지는 웅혼한 서예의 현장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그리하여 서책을 받을 때에 무학이 의복을 한 번 정돈하고 무릎을 꿇어 공손히 두 손으로 받들어 예를 표했다·
청 역시 깜짝 놀라서 같이 예의를 표했으니 이 순간만큼은 참으로 엄숙하였다고 하겠다·
“옛다· 대환단이다· 지금은 혹여 위급할까 챙겨온 한 알 뿐이구나· 나중에 사람을 통해 신녀문으로 나머지를 전해주마·”
“헤헤 뭐 이런 걸 다 주시고···”
그러면서도 알뜰하게 챙겨 품에 넣는 청이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닿는 것이·
“아· 맞다· 소림에는 여인이 출입할 수 없다고 들었는데요···”
“소림이 보고 싶으냐? 그러나 계율이란 지엄한 것이니 나라고 해도 그에 대해서는 어쩔 수가 없구나·”
무학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다·
아무리 큰 은인이라 해도 소림의 가장 큰 계율까지 어기며 접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아니 그게 아니라요· 그럼 혹시 절검벽도 여인은 못 보는 건가요?”
“아· 절검벽이 보고 싶은 것이냐· 그라면 문제가 없지· 무천대제께서 남봉에 새겨 절간과 떨어뜨려 놓으셨으니 이를 배려하신 뜻이지· 언제든 찾아와 말하거라· 안내를 해 줄 것이다·”
그러자 무학의 표정이 밝아졌다·
소림은 숭산의 북봉에 자리하고 있으니 남봉에는 여인이 드나들어도 상관이 없는 것이다·
애초에 그 넓은 숭산 자락 전부에 여인을 금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배려에 감사드려요·”
“무얼· 정파의 의기를 가진 잠룡에게 마땅히 보여주어야 할 유산이지·”
—-
무림맹 군사부는 무림맹의 두뇌들이 모인 하부 부서다·
본래 군사라 하면 병법과 정략으로 병략을 이끄는 이를 말하지만 작금 무림이 워낙에 평화롭다보니 그럴 일은 없었다·
그러니 그냥 똑똑한 놈들 모여서 무림맹을 운영하는 실질적 서류 작업자들이었다·
군사부의 수뇌는 무림맹 총군사다·
총군사 아래로 군사보와 부군사가 존재하고 부군사 아래로는 또 부군사보와 군사서기의 직책이 존재했다·
그리고 현재 무림맹의 부군사보가 바로 그 유명한 지낭현화 사마춘봉이 되시겠다·
지낭현화는 지혜 주머니를 단 현명한 꽃이라는 뜻이다·
세상 모든 지혜가 다 들었다고 하여 지낭이라 불리는 여류 지자였다·
용봉지회의 평가로는 잘난 척이 지나쳐서 상대하기 좀 일부 파벌에게는 매우 싫은 상대라는 평가였다·
그리고 이름이 촌스럽고·
다만 용봉지회의 정치와는 상관없이 무림맹 군사부의 평가 역시 비슷했다·
교만이 너무 지나치다는 잔소리를 해 대곤 했다· 다만 군사부는 모두 사마춘봉을 딸 혹은 여동생처럼 대한다는 차이점이 있었지만·
물론 이름은 좀 촌스럽다고 생각하지만·
사마춘봉은 이 교만하다는 평가를 인정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지금까지 살면서 잘난 척을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사마춘봉은 억울했다·
잘난 척이 아니라 너무 잘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새어 나오고 마는 비범함·
그렇다 천재의 편린인 것이다!
하긴 범부들이 천재를 어찌 이해할까·
빼어난 이 몸 께서 참아야지 뭐·
그리하여 오늘도 어린 초천재 초절미녀(본인의 의견으로) 사마춘봉은 차기 최연소 무림맹 총군사(본인의 의견으로)로서 아주 열심히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대는 것이다·
고독의 연쇄 자폭으로 인한 개봉부 연속 살인 사건의 수사 역시 그중 하나였다·
사마춘봉이 생각하기에 분명 이는 태평성대한 무림천하를 비탄에 빠뜨리려 하는 모종의 배후 세력이 펼친 아주 흉악한 음모가 분명한 것이다!
