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91
청이 뻗은 검끝을 따라 군중이 쩍 갈라졌다·
마치 검끝에서 포탄이라도 발사가 되는 것 같은 풍경으로 아우성을 치며 좌우로 쩍 갈라지니 빈틈없던 포위방에 한 줄로 뻥 구멍이 뚫리는 것이다·
공터 너머가 보이도록 잘 뚫린 일직선의 좁은 길이었다·
그리고 그 도중에 소란이 있다 싶더니 길 위로 한 사내가 떠밀리며 튀어나온다·
사내가 비틀거리다가 저를 향한 청의 검끝을 확인하고는 사색이 되어 다시 군중 사이로 파고든다·
뭐지? 내 검에서 무슨 광선이라도 나가는 줄 아나? 근데 음· 좀 재미있는걸·
그러나 사내가 군중들에게 다시금 거칠게 떠밀리더니 넘어져 호되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나 나 아니야!”
“웃기지 마라! 당신이 소리를 질렀잖아!”
“내가 옆에서 똑똑히 들었다고!”
청의 눈이 가늘어졌다·
“뭐죠? 소리를 지르실 때는 당당하게 구시더니 정작 나와서는 발뺌을 하세요?”
“그 그것이·”
“뭐 하는 분이시길래 계속 딴지를 거시지· 음· 혹시 아는 사람이에요?”
청이 설계자에게 물었다·
그러나 설계자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모르는 이입니다·”
“그렇다는데· 누구 저 사람 아시는 분?”
청은 모르면 물어볼 줄 아는 사람이다·
그리고 과연 집단 지성의 힘은 위대했다·
“저놈 제하반점의 점소이 놈이잖아?”
“맞네! 목소리가 들어봤다 싶더니마는!”
청의 고향과는 달리 중원에서는 아직도 이웃간의 정이 끈끈하게 살아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웃간의 정이란 곧 정보이기도 해서 어느 동네건 한 일주일만 살면 아주 온 마을 사람들이 다 알아볼 지경이 된다·
그러니 열렬한 호응에 금세 신상이 드러나고 마는 것이다·
“점소이요? 어쩐지 목청이 보통이 아니더라니· 이봐요 왜 자꾸 딴지를 걸어요?”
“그것이 제가 똑똑히 들었단 말입니다!”
점소이가 내친 김인지 제 사연을 털어놓았다·
지난 겨울에 공사가 한참일 때에 공사를 맡은 장흥상방의 목수들이 회식을 왔더라는 것이다·
본래 회식이란 술이 함께하고 술의 함량이 정도를 넘어가면 할 소리 못 할 소리가 구분되지 않고 튀어나오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중원과 서양 청의 고향을 통틀어서 기이하게도 사람들은 점원을 사람으로 치지 않고 배경쯤으로 여기는 습성이 있었다·
그리하여 점소이가 똑똑히 들었으니·
“애초에 말도 안 되는 설계라고 그랬단 말입니다! 세상에 누가 그따위로 강언을 짓고 제방을 쌓느냐고· 책상물림도 정도가 있지 현장이라고는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놈이 만든 설계라고 아주 욕을 욕을 쏟아냈지 뭡니까!?”
“오잉·”
청이 그에 다시 설계자를 보았다·
설계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어디가 말도 안 되는 설계라는 겁니까!? 만채로부터 주건까지 최대한 쉬운 설계로 그저 세우고 채워서 쌓아놓기만 하면 되게 구상해놓았단 말입니다! 관에서도 그러하니 제 설계를 뽑은 것이 아닙니까!?”
청이야 그쪽 토목 용어는 모르겠고 사실 그 쪽 지식이 있었더라도 청의 고향과 중원의 용어가 다르니 어차피 알아듣지 못 할 소리기는 했다·
설계자의 항의에 점소이가 어물어물·
“그야 그런 건 나는 모르고··· 그냥 난 그렇게 들었으니까···”
“이거 영 몹쓸 분이네· 사람이 죽네 사네 하는 상황에서 그렇게 소리치면 죽으라고 아주 제사를 지내는 것밖에 더 돼요?”
“하지만 저 놈 때문에 이 난리가·”
“이 분 때문인지 어떤지는 아직 모르는 일 아닌가요? 나중에 밝혀지면 그때 매달건 태우건 하면 되는 거고·”
“그야···”
점소이가 시선을 피했다·
사실 큰 재난 앞에서 사람이 죽일 놈을 찾는 일은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성이다·
인간의 역사가 희생양의 역사와 같다고 하겠으니 하소연할 데 없는 억울함을 누구 하나 탓을 잡아 해소하려는 그렇게 해서 타는 속을 진정시키려는 방어 기제다·
“그런데 장흥상방이요?”