무림맹 부군사가 한참 상상에 빠져있는 사마춘봉을 불렀다·
“야 춘봉아· 결승 비무 객석 재배치는 다 끝냈냐?”
그러자 사마춘봉이 돌연 고개를 돌렸다·
“어머· 나비가?”
“끝냈냐고 묻잖니···”
“올해의 여름은 혹서겠구나· 나비가 벌써 힘이 없으니 폭염으로 천하가 비탄에 잠기고 말 것인데 이를 어찌하면 좋을꼬·”
“하아· 저게· 사마 매· 결승 비무 객석 재배치는 다 끝냈냐?”
그제야 사마춘봉이 들은 체를 했다·
“어머· 제가 그러한 하찮은 잡무를 처리하는데 찰나라도 들일 것 같았나요? 이미 끝내서 올려두었으니 확인해보시죠·”
“그러냐· 할 일 다 마쳤으면 승패권 배당 조정이라도 좀 하던가· 아니면 퇴청이라도 하던가· 왜 서성거리고 앉았어?”
“부군사· 개봉부 연속 살인 사건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려고 하는데요·”
“그 건은 접으라고 했잖냐· 할 일이 그렇게 없어? 그럼 제발 좀 용봉지회라도 가서 또래랑 좀 어울리고 그래· 어? 친구도 좀 사귀고· 너 따돌림을 당하는거 아니냐?”
“훗· 제가 그들과 어울려주지 않는 것뿐이랍니다· 봉황이 어찌 참새랑 어울리겠어요?”
“그거 선민의식이다·”
“선민의식이요? 전 선민의식 같은 거 없는 아주 소탈한 천재랍니다· 물론 저능한 것들은 알아보지 못하겠지만·”
그에 부군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춘봉아·”
“어머 잎사귀가 벌써 이리 쳐져가지곤· 올 여름은 참으로 혹독하겠구나·”
“사마 매야·”
“부르셨어요?”
“할일 없으면 가서 발 닦고 자라·”
그에 사마춘봉이 빽 소리를 질렀다·
“아잇 개봉부 연속 살인 사건에 대해 알아봐드리겠다고 하고 있잖아요! 바로 이 몸! 현화 사마 총군사가! 불세출의 두뇌가!”
“싫어하는 말은 아주 다 빼고 하는구나· 그리고 총군사님 멀쩡히 계시는데 네가 하면 패륜적인 소리가 되지 않냐·”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어쨌든 그 건은 끝내자니까· 무림대회가 한창인데 그걸 파헤쳐봐야 좋을 일이 무어 있느냔 말야· 어차피 여왕 고독의 무제한 자폭이면 아주 깔끔하게 정리가 된 건데·”
“하지만! 배후에 숨은 모종의 세력이!”
“혈교라고 밝혀졌잖냐···”
“거대한 음모가!”
“비선을 폐기하고 철수한 거잖냐···”
“이를 해결하여 현화 사마 총군사의 이름을 드높일 기회가!”
“그래· 너야 너 좋으려고만 움직이지· 흥· 어쨌거나 총군사님이 맹주님 결재까지 다 받으신 사항이다· 접어·”
사실 부군사도 이리 말하며 딱히 기대는 안 했다· 원래 남의 말을 지지리도 안 듣는 년이기 때문이었다·
“흥· 개인적인 시간에 조사하는 정도는 문제가 없을 테죠? 안 그래도 꼬리를 잡았으니 제가 이 사건 멋들어지게 그리고 명쾌하게 그리고 지혜롭게 해결을 해 보이겠어요!”
“아니 해결은 이미 됐다니까· 응? 뭐야 꼬리를 잡았다고?”