“치수 공사를 맡은 상방입니다·”
치수 공사의 과정은 이러했다·
관에서 치수 공사를 예고하면 상단에서 신청을 하여 공사 업체를 선정한다·
그리고 동시에 또 설계를 모집하여 개중 뛰어난 것을 뽑는다·
그 이후에는 관부에서 선정된 상단에게 설계도와 공사비를 내려주는 식이었다·
여담으로· 설계와 공사를 따로 모으는 이유는 중원 나름대로의 부패 방지책이었다·
하지만 중화의 관리란 과거로부터 미래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도 부패하지 않은 적이 없다·
본래대로라면 설계는 관의 치수 담당관이 세워서 내려주어야 한다·
하지만 치수 담당관이란 상급자의 아들 혹은 친구 심지어 지어낸 이름으로 관원 명부에 써낸 후에 월급을 빼돌리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직책이다·
그러니 재야의 인재들에게 이름을 알릴 기회를 준다는 명목으로 설계까지 공모를 하는 것이다·
이름을 알릴 기회를 ‘베풀어주는’ 것이라 설계값은 당연히 주지 않는다·
설계값은커녕 오히려 뒷돈을 받지 않고 설계를 채택한 관리의 청렴함을 칭송해야 하는 일인 것이다·
“장흥상방이라· 그러면 설계가 멀쩡한 거였으면 공사가 문제가 있었다는 말이네요·”
“크흠·”
“장흥상방은 좀·”
“으음····”
어쩐지 군중들의 반응이 뜨뜻미지근하다·
뭐지? 왜?
당장이라도 막 소리 높여 불태워야 한다느니 그런 소리가 나올 줄 알았더니만·
장흥상방의 이름이 나오자 분위기가 추욱 가라앉더니만 다들 한숨을 쉬고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는 슬그머니 흩어지기 시작하여 자취를 감추는 것이다·
뭐지? 이 분위기?
무슨 이름을 말할 수 없는 말해서는 안 되는 그 분처럼 무슨 금기라도 되는 마냥·
청이 대체 뭔가 싶어 어리둥절한 때에 설계자가 넙죽 큰절을 올렸다·
“은인께 제대로 인사도 못 드렸습니다· 저는 약중윤이라 하고 얘야 은인께 인사 올리거라·”
“약지준입니다·”
“음· 이제 어쩌시려구요? 도시에 계시기는 위험하실 것 같은데요·”
“그야 그렇습니다만 길이 엉망이고 시일이 어수선하니 어디 갈 수도 없는 처지가 아니겠습니까·”
재해 이후에는 강도와 도적이 들끓는다·
도시가 위험하다고는 하나 지금의 관도보다는 나은 편일 것이라고·
“음· 지금 낙녕무관에 가는 길인데 음· 혹시 그쪽에서 잠시 보호해주실 수 있는지 여쭤봐 드릴게요·”
“어찌 이런 은혜를 감사 감사하다는 말이 이렇게 모자란 표현인지는 몰랐습니다·”
“음·”
청이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말이 보호지 또 감시이기도 하다·
아직 설계가 온전하니 문제가 없었다는 보증은 없지 않은가·
무고한 이라면 보호가 되겠지만 나중에 혹시라도 설계부터 문제가 있었다고 하면 그때는 감금이 될 테니까·
그렇게 어영부영 군중들이 해산해버리고 약중윤이 마차를 몰겠다고 선뜻 나섰으니 청도 슬슬 정들기 시작한 말궁둥이를 뒤로 하고 마차에 올랐다·
오르려 했다·
“아가씨! 서문 아가씨! 여기서 뵙습니다!”
“오잉? 그·”
청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군가 굉장히 살갑게 반기며 호들갑을 막 떠는데 음 누구시더라·
얼굴은 어디선가 본 것 같아서 아예 낯설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누구냐고 하면 도통 모르겠는 그러한 잘 모르는 이였으니까·
“누구세요? 아시는 분이신가?”
청이 사내를 유심히 살폈다·
손등에 두껍게 붙은 굳은살이며 가득한 상흔을 보니 보통 무투가라고 하는 반푼이 무인인 것 같은데·
이상하다·
내가 소림승 아닌 무투가랑 겸상한 적이 없는데?
아· 낭인들이 있었지 참· 근데 낭인 아저씨는 아닌데?
그에 사내가 요란을 떨었다·
“미천한 소인은 걸타란이라고 합니다요· 설가상회에서 몇 번 뵈었을 뿐이니 당연히 소인을 모르시겠지마는 저는 아가씨를 뵈고 너무나 가슴이 뛰고 감격하여 그만 이렇게 소란을 떨고 말았지 뭡니까· 흐흐·”
“아· 상회 분이세요? 여기는 어쩐 일로? 뭐야 설가상회가 여기까지 진출했어요?”
“부디 말씀 낮춰 주시지요· 그리고 소인은 태청상방의 낙녕 지부장입니다요·”
“엥· 직장 옮겼어요?”
“동맹 형제 상단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음· 그렇습니다· 굳이 말씀드리자면·”
걸타란이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이고는 말을 이었다·
“전주가 같다고 하겠습니다요·”
“아· 전주가·”
청이 곧장 이해했다·
설가상회나 태청상방이나 돈을 대어 큰 지분을 가진 사람 혹은 모상단이 같다는 뜻이었다·
청이 모르는 것은 전주의 정체다·
전주는 천마신교다·
그러니 마교 비작부 소속 특급 요원(구 특급 살수 직책 이름이 바뀌었다)이 청을 보았으니 그 감격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심지어 청이 발구름으로 한 방에 군중을 제압했을 때 거기에서 느낀 거대한 위엄이라니·
감격의 눈물 참기 일백 배·
오체투지 참기 오백 배였다·
“헤헤 말씀 낮춰 주시지요·”
“아니 어떻게 그래요? 제가 무슨 상회랑 연관 있는 사람도 아니고·”
“그게 아닙니다요· 최 방주님이 아가씨를 뵈면 어른으로 모시라고 단단히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요·”
“최 방주? 할아범이요?”
“예 이번에 전주의 투자를 받아서 새로 상방을 차리셨지요· 그러니 아가씨께서는 제게도 웃사람이 되십니다요·”
“음· 그런가?”
음· 할아범· 능력도 좋네·
할아범 상방이면 엥·
청이 혹시나 해서 물어보았다·
“그 혹시 태청상방이라는 이름이···”
“헤헤· 당연히 아가씨 이름자에서 따온 것이지요·”
“아니 왜 남의 이름을 함부로다가·”
아니 부담스럽게시리·
하지만 할아범이라면 충분히 또 그렇게 할 위인이라서·
그런데 할아범 상방이면 내가 좀 부려먹어도 되지 않나?
“마침 잘 됐다· 도시가 이 꼴이라 구휼을 좀 베푸려는데···”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자비로우신지· 아름다우신 만큼 마음도 고우십니다·”
“음· 제가 황금을 좀 가지고 있는데 마흔 관이면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부디 말씀 좀 낮춰 주시면···”
“어· 그래·”
생판 모르는 어른에게 말을 낮추려니 청이라고 해도 좀 어색하다·
그러나 걸타란은 만족하는 눈치였다·
“황금이란 말씀이시지요· 하지만 저희도 이미 구휼을 준비중인지라 아가씨의 귀한 재산을 굳이 나누어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요·”
“오잉· 구휼을 준비중이라구요?”
“제발 말씀을 좀 편하게···”
“벌써 구휼 준비를 하고 있다고?”
“예· 도시가 살을 맞은 때에 장사가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요· 일단 사람이 살고 봐야 할 일이니까요·”
말이야 그렇지만 애초에 태청상방의 목적 자체가 구휼이다·
이는 구휼을 통해 인심을 사로잡아 중원으로 파고드려는 천마신교의 더러운 수작질인 것이다!
마침 수해가 날 시기에 맞춰서 슬금슬금 하남 땅에까지 침투한 때에 제대로 수해가 터졌다·
덕분에 걸타란이 밤새 쓸려나간 도시를 보고 아주 콧노래를 불렀더란다·
하늘이 신교를 보우하시려니 이렇게 좋은 기회를 주시는구나 하고·
“음· 좋은 일 하시네· 아니 하네·”
사정 모르는 청이 그리 말했다·
하지만 사정을 알았더라도 똑같이 말했을 것이다·
일부러 수해를 일으킨 것도 아닌데 목적은 좀 불순해도 구휼은 구휼 아니겠냐 하고·
“헤헤· 조금 더 칭찬해 주시겠습니까?”
“어· 장하다? 훌륭하다?”
“크흑·”
돌연 걸타란의 눈매가 붉게 달아오른다·
그야 강림한 천마지존을 대면하는 것도 모자라 치하를 받지 않았는가·
애초에 외부 활동으로 바깥의 실상을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겪는 비작부 요원들이기에 간난쟁이부터 단단히 세뇌가 된 천마바라기들인 것이다·
오 천마지존이시여·
나의 빛 나의 구원 내 삶의 이유이시여·
사정 모르는 청은 그저 좀 떫다·
음· 이게 그렇게까지 감격할 일인가?
좀 이상한 사람 아냐?
태청상방 이대로 괜찮은 것인가?
남의 이름 걸고 망하는 건 좀·
“그래도 좋은 일은 보태면 보탤수록 더 좋지 뭐· 안 그래도 황금 덜렁 맡겼는데 막 새어나가고 할까 봐 걱정이었는데 잘됐네·”
안 그래도 구휼을 하긴 해야겠는데 가진 것이라곤 금괴뿐이고 딱히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던 판이다·
나름 머리를 굴린 것이 정파 무관에다가 맡기고 내 이름도 팔고 하면 성실하게 쓰지 않을까 하여 낙녕무관으로 향하던 참이다·
하지만 할아범네 상단이면 아주 믿고 척 맡길 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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