그러자 사마춘봉이 득의양양한 미소를 내보이며 당당하게 선언했다·
“그럼요! 두고 보세요! 제가 사건의 모든 자초지종을 모조리 상세히 아름답게 캐 버리고 말 테니까요·”
어차피 말린다고 듣는 년도 아니다·
부군사가 그저 한숨을 푹 내쉬었다·
—-
흑점회주 장은채는 의문의 언연영 사칭범에게 이를 아득바득 갈았지만 그 원한을 제대로 표출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안 좋은 소식이 계속해서 쭈욱 날아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씨발! 백점은 또 뭔데! 마교 새끼들이 아주 돌아버린 거 아냐!? 이게 무슨 수작질이야!?”
감숙성 북부와 서부의 흑점 지부가 전부 궤멸 그리고 그 자리를 백점이라는 놈들이 덥썩 차지해버린 것이다·
백점의 논리는 간단했다·
백점은 상인을 지킨다·
백점은 손님도 지킨다·
백점은 인간 말종을 죽인다·
인신매매범이며 장물아비 인육의 생산 가공 유통업자를 보이는 대로 잡아다가 발가벗긴 후에 큰 거리에 묶어놓는 것이다·
그리고 몸통에는 아상 장물아비 식인 청부업자 등등 그 죄목을 새겨놓았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재미 삼아 돌을 던지거나 불로 지지거나 몽둥이질을 하더라·
그에 아예 중원 서북부 지방의 암시장이 전멸 직전에 놓인 꼴이었다·
감히 흑점을 건드리고 영역을 침범하는 놈들! 하고 금전으로 몰아쳤다가 갑자기 이름난 마교 고수들이 총출동하는 바람에 깃발 하나도 쓰러뜨리지 못한 채로 전멸해버리고 말았다나·
즉 마교 놈들의 소행이었다!
애초에 뭐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지만·
이제 흑점은 중원 동남부에 이어 서북부 역시 궤멸해버리고 만 것이다·
“애초에 암시장을 다 빼면 뭐하러 손님이 오겠냐고! 평범한 장터를 꾸밀 것 같으면 동네 시장에 가지 누가 백점 따위를 굳이 찾아가!”
장은채가 빽 소리를 질렀다·
흑시가 성세한 이유는 쉬이 구할 수 없고 또 관에서 금지한 물품들을 거래할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었다·
라고 생각했다만·
“의외로 성세하고 있다고 합니다· 백시의 영역에서는 무림인이라 해도 손님으로 예의를 지켜야 한다고 천마신교의 이름으로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고 하니 상인이 몰리고 또 상인들도 마찬가지라·”
백점은 상인을 지킨다·
백점은 손님도 지킨다·
인간 말종은 죽일 것이고 거기에는 물건 떼먹고 도망치는 놈이나 사기꾼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둘 모두의 중재자로서 안전하고 편안한 거래를 보장하겠다고 하니 손님이 모여서 상인이 모인 것인지 아니면 상인이 모여서 손님이 많은 것인지 어쨌든 장사가 아주아주 잘 되고 있다고·
“씨발! 도대체 왜! 나한테 왜! 왜 이래! 왜 이러냐고!”
“일단은 좀 사리고 숨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요즘 살수들이 회주님을 찾아다닌다는 소문도 있고···”
의뢰는 성공할 수도 실패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애초에 성공할 수 없는 사지로 내모는 의뢰는 일종의 사기와 같았다·
그리고 장은채는 이미 살수들의 살생부에 그 이름을 제대로 올리고 만 것이다·
“하· 씨발· 두고 봐· 내가 이렇게 침몰할 줄 알아? 뒷골목에 버려져서 흑점회주까지 낚아챈 나야· 이대론 안 죽어· 하· 일단은 좀 숙여주겠지만 기회만 보여 봐· 아주·”
장은채가 스산하게 중얼거렸다·
물론 기회가 올지 안 올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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